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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현대인의 삶을 ‘호모 사케르’라 정의한다. 호모 사케르란 고대 로마에서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형벌을 받은 죄인들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사형을 당하지는 않지만 시민으로서의 법적인 모든 권리를 잃게 되어 단순한 생명체로 살아가야 했다. 극단적인 경우 누군가 호모 사케르를 살해한다 해도 살인자는 그로 인해 처벌받지 않았다. 호모 사케르는 육체적으로 살아있긴 해도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를 죽였으므로 법적인 문제를 따질 수 없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현대적 표본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테러 용의자들이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만들어진 군사명령에 따라, 미국 정부는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테러 혐의가 있는 비(非) 미국 시민권자들을 무기한 수용하고 있다. 이들 수감자들은 제네바 협정에 따른 전쟁포로도 아니고 미국 형법에 따른 죄수도 아닌 애매한 존재로 미국 정부에 잡혀 있다. 법적 인격이 말소당한 채, 그저 단순한 정부 권력의 작용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수감자들은 명백히 육체적으로는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살아있는 유령이 되고 만다.

▲ <경향신문> 1월 3일 4면
그런데 이러한 ‘배제’는 사실, 저 멀리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호모 사케르의 예는 노숙자이다. 노숙자들이 다가와서 말을 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외면한 채 지나치곤 한다. 노숙자들은 육체적으로 존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타인과 말을 할 수 없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른 예는 청년실업자들이다. 이들은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대책을 요구하지만, 정부는 ‘고용대박’이라며 실업상태라는 현실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백수, 노숙자, 불법 체류자, 장애인, 동성애자 등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참여의 권리를 배제당한 호모 사케르로 살아가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의 또 다른 예는 ‘왕따’이다. 왕따는 분명 교실 내에 존재하지만, ‘빵셔틀’이나 구타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 받지는 못한다. 학교라는 사회에서 배제당한 체 살아가기 때문이다. 왕따와는 말도 안 섞는다지 않는가. 왕따를 폭행해도 가해학생은 종종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까지, 왕따는 호모 사케르를 너무도 닮아 있다.

▲ 프랑스= 표광민 통신원/프랑스 고등교육원(EPHE) 제 5분과 정치철학 석사
지난 2일 프랑스 북부의 파-드-칼래 지방에서 12살의 한 여자 중학생이 아버지의 사냥총을 이용해 자살했다. 이 여학생은 수개월 동안 학교에서 급우들의 폭행과 놀림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사회 역시 참극이 벌어지고 나서야 호들갑을 떨고 있다. 10% 이상의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폭행 및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호모 사케르라는, 배제와 억압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 현대 사회에서 집단 따돌림, 학교 폭력 현상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물일 것이다. 청소년들은 힘만 있으면 어떤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을 어른 세계로부터 배우고, 이를 사회에 나가기 전, 학교에서 미리 실습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일단 문제는 어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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