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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압력 극복, 언론인들에게 주어진 과제”

[인터뷰] 그렉 다이크 전 BBC 사장 영국= 장정훈 통신원l승인2012.03.08 13: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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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가 오면 도시는 왠지 좀 더 우울해지고, 좀 더 어수선해 진다. 버스와 택시, 그리고 사람들이 엉켜 빚어내는 소음도 방향을 잃고 길바닥을 뒹군다. 오후 4시도 안 됐는데, 빠른 속도로 어둠이 거리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흐린 날씨 탓도 있지만 계절 탓이 더 크다. 영국의 겨울은 정말로 해가 짧다.

저녁과도 같은 오후의 끝에 그렉 다이크(Greg Dyke) 전 BBC 사장을 만났다. 그는 지난 2000년 1월부터 2004년 1월까지 BBC 사장으로 재임하며 무료 다채널 방송인 프리뷰를 도입하고 방만한 재정을 손보는 등 사내 개혁을 이룬 인물이다. 하지만 이라크전 참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BBC를 압박한 토니 블레어 정부에 반기를 들며 편집권을 방어하다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사장직을 그만두게 됐을 때 BBC 직원들은 사임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해 저무는 오후였기 때문일까.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막연히 그가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천천히 숨을 고르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7년생인 그는 벌써 65살이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BBC 사장 퇴임 후 영화학교 BFI 학장과 앰버서더 극장 그룹의 회장, 대학교 이사장, 축구클럽 회장 등의 직함을 달고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었다. 게다가 3개의 골프 클럽과 호텔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BBC 사장 시절보다 한가하다며 웃는다. 바쁜 사람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어 인사를 건넨 후 곧바로 인터뷰에 들어갔다.

BBC를 떠난지 이미 오래지만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BBC에 대한 자부심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의 이런 자부심은 BBC가 세계적인 공영방송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까닭과도 맞물려 있는 듯 보였다. 그는 “BBC가 전 세계인에게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정부로부터 철저히 독립적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에 정치를 비롯한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공정방송 회복”의 구호를 외치면서 MBC, KBS, YTN 등 방송 3사의 PD·기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의 상황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 전문이다.

“공·민영 방송 모두 공정·독립성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법에도 나와 있지 않나”
   
▲ 그렉 다이크 전 BBC 사장(자료사진) ⓒMBC

- 사장을 그만두고 한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
“한국은 흥미로운 나라다. 친절하고 활동적인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미국스러운’ 느낌도 있다. 아, 그리고 사람들이 질문을 참 많이 하더라.” (웃음)

- 취미나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승마와 축구를 좋아한다. 음식은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입맛을 다시며) 정말 맛있다! 하지만 일식은 싫어한다. 도대체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영국 음식도 싫다.(웃음) 피시 앤 칩스(fish & chips)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English Breakfast)는 정말 별로다.”

- 오늘 점심은 무엇으로 먹었나.
“(싱긋 웃으며) 샌드위치로 때웠다. 하하하.”

- 하하.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BBC 사장을 다시 하고 싶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현역으로 돌아가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하다. 요즘 큰 이슈가 워낙 많지 않나. 유럽 경제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여주는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지금 BBC에서) 24시간 뉴스를 하고 있지만, 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잘 보여주진 못하는 것 같다.”

- BBC 사장이라는 자리를 좋아했나?
“난 사장이 좋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최전방 아니면 고위 간부로 있었다. 중간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중간은 재미가 없다. (BBC) 사장으로 있을 때,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다음날 회사에 가서 그걸 실행하곤 했다.”

- 그런 만큼 BBC 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여러 생각이 있었을 것 같다. 기분이 어땠나.
“역사가인 친구가 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해줬다. “걱정 마라. 역사는 너의 편이다”라고. 나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쁘지 않았다.”

- BBC가 세계적인 공영방송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인에게 BBC가 하나의 ‘아이콘’이 된 건 다른 게 아니다. 정부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언론이, 특히 공영방송이 그러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정치인들도 계속해서 참견을 하려하지만 BBC는 독립성을 지켜내고 있다.”

- 어떤 면에서 상업방송은 독립성이 지키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상업방송도 공정성과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 그건 법으로도 정해져 있는 일이다. 상업방송이라고 해서 특별히 (공정성과 독립성을 지키는 일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정치적인 압력은 공영방송과 상업방송 모두에게 항상 있는 일이다. 그 압력에 잘 대응하는 건 방송인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테스트(test)다. 극복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

- 방송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방송에서 정치 성향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사람은 정치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정’이라는 게 뭔지 이해한다면, 그리고 ‘권력자의 애완견’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않다면 정치색이나 출신 등이 문제될 건 아니다. BBC엔 정치인 출신이면서도 언론인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 영국의 집권당들은 항상 BBC와 사이가 좋지 않다. 이유가 뭘까.
“정치인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의심하는 질문은 받지 않길 원한다. 반면 언론은 모든 일에 의문을 제기하는 속성이 있고, 그래야만 한다. 마가렛 대처(전 영국수상)는 BBC를 ‘안티(반대)’ 세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자본권력이 무섭다고? 경영과 편집을 철저히 분리하면 의식할 필요 없어”

- 그래도 영국의 정치인은 언론의 거친 인터뷰를 거부하지 않고 잘 응하는 것 같은데.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엔 힘든 시간들도 받아들인다. 과거 BBC가 이라크전 발발 전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당시 미국 국방장관을 인터뷰했는데, (럼스펠드가) 10분 만에 인터뷰가 너무 거칠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그런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을 거다.”

- 요즘은 정치권력보다 자본권력이 더 무섭다고 한다.
“자본의 힘이 정치권력보다 커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영국 방송사들의 논조가 자본의 영향을 받고 있진 않다고 본다. BBC도 예산이 삭감됐지만, 사실 엄청난 영향이 있는 건 아니다. 상업방송을 오랫동안 운영했지만 광고주에게 휘둘려 본 적은 없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스폰서가 아닌 광고를 판매한 돈으로 만들어진다. 방송사지만 (경영과 편집권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 제작진들은 광고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의식해야 하는 대상은 오직 시청자뿐이다.”

실제로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방송 광고시장은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2010년 14.1%가 증가했고, 민영방송 ITV의 2011년 상반기 성장률도 4%로, 1515 밀리언 파운드의 수입을 올렸다. 사람들의 TV 시청시간이 늘어난 데다 좋은 프로그램을 편성한 게 주요했다는 분석이다.

- ‘허튼 보고서’로 BBC를 떠났다. 어떻게 생각하나.
“‘허튼 보고서’는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허튼 판사는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가 원하는 바를 전달하는 배달원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토니 블레어에 의해 조종을 당했다는 건 아니다. 그는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안보에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었고 저널리스트를 굉장히 싫어했다. 토니 블레어의 측근이 내 친구에게 말하기를 “토니 블레어가 제대로 된 사람을 판사로 골랐다”고 했단다. 그러니 결과가 그렇게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거였다. 그런데 나는 토니 블레어가 제대로 된 사람을 골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허튼 판사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불순한 의도를 다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06년 그렉 다이크 전 사장이 펴낸 책 ‘BBC 구하기’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 당시 BBC의 기자 앤드루 길리건은 영국 정부가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등에 대한 정보를 윤색해 이라크 전쟁 참전 명분으로 사용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길리건 기자와 BBC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렉 다이크 전 사장은 기자를 옹호했고 공영방송 BBC의 정치적 독립을 강조하며 이에 맞섰다. 그러나 2004년 1월 일방적으로 정부를 지지하는 ‘허튼 보고서’가 나왔고, 그는 끝내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 때 BBC 직원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그의 해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BBC와의 싸움에서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가 승리했다고 볼 수 있을까.
“짧게 보면 토니 블레어가 이겼다. 하지만 길게 봤을 때 그는 분명히 졌다. 토니 블레어는 국민에게 거짓을 말하고 나라를 전쟁으로 이끌었다. ‘허튼 보고서’ 이후 BBC 구성원 모두가 저항을 했다면 나는 사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 약한 이사회 위원장이 사퇴를 했고, 다음 날 이사회가 내게 사퇴를 요구했다. (직원들이 나를 지지한다고 해도) 이사회의 지지 없이는 사장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나로선 (사퇴 외엔) 방법이 없었다.”

- 토니 블레어가 원한 게 당신의 사퇴였을까.
“그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토니 블레어 보다는 언론담당관 알레스터 캠벨이 원하는 거였다. 캠벨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국민이 BBC를 지지했기 때문에 BBC는 지지 않았다. BBC 이사회가 저항하지 않은 건 큰 실수다. BBC는 거의 모든 권력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라크전 당시에도 직원들은 저항을 했지만 이사회가 받쳐주지 못했다.”

-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SNS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엔 난 너무 늙었다.(웃음) 그래도 굳이 이야기를 한다면 SNS와 스마트폰은 정보의 전달 속도를 엄청나게 빠르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보를 찾아내고, 그 정보를 이해하고, 가치를 분별하는 건 좀 더 전문적인 분야인 만큼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필요하다. 저널리스트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어떤 사건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SNS는 저널리스트의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는 역할을 아주 훌륭히 수행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 뭘 하고 싶나?
“난 이제 예순이 훨씬 넘었다. 돈도 더 필요 없을 만큼 많이 있고. 이제부터는 그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아이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영국= 장정훈 통신원  mooso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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