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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고 미안해서 오늘도 걷는다

[현장] 부산에서 서울까지 KBS '리셋원정대' 동행취재 박수선 기자l승인2012.03.26 21: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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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아침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사무소 앞. 파업 중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조합원들로 구성된 ‘리셋원정대’가 원정길에 나선지 9일째 된 날이다. 겨울비 같은 봄비가 아침부터 땅을 적셨다. 박성주 촬영감독은 “원정대 기간 중에 가장 궂은 날씨”라고 했다.

원정대 식구는 원정 첫째날부터 참여한 이경호· 김석 기자와 박성주·이윤정 촬영감독을 비롯해 총 10명. 홍소연 아나운서와 임주영 기자는 이날 아침에 계룡으로 내려왔다.

“오늘은 대전방송총국까지 갑니다. 자 출발합시다.” 원정대 대장인 이경호 기자의 말에 9일째 원정대 일정이 시작됐다. 대원들이 걸어야 할 거리는 19Km. 이경호 기자는 “하루에 30km를 걸었던 날도 있었는데,오늘은 부담없는 거리”라고 기자를 안심시켰지만 이날 일정은 만만치 않았다.

국도로 진입하자 대형트럭들이 쌩쌩 지나갔다. 덤프트럭이 물웅덩이를 지나칠 때면 물벼락을 맞을까봐 몸이 움츠러들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손이 얼어붙고 신발은 금세 젖었다. 야속하게도 대전방송총국에 도착할 때까지 빗줄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 지난 23일 KBS '리셋원정대' 10명은 계룡시에서 대전광역시까지 19km를 걸었다.ⓒPD저널

■“징계 협박 두렵지 않아”= 지난 13일 2개의 팀으로 나눠 해남과 부산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뚜벅뚜벅’ 한반도 이남의 중간을 통과했다. 원정대는 ‘정권의 방송’에서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하면서 국토대장정에 올랐다.

하지만 원정대 참여는 생각보다 저조했다. 당초 원정대에 15명 정도 신청했지만 출발 인원은 10명 정도였다. 이경호 기자는 원정대 참여를 막으려는 회사의 종용이 심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원정대에 참여하면 적극적인 가담자가 된다는 엄포를 직간접적으로 했어요. 징계를 하겠다는 회사의 협박이 원정대 참여에 영향을 미쳤겠죠.”

<인간극장> 내레이션을 맡고 있는 홍소연 아나운서는 지난 15일에 이어 이날 원정대에 또 합류했다. “2년 전에 <인간극장>을 맡았을 때도 어렵게 투입됐어요. 아마 이번엔 본보기로 교체될 가능성이 높아요. 처음엔 마음이 복잡했는데, 파업을 결심하고 나니 후련합니다.” 사측에서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아나운서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나운서들이) 집회 참가율이 가장 높다”고 뿌듯한 듯 웃었다.

이윤정 촬영감독도 회사의 징계 압박에 시달렸다. <드라마 스페셜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공주의 남자>로 각광받는 젊은 드라마 촬영감독이 적극적으로 파업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사측 간부들뿐만 아니라 선배들도 말렸다. “그런 일에 왜 나서냐”는 책망이었다. “촬영감독들은 왜 매번 PD와 기자 뒤에 서 있어야 하는지 불만이었어요. 저도 KBS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먼저 나서고 싶었습니다.” 이윤정 촬영감독은 지난 6일 촬영이 시작된 <드라마 스페셜 강철본색>을 포기하고 파업을 택했다.

   
▲ KBS '리셋원정대'ⓒPD저널
■“말로만 듣던 진통제 투혼을...”=고생길을 떠난 후배를 보는 선배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결국 박성주 촬영감독이 따라 나섰다. 그는 지난해 일본 취재를 갔다가 방사능에 피폭된 데 이어 최근에는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원래 체력이 약해 뒷산 오르기도 힘들다”는 그는 원정대 출발 둘째날 바로 탈이 났다. 험한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30km를 무리하게 걸었던 탓이다.

“힘들면 올라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끝까지 완주하라는 말보다 더 무섭습니다. 원정대에 저 같은 약골도 있어야죠. KBS의 보도나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런 것은 막을 수 없었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떳떳하게 ‘할만큼 했다’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겁니다.”

10여일 동안 부상자도 속출했다. 지난 21일부터 합류한 최건일 기자는 무릎 통증 때문에 이날 오후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다.

■원정대에 쏟아지는 응원과 격려=궂은 날씨에 진통제를 맞으면서도 원정대는 멈추지 않았다. ‘지원군의 발길’도 끊기지 않고 있다. 무엇이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최건일 기자에겐 반성의 의미가 컸다. “사장 퇴진을 목적으로 걷고 있지만 KBS기자로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잘못인지 모르고 살았는지 사과하는 마음입니다. 노동부와 서울시청을 같이 출입했었는데, 시청을 챙겨야 된다는 핑계를 대면서 노동 이슈를 외면한 게 아닌가 후회가 큽니다.”

5일째 원정대에 참여하고 있는 김영삼 PD는 지난 16일 화상 통화로 '원정대'의 동료와 후배들을 보고 부채 의식이 생겼다. 지난 2003~2004년 KBS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 서동구 사장 퇴진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는 이번 파업을 겪는 심경이 복잡하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어렵죠. 도덕적인 정권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 흠집이 난다고 해서 물러날 것 같진 않아요. 이번 파업 자체가 김인규 사장을 몰아내기 위한 파업이라기보다 제가 후배들한테 미안해하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미안한 KBS 구성원들이 하나의 방편으로 파업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KBS가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스스로 물어보는 계기가 된다면 이번 파업은 성공했다고 봐요.”

부산에서부터 원정대에 참여한 김석 기자는 서울에 있는 동료들뿐만 아니라 원정길에서 만난 지역민들과 얼굴도 모르는 트위터리안들에게 큰 위안을 받았다. 리셋원정대 트위터를 관리하는 그는 쉬는 중간에 수시로 멘션을 올렸다. 이날도 ‘여성대원들, 고생이 장난아니다’는 글을 올리자마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생전 처음 가는 동네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KBS 사람들이냐’고 묻고 격려를 해주세요. 관심있게 보고 있다고 힘내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한 사람일지라도 이런 마음을 모아내면 서울에 있는 조합원들에게 용기를 주고 더 큰 희망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날 대원들은 점심에 백숙으로 허기와 추위를 달랬다. 식당 주인인 김문찬 씨는 다시 길을 나서는 원정대에 “건강하십시오. 파이팅”이라고 응원을 보냈다.  “MBC는 파업하는 줄 알았는데, KBS까지 하는 줄은 몰랐어요. 정치인들은 언론인들의 파워가 크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원정대는 청주, 평택, 수원을 거쳐 오는 4월 3~4일경 서울 여의도 KBS에 도착할 예정이다.


박수선 기자  susun@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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