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의 편지] 이젠, 결별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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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 흘려 싸우고 있는 MBC동지들에게

언론장악의 파국적 종말을 예고하듯 광란의 칼부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동조합 위원장과 사무처장이 또 해고되었습니다. ‘조인트 사장’ 김재철 씨가 MBC에 들어서기 전까지, 87년 민주화투쟁 이후 공정방송실현과 언론독립을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해고되었던 MBC내 언론인은 단지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20년이라는 긴 시간의 격동이 만들어 낸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김재철 씨 치하에서는 벌써 해고자가 여섯 명입니다.

가히, 피 맛을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광란의 유혈극입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사회적 절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김재철 씨는 취한 듯 망나니 칼춤을 춥니다. 무한도전입니다.

필시, 그의 주변에서는 ‘이 번에 다 죽여 버려야 한다’고 열심히 부추기는 인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적어도 20년을 선후배이고 동료였으나 저는 이제, 이 사람들이 완전히 미쳤구나,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MBC라는 조직이 그리 되었습니다. 도살장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비호 아래서 김재철 씨와 그 일당들이 자행한 이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을 저는 살 떨리는 ‘살인의 추억’으로 기억할 것 입니다. 한 생을 살면서 없었으면 좋았을 쓰라린 비극입니다.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동료를 무시로 죽이는 이 피비린내 진동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이제 저들의 이름을 뼛속 깊이 새기고자 합니다. 김재철, 안광한, 백종문, 차경호, 고민철, 전영배, 이우철, 이진숙….

▲ 언론노조 MBC본부의 파업이 두달을 넘기며 해고자가 속출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월 31일 파업 출정식 장면 ⓒ언론노조 MBC본부
그리고 지금 김재철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보직자들. 진실과 정의에 눈감고 개인의 안위와 출세를 좇으며, 그러면서 마치 고민하는 양 ‘양다리’와 ‘보험’으로 이 처절한 시간을 처세하는, 내가 아는 모든 이들도, 똑똑히 두 눈에 담아 두고자 합니다. 지독한 결별이 제게 새로운 삶의 힘을 가져다 줄 거라 생각합니다.

오십이 코앞이다 보니 살면서 깨닫는 게 있습니다. 곧 죽을 것만 같던 시간도 반드시 지나간다는 것이고, 굽은 길도 시간의 문제일 뿐 걷다보면 반드시 사람을 목적지로 이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지옥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본능 이상의 합리적 확신도 느낍니다.

이제 곧 청산의 시간이 도래할 것입니다. 약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택은 개인의 자유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사회적 정의임을 확실히 할 때 기회주의자들이 설 땅은 없어집니다.

친일부역자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해방 이후 이 나라의 역사가 왜곡과 파행의 길을 걸었듯, 어줍지 않은 화해와 용서는, 우리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을 온존케 하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을 되풀이 하게 할 것입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시 한 편을 읽습니다. 여러 번 읽습니다. 위로가 됩니다.

은밀한 시간에 / 근심은 여러 개 가운데 한 개의 근심을 끄집어내 들고/
나와 정면으로 마주 앉네/
그것은 비곗덩어리처럼 물컹물컹하고/긴 뱀처럼 징그럽고, 처음과 끝이 따로 움직이고/
큰 뿌리처럼 나의 신경계를 장악하네/
근심은 애초에 어머니의 것이었으나/마흔해 전 나의 울음과 함께 물려받아/
어느덧 굳은살이 군데군데 생긴 나의 살갗처럼 굴더니/아무도 없는 검은 밤에는/

▲ 이근행 전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
오, 나를 입네, 조용히/
근심을 버리는 방법은 새로운 근심을 찾는 것/
빗방울, 흙, 바람, 잎사귀, 눈보라, 수건, 귀신도 어쩌질 못하네

- 문태준, ‘근심의 체험’ 전문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근심하면서 삽니다. 걱정하면서 싸웁니다. 함께 웃을 봄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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