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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호 PD의 되감기] 영화 ‘Being There’

1990년 3월 23일자 경향신문 18면. ‘텔레비전 전성시대를 꼬집은 난센스하이 코미디영화’라는 투박한 표현으로 주말 KBS 1TV에서 방영될 영화 한 편이 소개되었다. 우리말 제목 역시 다소 식상한 <어느 날 갑자기>. 사실 이 영화는 <귀향>, <해롤드와 모드>를 만든 할 애쉬비 감독의 걸작 코미디 <Being There>였다.

▲ 영화 ‘Being There’/ 감독: 할 애쉬비 Hal Ashby (1979) /주연: 피터 셀러스, 셜리 맥클레인
“주인님이 죽었어요.(Your man is dead)”

1970년대 미국의 워싱턴. 모시고 있던 주인이 죽자 정원사 챈스(Chance)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집 밖 세계로 조심스레 걸어 나온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 인물처럼 한 손에는 가죽가방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을 쥐고 있다. 허름한 그의 양복 속에는 지갑도, 운전면허증도, 신용카드도 없다. 다만 TV 리모컨 하나가 들어있을 뿐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TV보기. 오직 TV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학습해 왔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챈스(피터 셀러스)는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항상 단정한 옷차림과 동요하지 않는 얼굴, 그리고 “예, 이해했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대답으로 세상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다. 어찌 보면 80년대 포레스트 검프인 셈이다. 우연한 교통사고로 대부호이자 대통령의 멘토인 벤자민 랜드의 저택으로 가게 된 챈스.

여기서부터 코미디는 본 궤도에 오른다. “모든 성장에는 저마다의 계절이 있지요.” 정원사로서의 단순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챈스의 직설적인 화법을 랜드와 대통령을 비롯한 워싱턴의 거물들은 마치 우회적인 정치적 비유로 잘못 해석한다. 그리고 하나의 깨달음(epiphany)로 받아들인다. 이후 챈스는 <워싱턴 포스트> 편집장의 인터뷰 요청 전화를 받기도 하고TV 토크 쇼에도 출연한다. 대통령의 특명으로 CIA와 FBI에서도 그의 출신배경을 알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챈스의 양복이 1928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밖에는 밝혀내지 못한다.

정원사 챈스(Chance the gardner)는 이제 찬시 가드너(Chauncey Gardner)라는 이름의 미스터리한 워싱턴 정계의 거물이 된다. 워싱턴의 속물들은 “찬시는 8개 국어를 말하고 의학박사와 법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CIA와 FBI 역시 서로 찬시의 문서를 파기했다고 으르렁댄다. 하지만 정작 챈스는 사람들이 자기를 챈스로 아는지, 찬시로 아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 영화는 한 편의 우화(偶話)다. 코믹하면서도 신랄하다. 겉으로는 TV가 만들어낸 바보(챈스)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대 정치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바보들(나머지 세상 사람들)을 비판한다. 표정의 동요 없이 담담한 챈스에 비해 세상의 ‘똑똑한 바보’들은 오히려 호들갑스럽고 경박하다. 똑똑한 그들이 세상을 해석하고 거머쥐려고 한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챈스는 그저 세상에 존재할(being there) 뿐이다. 누가 더 바보인가. 각자의 해석에 맡기고 싶다.

▲ 오정호 EBS PD·EIDF 사무부국장
영화의 마지막, 챈스와 짧지만 유쾌한 우정을 즐긴 랜드의 장례식이 거행된다. 커다란 그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쓰여 있다. “Life is a state of mind”

참고로 이 영화가 제작된 다음 해 세상을 떠난 피터 셀러스의 묘비에도 같은 비명이 새겨져 있다. 삶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것을 주인공 피터는 깨닫고 떠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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