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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에 한 달 전부터 연재되고 있는 ‘시한부 칼럼’이 있다.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에 반대하거나 편집권 독립을 주장하며 맞서다 해직된 언론인들의 수기를 싣는 칼럼이다. 이 칼럼은 이들이 복직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실을 예정이라고 독자에게 설명했다. 이 칼럼의 의미는 이 칼럼을 통해 이들이 복직되어 사라질 때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해직 언론인이 있는 곳은 YTN 국민일보 MBC KBS 네 곳이었다. 각 사당 한 명씩 ‘해직일기’를 맡아서 4주에 한 번씩 쓰기로 했다. 그런데 KBS 최경영 기자가 애매했다. 아직 해고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사위원회의 재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고가 철회되어 부디 필진에서 제외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MBC 쪽 두 번째 원고를 써줄 예정이었던 이용마 기자는 구속영장 실질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근행 전 MBC 노조위원장이 두 번째 원고를 맡았다.

그들은 쿨하려 했지만 내용은 짠했다. 그들은 덤덤하려 했지만 읽으면 울컥했다. 자신의 ‘멘붕’을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걱정 마, 우리는 집단 멘붕이잖아’라고 말하는 MBC 강지웅 노조 사무처장, ‘그들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라면 이 파업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국민일보 조상운 전 노조위원장, ‘집에 등기로 온 징계서류에 놀란 어머니에 불효를 저질렀다’는 YTN 우장균 기자,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꿈꾸는 시인이나 혁명가로 불렀다’라는 KBS 최경영 기자까지... 이 시대 언론 종사자들이 귀 기울여야 할 동료들의 외침이라는 생각에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

“어쩌면 MB 정권을 겪은 사람들에겐 멘붕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MB 정권이 출범한 2008년부터 그랬다. 2008년 상반기. 난 다행히도(?) 한국에 없었다. 미국 연수중이었다. 한국이 광우병 파동으로 촛불이 한창일 때 난 문제의 ‘미국산 쇠고기들’을 별 탈 없이 즐기며 지내고 있었다. 연수를 마치고 6월말쯤 귀국했을 때조차도 난 내가 몸담았던 <PD수첩>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내가 첫 출근을 한 날이 바로 조중동이 1면에, 번역작가(자칭) 정 모 씨의 발언들을 무차별 인용하며, <PD수첩>에 융단폭격을 가했던 바로 그 날이었다. 그 날 이후였다.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온갖 소송들, 강제구인 시도, 결국 체포까지 1년여가 넘는 무자비한 탄압이 정권과 조중동에 의해 가해졌던 게. 난 사실 그 때부터 멘붕이었다. 멘붕의 사전적 의미가 맞다면.” (강지웅, MBC 노조 사무처장)

“국민일보 주식회사가 ‘해사행위’ 등을 이유로 나를 해고한 것은 2011년 10월 13일이었다. 해고가 확정되자 조합원 120여명이 “우리 모두가 조상운이다. 우리 모두를 해고하라”고 공분했다. 고마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외침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종면 전 위원장, 이근행 전 위원장의 사례에서 보듯 ‘끝까지 지켜지는 노조 위원장’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는 확인하고 다짐했다. 아직 이 파업은 끝나지 않았다고.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게 아니라고. 설령 파업이 끝난다고 해도 나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저들이 믿는 하나님이 있고, 파업 조합원들이 믿는 하나님이 따로 계시는 게 아니라면 머지않아 이 싸움은 하나님의 뜻대로 끝날 것이다.“ (조상운, 전 국민일보 노조위원장)

“해직기자가 되기 한 달 전쯤 어머니께 크게 불효를 저질렀던 기억이 난다. 당시 YTN 사장은 나를 해직시키기 위한 인사위원회를 열면서 출두명령서를 집에까지 등기로 보냈다. YTN 창사 이래 전무후무한 만행이었다. YTN 사장의 의도대로 어머니는 크게 충격을 받으셨다.

그런데 노동조합에서 회사가 집으로 보낸 명령서를 가져달라고 했다. 집에 와서 출두명령서를 찾았지만 이미 어머니가 버린 뒤였다. 어머니에게 그걸 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크게 화를 냈다. 이명박 정권 첫해, 광우병 촛불 집회이후 언론과 언론인 탄압의 서막이 올라갈 때였다. 어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드리워지는 어둠의 명령서를 집에 가만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우장균, YTN 해직기자)

“내 맞은편에 회사 수뇌부 두 명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문제의 보도본부 최고위급간부 000이었다. 행여 나와 눈이 마주치면 눈싸움이나 할 요량으로 계속 쳐다봤다. 그런데 공기밥 한 그릇을 단 두세 숟가락에 꾸역꾸역 먹어치우는게 아닌가? 고개 한 번 못 쳐들고, 감자탕은 뜨는 둥 마는 둥 황급히 자리를 뜨는 그 간부를 보며 문득 정연주 전 사장이 불법 해임될 그 즈음이 생각났다.

▲ 고재열 시사IN 문화팀장
당시 보도국 3층 흡연실 옥상에서 나오던 그가 날 보고 겸연쩍게 웃으며 한 말, “최경영 씨는 (기자가 아니었다면) 시인이나 혁명가가 됐을거야” 그 때 그 실없는 농에서 그의 변화무쌍한 처세를 예측하지 못한 내가 바보였다. 그는 바뀐 세상, 바뀐 권력에 적응하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기 위해 날 ‘꿈 꾸는 시인이나 혁명가’로 부르고 싶었던 것이다.“ (최경영, KBS 해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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