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6월 항쟁 25주년, 다시 희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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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여름, 승리의 기쁨에 취한 그들은 희망을 꿈꿨을 것이다. 20여일 동안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난 시민들의 외침, 그리고 독재정권의 항복 선언이 있었던 바로 그날.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 4·3 호헌조치로 직선제 개헌 등의 요구를 거부하고 군사독재 정치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해 정국이 요동치던 시기였다. 그해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사망한 데 이어, 6월 연세대생 이한열군도 시위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자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6·10 민주항쟁이 올해로 25주년을 맞았다. 6·10 민주항쟁은 군부정권을 끝내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낸 것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룩한 성과라는 점에서 혁명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무엇보다 우리의 기억 속에 흔치 않은 승리의 경험이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6월 민주항쟁이 생일을 맞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참담하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발전기금 행사에 참여해 생도들의 사열을 받았다고 한다. 사건 자체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국방부 측의 해명이다.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의례가 아니었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라는 것.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97년 내란죄와 반란죄 등 13가지 죄목이 확정된 죄인으로 대통령의 예우를 박탈당한 사람이다.

그런가하면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박근혜 의원은 ‘국가관을 의심받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며 종북 논쟁을 기어이 정치권 최대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애초 논란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 경선 의혹으로 시작됐지만 결국 ‘빨갱이 의원 색출’로 변질됐다.

‘반란’의 수괴가 육사생도들에게 사열을 받고 대한민국이 이념논쟁에 휩싸여 있는 사이 100일이 넘도록 언론사 파업이 계속되고 있다. 양극화 등 수많은 민생 문제를 뉴스에서 기대하는 것은 사치가 돼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관련자에 대해서는 전원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고 4대강 입찰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담합이 있었다는 뉴스 역시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돼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다시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25년 전 여름의 거리를 생각해본다. 그때도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컸던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이 바닥을 쳤을 때 국민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6월 민주항쟁의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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