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의 진실, 경찰특공대와 조중동에서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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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두 개의 문’ 연출한 김일란, 홍지유 감독

▲ 영화 <두개의 문> 포스터. ⓒ시네마달
3년 전 용산 참사를 다시 세상에 끄집어 낸 영화 〈두개의 문〉이 화제다.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인 단체관람 붐이 일고 있고, 각종 언론보도와 비평이 여기저기 쏟아지고 있다. 시위에 나섰던 철거민들은 사법부의 판단이 끝나 옥살이를 하고 있지만, ‘용산’은 다시금 과잉 공권력과 자본의 야만성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성소수자들의 삶을 다룬 커밍아웃 3부작을 제작한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의 김일란, 홍지유 감독이 용산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일 홍대 근처 카페에서 만난 두 감독은 영화를 통해 지금껏 사회적 약자들이 등장한 다큐멘터리의 서사구조를 흔들고, ‘반MB’ 너머로 이어져야 할 분노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소수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드러내놓고 증명해야 인정받는다. 게이나 레즈비언의 삶이 그렇다. 기존 다큐 또한 스스로가 스스로를 설명해야 인정받는 이야기 구조다. 우리는 다른 방식을 고민했다. 철거민 스스로 우리가 정당했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그들의 대척점에 있던 경찰특공대와 검찰의 프레임에서 싸움의 정당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김일란)

〈두 개의 문〉에서 철거민은 영상자료에만 드문드문 등장한다. 영화 대부분은 활동가들이 촬영한 영상과 경찰 채증자료, 법정 녹취록, 신문기사 등 객관적 자료로 구성된다. 감독은 “거짓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덕분에 관객들은 한 편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용산의 비극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감독은 검찰과 경찰이 제공하는 사실 속에 용산의 ‘가해자’가 명확히 보인다고 했다.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진압작전에서 경찰특공대는 사전 정보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 망루 안에 인화물질이 얼마나 있는지, 망루가 몇 층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남일당 건물 두 개의 문에서 망루에 진입할 수 없는 문을 따기 시작했다. 건물의 구조도 몰랐던 것이다.”(홍지유)

더욱이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증언들은 ‘황망’했다. 검찰은 계속해서 특공대원들에게 김남훈 경사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되물었다. 김일란 감독은 “참사 당시의 정황이나 인간적 도리와 같은 것들은 법 테두리로 들어올 수 없었다. 모든 질문은 합법이란 틀에서 이뤄질 뿐이었다”며 당시 ‘야만’의 현장을 떠올렸다.

▲ 영화 <두개의 문>의 한 장면. ⓒ시네마달
결국 철거민은 법정에서 패했다. 1심 판결(유죄) 이후 황폐해진 마음으로 남일당 앞에 분향소를 차렸지만 이마저도 경찰과 극단적 충돌이 벌어졌다. 홍지유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최소한의 명예마저 지킬 수 없는 판결을 받아들고 감옥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보며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이처럼 공권력은 스스로 자신들의 부당성을 입증하고 있었다.

참사 이후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보도 역시 공정하지 않았다. “조중동은 화염병을 강조하며 참사를 ‘철거민에 의한 화재’로 몰아갔다. 이후 사설에선 용산참사가 촛불로 점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철거민들의 이주 보장 요구는 무리한 것으로 포장됐다. 김남훈 경사의 죽음은 선정적으로 다루려 노력했다. 그 결과 철거민은 테러리스트가 됐다.”(김일란)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 오히려 감독은 차분하게 사실(Fact)과 마주한다. “요즘 인터뷰하며 만나는 기자들이 용산에 대한 부채감을 이야기한다. 경찰, 법조인, 기자 등 다양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각자의 맥락에서 고통스럽게 화면을 접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홍지유) 이처럼 감독은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는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들은 〈두 개의 문〉이 순치된 언론의 기능을 복원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한 발 물러섰다. 김 감독은 “다큐가 기본적으로 대안언론의 성격은 있지만 언론과는 또 다른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언론과 다큐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취재든 어떤 것이든 각자의 역할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충실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이어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은 함께 가고 있는데 그 매개를 언론이 한다”며 〈두 개의 문〉 보기를 호소하는 언론들은 이미 상당부분 매개로서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두 개의 문〉은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용산 사건의 본질이라 했을 때 많은 이들이 현 정부 비판이나 케케묵은 국가공권력, 폭압 정치, 또는 자본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즉각적인 분노를 일으키지만 쉽사리 쓰러뜨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또한 가해자에게 진심어린 반성을 기대하기 어렵다.”(홍지유)  
▲ 영화 <두개의 문>을 연출한 김일란(왼쪽), 홍지유(오른쪽) 감독. ⓒ시네마달
감독은 100분간 공개되는 경찰특공대 육성, 자필 진술서 등 사실의 조각들을 논리정연하게 펼쳤을 때 관객들이 폭력진압의 이면을 정확히 볼 수 있을 거라 봤다. 홍 감독은 “용산의 불타는 망루 뒤에는 차갑게 식혀 생각해야 할 사법제도가 있고, 저항행위가 불법행위라고 가로막혔을 때 초래하는 비극들이 있다. 이 분노가 향해야 할 지점은 ‘반MB’ 너머에 있다는 것을 관객들이 차분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를 사회 구조적으로 극복해 ‘쌍용차사태’ 같은 유사한 비극이 초래되지 말아야 함을 힘있게 호소하고 있다. 두 감독은 영화를 통해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단단한 분노로 이어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지금, 용산을 마주한 우리에게도 선택 가능한 두 개의 문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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