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의 편지] 강남 ‘말춤’을 보는 엉뚱한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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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이돌 그룹의 군무(群舞)에 립싱크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를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니, 잘 들리지 않습니다. 힙팝바지를 입고 검지로 무대와 관객을 수시로 찔러대며 주절주절 노래하는 청년 래퍼의 가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꽤 오래됐습니다.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요정 혹은 인형 같은 분장을 하고, 정신없이 흔들며, 민망스런 몸짓도 해대는 요새 가수들에 대한 불편함과 못마땅함도 생겼습니다. 명색이 PD생활을 20년이나 한 놈이 이 시대 대중문화의 대세를 거역하는 셈이니 자격미달이다 싶어 참 걱정입니다. 제가 본시 완고한 보수라는 생각을 합니다.

▲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YG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요새 한국 최고의 월드스타로 떠오른 싸이. 잘 생기지도, 잘 차려입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외모. 대마초를 피워 연예인으로서 치명타를 입고, 병역부실논란으로 군대를 두 번 다녀온 그의 초대박 성공은 어쩌면 기적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4억 명이 그의 동영상을 보았고, 가을 밤 서울 시청광장에 10만명에 육박하는 시민이 모여 그의 말춤을 추었습니다. 제가 보아도 어처구니없게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몇 번 뮤직비디오를 다시 봅니다. 제 보수적인 귀에도 가사가 들려옵니다. 영상이야 말 할 게 없습니다. 불편함이나 못마땅함이 일지 않습니다. 대중의 열광에는 알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새삼 확인합니다.

그러나 싸이의 성공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한 신문에는 그의 이력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977년 서울 반포동에서 태어나…반도체 장비를 공급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물 좋다는 나이트클럽을 전전했다…질리도록 과외를 받으며…그래도 보스턴대학 국제경영학과에 진학했다…이내 학교를 자퇴했고 학비를 유흥비로 탕진하다…버클리음대에 입학하며…”

아무 걱정 없는 강남키드로 태어나,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었던 싸이. 그의 배경과 이력이 어쩔 수 없이 ‘없는 사람’의 심사를 불편케 합니다. 있는 집 자식은 방황해도 결국 잘 될 수 있다는 뒤틀린 사회적 박탈감이 작동합니다. 보통의 집안에 태어난 자식이라면 나이트 ‘죽돌이’로 살다가 미국동부로 유학을 가고, 거기서 놀다 대학을 때려치우고 다시 유명음대를 가고, 언감생심 그럴 수 없습니다. 음악인으로서 두 번의 치명타를 극복하고 재기할 여력도 없을 겁니다. 그에게는 돈도 네트워크도 없는 탓입니다.

▲ 이근행 전 MBC노조 위원장(해직언론인)
오늘도 우리의 아이들은 그룹과 아이돌을 쫓으며 거리를 달리고 광장을 메웁니다. 그 아이들이 싸이를 따라 말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우리 나이로 서른여섯의 싸이. 축복받은 환경 속에서 방황마저 사치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을 그에게, 무엇보다 ‘제 맘껏 살아 본’ 그에게, 그리고 이제 아이돌이라고 하기엔 늙고 인생을 알만한 나이가 된 그에게, 한 가지 바람이 생깁니다.

당신처럼 살 수 없는 수많은 ‘비강남’의 아이들에게 멘토가 되어라. 삶은 다시 되돌릴 수도, 그리 쉽게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너희들은 삶에 최선을 다하라. 그렇게 말해 주었으면 하고 말입니다. 결국, 저는 어쩔 수 없는 보수, 혹은 이제 ‘꼰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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