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 부실’ ‘불공정 거래’ 방치… 연기자들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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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 부실’ ‘불공정 거래’ 방치… 연기자들만 운다
[분석] 기형적 외주제작, 출연료 미지급 문제 낳아
  • 박수선 기자
  • 승인 2012.11.21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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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한연노)이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음식점에서 중견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배우 이순재(오른쪽)가 발언을 하고 있다. 한연노는 KBS측에 미지급된 출연료 13억 원을 지급하라며 지난 12일 촬영거부 출정식을 갖고 KBS 프로그램에 출연을 거부하고 있다. ⓒ 연합뉴스

또 ‘출연료 미지급’ 문제다. 한국연기자노동조합(이하 한연노)은 지난 12일부터 ‘미지급 출연료 13억원을 달라’며 KBS를 상대로 촬영거부를 벌이고 있다. 지난 2010년 지상파 3사의 미지급 출연료 사태가 수습된 지 2년 만에 재발한 것이다.

KBS의 입장은 강경하다. KBS는 “제작사에 이미 제작비 전액을 지불했기 때문에 미지급 출연료는 KBS와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방송계 안팎에서는 반복되는 미지급 출연료 문제의 근본 원인은 외주정책에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외주제작 의무편성 비율확대에만 초점을 맞춘 외주정책에서 파생된 문제라는 것이다. 1999년 3%에 불과한 의무편성 비율이 10년 사이에 10배가 증가한 것과 달리 프로그램 다양성, 콘텐츠 진흥, 지상파 독과점 해소라는 목표 중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했다.

지난 1991년 도입된 의주제작 정책은 이미 실패했다는 여론이 높다. 방송계 관계자들은 현행 외주제작을 일컬어 ‘기형적’, ‘편법’, ‘1세대 시장’ 등으로 표현한다.

KBS 드라마국 관계자는 “제작사를 포함해 외주정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정책적으로 도입됐다”며 “당초 우려대로 출연료를 받지 못하는 연기자들이 생기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사가 방송사에 완성품을 납품하는 해외 사례와 달리 방송사가 외주제작에 연출진과 스태프를 투입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완전한 외주화로 보기도 어렵다.

▲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한연노)이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음식점에서 중견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배우 이순재(오른쪽)가 발언을 하고 있다. 한연노는 KBS측에 미지급된 출연료 13억 원을 지급하라며 지난 12일 촬영거부 출정식을 갖고 KBS 프로그램에 출연을 거부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부실제작사, 예방은 없고 사후 대책만= 문화체육관광부에 신고한 외주제작사는 1700여개(2011년 12월 기준)에 이른다. 여기에는 폐업한 제작사나 드라마 제작사에 포함되지 않는 사업자도 다수 포함돼 있어 실제 제작사 규모는 이보다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연노가 제기한 문제는 이처럼 외주 산업에 쉽게 진입할 수 있는 데 반해 ‘불량’ 제작사를 사전에 거를 장치는 미흡하다는 점이다.

문제갑 한연노 정책위원회 의장은 “방송사에서는 사후 부실을 사전에 막을 수 없다고 하지만 징후는 분명히 있다”며 “투기 자본을 걸러내는 원칙과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작사와 방송사는 이런 문제제기에 동의하면서도 대책 마련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출연료 미지급 프로그램의 연출을 맡았던 한 PD는 “‘누가 캐스팅 됐다고 하더라’는 소문만 듣고 생소한 작가 작품을 들고 온 신생 제작사에 편성을 주는 경우도 있다”며 “터무니없는 기획안이 편성을 받는 이유는 윗선에서 이런 결정을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판치는 부당 거래” = 이런 부실 제작사를 거르기 위해선 방송사의 편성 기준과 계약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꾸준히 있었다. 문제갑 의장은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을 거쳐 제작사를 선정해야 하는데 실제 계약 과정에서는 불공정 계약이 판을 친다”며 “외주사의 약점을 잡고 터무니없는 덤핑계약을 한다거나, 제작비 일부만 주고 해외 판매나 PPL 수익으로 메우라는 식”이라고 말했다.

현재 방송사는 제작사와 자율적으로 계약을 채결하고 있다. 문화부에서 표준계약서 사용을 권고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이를 채택하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백승혁 한국콘텐츠진흥원 선임연구원은 “방송사 계약서를 보면 건별로 다르지만 제작비 지원과 인프라 측면에서 대체로 방송사에 유리한 측면이 많다”며 “방송사와 제작사간 표준계약서를 고안해 내놓아도 법적 구속력이 없어 현장 채택률이 떨어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방송사의 반발로 공정거래를 위한 개선을 미적거리는 사이 불공정거래의 여파는 이미 여러군데서 드러나고 있다. 출연료 미지급뿐만 아니라 출연료 폭등, 과도한 간접광고(PPL)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청률과 광고가 우선시 되는 시장에서 흥행보증수표로 통하는 스타급 배우와 작가에 대한 선호도 높은 게 현실이다. 스타급 배우와 작가를 놓고 벌이는 제작사들간의 캐스팅 전쟁은 결국 출연료 폭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가운데서도 ‘대박 드라마’를 만들어 수십억원대의 수익을 내는 제작사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제작사들은 이런 출혈 경쟁 때문에 프로그램 제작비를 받아 이전 작품 적자를 메우는 데 급급한 실정이다. 한연노는 이번에 문제가 된 5개의 제작사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다.

방송사도 할 말은 있다. 김영섭 SBS드라마총괄기획 CP는 “출연료와 제작비는 많이 올랐는데 광고나 저작권료 등의 수입은 뻔하다”며 “이 상태에서 표준 계약하자고 하면 다시 자체제작으로 돌아갈 것이고 드라마의 질도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사와의 표준계약서에 대해선 “주인공 출연료와 스태프 인건비 등이 모두 다르고 연출자마다 강조하는 부분에 따라 촬영일 수가 다른데 일괄적으로 계약서를 만드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콘텐츠사업을 제조업과 같은 잣대로 판단하면 콘텐츠 발전에도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 “외주정책 20년, 외주사는 속빈 강정” = 드라마 시장의 과당경쟁과 불공정거래로 인한 재정압박이 부실 제작사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동안 외주제작사는 말 그대로 ‘속빈 강정’ 신세가 됐다. 그동안 제작 노하우와 인력이 내부에 쌓이지 못해 자생력이 취약한 탓이다.

백승혁 선임연구원은 “기존 방송사에 있었던 인력이 회사를 나와 과거의 인맥과 노하우로 제작사를 영위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드라마 시장을 1세대라고 볼 수 있다”며 “방송사에 의존하다보니 정작 제작사들이 자체 인력과 제작 능력을 키우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또 제작사 내부 자정과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 제도 개선 움직임도 전개되고 있다. 노동렬 성신여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는 “현재의 드라마 시장은 도덕적 해이가 우려되는 이들이 얼마든지 시장에 진입해 ‘먹튀’를 할수 있는 구조”라며 “그런 의도를 가지고 시장에 들어오는 사람을 100%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제작사 등록제 도입과 드라마제작사협회 회원사로 외주제작 요건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박창식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7월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간 불공정거래를 개선하기 위한 방송법개정을 발의했다. 방송분쟁 조정 대상에 외주제작사를 추가하고 외주제작과 관련된 방송사업자와 외주제작사들의 금지행위를 도입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유관기관과 함께 표준출연계약서 제정안와 방송사와 제작사간의 표준계약서를 다시 손질하고 있다. 문화부 관계자는 “드라마 외주 제작 현장에서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열악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며 “모두가 아는 문제를 이대로 방치하기 보다는 당장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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