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0회로 종영한 KBS <태조 왕건>김종선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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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역동성 충실히 담아내려 했다”

|contsmark0|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이 2000년 4월1일 첫 방송을 시작, 지난 2월24일 20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잠자리에서도 ‘왕건’ 꿈만 꿀만큼 <태조 왕건>에만 매달려온 김종선 pd는 “다음 작품도 사극을 하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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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태조 왕건>과 ‘숫자’
|contsmark3|제작 햇수만 4년, 총 200회 방송되면서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개근’했으며, <태조 왕건>이 방송되는 동안 제작진은 3번의 겨울을 맞았다. ‘고려사 복원’을 위해 새로 세운 문경·안동·제천 세트는 총 4만여평, 참여인원만 대략 40만명. 또 약 100억원 정도의 제작비가 들었으며, 제작 스태프가 추운 겨울날 ‘며칠 밤’ 새는 건 기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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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궁예, 왕건, 견훤…충돌과 조화
|contsmark7|<태조 왕건> 초기, 시청자들은 개성 강한 궁예에 몰입돼 있었다. 자연스레 방송가에서는 <태조 왕건>의 인물 설정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극중 왕건은 어디 가고, 궁예가 저리 튈까”라고.
|contsmark8|그러나 김 pd는 ‘고려사’의 인물군상에 주목했다. “조선시대가 선악기준이 뚜렷한 왕이 대부분이었다면, 고려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또 조선시대가 정형화된 인물구도에 묶여 있었다면, 고려 통일 무렵 혼란했던 시기에 개인의 개성이 더욱 부각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양면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에 주목했다. 강력한 리더십에는 궁예가 제격이었고, 그래서 궁예가 상당히 부각된 면이 있었다.”
|contsmark9|김 pd의 말에 따르면 <태조 왕건>의 인물들은 흔히 말하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갈리기보다는 각기 개성에 따라 충돌과 조화를 이뤄내는 구도에 있었다.
|contsmark10|그러면서도 김 pd는 왕건의 통일과정을 좀더 밀도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한 점을 가장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만약 드라마 분량을 좀더 늘렸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김 pd는 정해진 분량에서 왕건을 만족할 만큼 그려나가지 못했다는 점에 더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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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2|쓴 약이 됐던 외부의 목소리
|contsmark13|김 pd는 역사적 진실과 사극과의 간격에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사극 역시 사실에 바탕을 둔다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개연성을 쫓아가다 보면 극 전개상 연출자 나름대로의 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contsmark14|“특히나 왕건을 둘러싼 고려사의 기록은 턱없이 부족했다. 간혹 고증을 위한 고증을 요구하는 비판이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지적들이 오랜 시간 극을 전개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contsmark15|또 하나. 한때 엽기 논란에 휩싸였던 장면이 있었다. 조물성 전투에서 금강이 화살에 박힌 자신의 눈을 먹는 장면이 바로 그것. 일각에서는 ‘아무리 실감나는 장면을 위한 것이라 해도 유혈이 낭자한 눈알을 삼키는 장면은 도에 지나쳤다’는 지적이 있었다.
|contsmark16|그러나 김 pd는 “금강이란 인물을 제대로 부각시킬 수 있는 장치로 필요했다”며 “시청자들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해 과도한 연출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오해를 산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contsmark17|조남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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