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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를 통해 제시한 21세기 시민윤리

|contsmark0|가라타니 고진(1941∼)은 일본의 문학평론가이다. 김윤식(명지대 명예교수)씨의 표절 논란으로 새삼 관심을 끌었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비롯한 그의 책 여러 권이 한국에도 번역 소개되었다.
|contsmark1|90년대 이후 그의 관심은 문학이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 일본 국내의 사회문제와 국제관계, 철학과 윤리, 건축 등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 지난 2000년 출간된 ‘윤리 21’(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2001)은 그의 이런 최근 면모를 보여주는 아담한 책이다.
|contsmark2|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는 일본 사회에서는 금기로 치부되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공공연히 추궁하고, 한국 문인 및 지식인들과의 교류 및 대화에도 적극적이다.
|contsmark3|이 책의 모태가 된 것은 그가 1995년 일본 마쓰에에서 열린 ‘한·일 작가회의’에서 한 ‘책임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이었다(그 회의에는 나 역시 취재 차 동참해 있었는데, 가라타니는 당시 어느 일본 각료의 ‘망언’이 한·일 관계의 쟁점이 되자 원래의 강연 원고를 무시하고 ‘천황’의 전쟁책임을 강도 높게 추궁한 이 강연을 했던 것이다).
|contsmark4|그는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의 책임을 묻는 일은 한국 등 이웃 나라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의 필요에서만이 아니라 일본인들 개개인의 윤리의식 확립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contsmark5|한국 독자들에게는 ‘천황’과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지적이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겠지만, 그것은 이 책에서 가라타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는 철학자 칸트에 의지하여 ‘21세기 세계시민의 윤리’를 모색하고자 한다.
|contsmark6|이를 위해 그는 우선 통념을 뒤집는 작업부터 시작하는데,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개념이 대표적이다. 통상의 용법에서 ‘공적’이라는 것은 국가, 사회, 민족, 종교 따위의 집단(의 이해)에 관한 것으로, ‘사적’이라는 것은 그런 집단적 고려에서 벗어난,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가라타니는 그 말들의 쓰임을 정반대로 바꿔치기한다.
|contsmark7|그에 따르면 국가니 민족이니 종교니 사회니 하는 집단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사적’인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제한된 일부만을 대리하는 것이며, 그렇다는 것은 인류의 나머지에 대해서는 적대적이거나 소홀해질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contsmark8|그런 부분 집단의 이해와 관심을 벗어난(disinterested), 순수하게 개인적인 판단과 실천이야말로 칸트와 가라타니가 말하는 ‘공적’이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통상적인 의미의 ‘개인적 이익의 추구’가 ‘공적’인 행위가 될 수는 없다.
|contsmark9|칸트-가라타니는 ‘공적인 개인’에게 두 개의 중요한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부분집단은 물론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모든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내면의 명령, 그리고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요구가 그것이다.
|contsmark10|가라타니는 특히 그 ‘타자’에 21세기 지구라는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류까지도 포함시킴으로써 환경윤리학을 향해 자신의 사유를 열어놓는다.
|contsmark11|가라타니의 칸트 재해석은 칸트를 일종의 선행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리매기는 데에까지 이른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생산의 국유화나 프롤레타리아 일당독재 같은 것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contsmark12|오히려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개체적 소유의 재건)이야말로 진정하고도 가능한 마르크스주의(=코뮤니즘)라는 것이다.가라타니가 구상하는 21세기 세계시민의 윤리는 매력적인 만큼 다소 이상론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contsmark13|그러나 9·11 테러와 그에 대한 미국의 보복전쟁에서 보듯, 진정한 의미의 ‘개인’과 ‘공적’인 가치의 회복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논점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contsmark14|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contsmark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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