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책읽기 계훈제, 미완의 자서전 ‘흰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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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힘 없지만 나는 조국의 환함을 택했다”

|contsmark0|민주화와 통일과 인권 보장을 위해 한평생을 살다간 계훈제 선생. 선생이 작고한 지도 벌써 만 3년을 넘어섰다.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고 오직 민족과 민중을 위한 저항의 삶에만 온몸을 던진 실천인이었기에 선생의 작고 후에 유가족과 지인들이 온전한 평전이나 자서전을 묶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생전에 선생이 발표한 글과 육필로 남긴 원고, 메모 및 일기 가운데서 가려 뽑아 가까스로 펴낸 것이 이 책 ‘흰 고무신’이다.
|contsmark1|선생이 투병하고 있던 1997년 6월 11일에 남긴 육필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의 아비 어미와 두 달 전 교내 문제로 분신한 어머니, 6·10 항쟁 행사를 지내고 인사 왔다.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낀다.(…)그러나 그대들의 희생으로 오늘의 현실은 파멸에 빠지지 않고 간신히 진보해 나가지 않는가. 세 분이 5만원과 청량제 한 상자. 얼굴을 못 들었다. 속히 건강을 회복하여 이웃에 봉사해야지.”선생은 시대의 한을 자신의 한으로 삼고 그 한을 푸는 데 인생의 외길을 건 사람이면서 끝없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contsmark2|이를테면 일본 식민지시대에 선생은 강제 노동에 동원이 되었다. 암반에 착암기로 구멍을 뚫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놓은 석회석을 작은 트럭에 실어 분쇄공장으로 나르는 일이 선생에게 배당된 노역이었다. 당시 선생은 악에 대해 적극적으로 적대하지 못하고 공포와 이해에 함몰되어 비겁함과 무기력에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이 몹시나 부끄러웠다고 술회했다.
|contsmark3|“정신적 질곡을 청산하지 못한 채 자기 기만과 자조 속에 하염없이 날을 넘기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방치하자 비로소 마음에 윤기가 돌아옴을 느꼈다. 그 윤기는 달짝지근했으나 나의 정신적 무덤 위에 돋아난 자기 소멸의 독물(毒物)임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남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악을 적대하지 못하는 고심이 절절하고, 자기 반성이 참혹하다.
|contsmark4|1944년 여름. 일제의 학도 지원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노동판에 끌려간 아들을 보내 놓고 화를 못 이겨 누워있던 선생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감시원이 따라붙은 가운데 계훈제 선생은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어머니의 붉은 무덤을 찾아갔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의 말씀이 못처럼 박혀왔다. “묻은 자는 묻은 대로 놓아 둬라. 살려는 너는 나서거라. 나서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싸우고 이기고 찾아라.”
|contsmark5|아마도 선생이 굴욕과 모욕의 시대를 여윈 몸으로 천형처럼 떠받고 살았던 것도 이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이 뿌리처럼 근저에 있었을지 모른다.
|contsmark6|계훈제 선생은 개인적으로는 고난과 불행이 점철된 삶이었지만, 소신 하나로 독재의 폭압에 저항해 살아갔다. “소신을 갖고 행위하는 자에게는 총칼은 단지 번득이는 섬광과 차가운 금속성을 발산할 뿐, 역풍과 억압은 도리어 굴곡 있는 희곡(戱曲)의 일절(一節)과 감미로운 감격의 자국을 남길 뿐 아무런 위력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호풍처럼 맵게 자신을 다스리려했던 선생의 고혼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contsmark7|그리고 이런 철학은 함석헌 선생의 저항철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함석헌 선생의 저항철학은 삶과 생명의 본질을 ‘자생’으로 보되, 생명 있는 두두물물이 자율을 누리려면 이를 막는 세력이 있어서 이 세력에 맞서는 저항의 자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contsmark8|계훈제 선생의 미완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또 하나의 문장들은 ‘공존의 생리’를 강조하는 맥락에도 있다. “공존의 조건은 지극히 단순하다.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권익을 서로 인정해 주고 인정받는 데 있다.(…)부패한 세상 말세에 허공에 던져진 겨자씨 두 알보다 더 만나기 어려움에서 만난 인연이건만 서로 애정과 이해를 펴서 공생하지 못하고 반목 갈등 폭력을 일삼고 있다면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존 아니면 공망(共亡)이 있을 뿐이다.”
|contsmark9|댓돌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한 켤레처럼 육신을 내려놓고 선생은 떠나갔지만,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꿈틀거리는 큰 정신’을 만날 수 있다.
|contsmark10|문태준 불교방송 제작부|contsmark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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