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당 제작비 5억원 시대…외부 자본 절반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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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당 제작비 5억원 시대…외부 자본 절반 넘어서
명품 다큐멘터리 협찬, 달콤한 독배
  • 박수선 기자
  • 승인 2013.08.2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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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예산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협찬’

지금까지 숱하게 지적 받아온 드라마 이야기가 아니다. 부족한 제작비 때문에 정부와 민간의 자본 없이는 제작이 어렵게 된 건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다.

최근 지상파 방송사에서 방송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대형 다큐멘터리 가운데 방송사가 제작비 전액을 부담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방송사에서 일정 정도의 제작비를 주고 나머지는 정부 지원이나 지방자치단체, 민간의 협찬을 받는 식이다. 심지어 전체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정부에 의존하는 작품도 적지 않아 다큐멘터리 협찬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오는 10월 방송 예정인 KBS <의궤, 8일간의 축제>(이하 <의궤>)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수원시, LG전자로부터 모두 9억원의 지원을 받았다. 전체 제작비 15억원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SBS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권력>은 제작비 가운데 절반을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이하 전파진흥원)과 경희대에서 지원했다. <최후의 권력>은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 손수조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 등 정치인 7명이 극한의 환경 속에서 최고의 리더십을 뽑는 내용을 담은 1부를 포함해 총 5부작으로 제작된다.

연내 방송을 목표로 준비 중인 MBC <공룡의 땅 2>는 국내에서 최초로 뿔공룡 화석이 발견된 화성시에서 <공룡의 땅 1>을 연출했던 이동희 PD에게 먼저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해서 탄생한 작품이다. 2014년 방송 예정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UHD 방송으로 제작되는 KBS <색>과 <요리인류>도 LG전자의 제작지원을 받는다.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외부 의존도가 높아진 건 다큐멘터리의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KBS <차마고도>와 EBS <한반도의 공룡>, MBC ‘눈물시리즈’ 등의 대작들이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거머쥐면서 다큐멘터리에 투입되는 제작비도 가파르게 증가했다. 2007년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차마고도>는 편당 2억원에 제작됐지만, 요즘엔 편당 제작비가 5억원에 이르는 작품도 나오고 있다.

<의궤>를 연출한 최필곤 PD는 “제작비의 규모에 따라 작품의 질에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데, 드라마와 영화에 많은 예산이 투입됐던 시기를 거쳐서 이제는 다큐멘터리까지 확장되는 시기”라며 “방송사에서는 단일 작품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담당 PD들이 자금을 끌어오고 있다”이라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의 국제 경쟁력에 관심을 돌린 정부의 지원 정책도 영향을 미쳤다. 다큐멘터리가 해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방송 프로그램지원 사업도 선정단계에서부터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방송발전기금으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지원하고 있는 미래창조과학부는 민간의 투자 유치와 해외 시장 진출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명품 다큐, 현실은 협찬 ‘앵벌이’”

그러나 다큐멘터리 성공의 이면에 협찬의 그늘도 짙어지고 있다. 부족한 제작비를 채우는 건 결국 PD들의 몫이다. PD들이 정부 지원과 외부 협찬을 따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발생하는 기회비용은 적지 않다. 대형 다큐를 연출한 경험이 있는 PD들 사이에선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욕심이라고 하지만 협찬을 구하러 다니는 시간에 작품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라는 푸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최근엔 KBS가 제작부서 성과 평가에 광고와 협찬, 콘텐츠 수입 실적을 반영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내부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는 일도 있었다. KBS PD협회는 지난달 24일 낸 성명에서 “제작비에서 모자라는 것은 협찬으로 해결하라며, 제작자들을 앵벌이시키는 것도 모자라, 권한은 없고 책임만 어깨에 얹어 놓는 이런 행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냐”라고 반문했다.  KBS 한 PD는 “PD가 어렵게 협찬을 따 왔는데, 협찬 금액 전액을 방송 제작비로 쓰는 건 어렵다며 회사 수익으로 돌리려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며 “이런 환경에선 제작자의 동기 부여도 어렵다”라고 전했다.

협찬은 프로그램을 해치는 독이 되기도 한다. 협찬을 받는 순간부터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에서 협찬 조건으로 프로그램에 간섭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이 때문에 ‘조건 있는 협찬’을 경계하는 분위기는 방송사 내부에서도 형성되어 있다. 박기홍 SBS 시사다큐팀장은 “경희대에서 <최후의 권력>에 2억원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지난해 <최후의 제국>과 같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달라고만 부탁했는데, 이런 경우는 드물다”며 “만약에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했다면 지원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정 형편이 빠듯한 지역방송사에서는 지자체와 민간기업 등과 공동기획하는 형태가 많아 부당한 요구를 해오더라도 자본의 유혹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한 지역민영방송사 PD는 “지역에서는 지자체가 사업이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편성된 예산을 떠오기 위해 해마다 사활을 건 경쟁을 치른다”며 “경영진들은 소위 ‘눈먼 돈’을 많이 끌어오는 걸 실적으로 평가하지만 이렇게 제작되는 프로그램은 협찬처의 입맛에 맞게 나올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시청자들이 받게 된다”고 말했다.

“수신료에다 민간 후원까지…메이저 방송사 편중”

그동안 다큐멘터리 제작지원에서 ‘선택과 집중’을 강조해 온 탓에 정부 지원과 협찬이 지상파 방송사와 특정 장르에 쏠리고 있다는 문제 의식도 방송계 전반에 퍼지고 있다. 올해부터 방송프로그램 제작 지원 사업을 미래창조과학부가 담당하면서 프로그램 지원정책에 정부의 입김이 더욱 강하게 반영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나온다.

한 군소방송사 PD는 “시청자들에게 수신료를 받는 KBS가 또 외부의 지원이나 협찬을 받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작은 방송사에서 못하는 큰 규모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전달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부 자본 없이 공적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문명과 수학>에 이어 올해 EBS <빛의 물리학>을 연출하는 김형준 PD는 기업 협찬을 받으려고 시도했다가 과학다큐에 대한 무관심만 느꼈다. 김 PD는 “다큐멘터리 규모는 커졌는데 편수는 이전보다 줄고 소재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후퇴하고 있는 것 같다”며 “정부와 방송사가 작년에 뽑았던 작품들을 통해 소재와 방향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특정 방송사, 장르 편중에 대한 의견을 수렴해 지원 금액 등을 일부 조정하고 있다. 전파진흥원은 올해부터 지역민방과 중소방송사의 다양한 장르와 소재 발굴을 위해 지역성과 다양성 강화 프로그램 분야를 새롭게 편성하고, 프로젝트당 최대 지원 총액을 10억원에서 5억원으로 줄였다. 전파진흥원 관계자는 “대형 방송사에 지원 예산이 쏠리는 현상을 막고, 방송사의 매칭 예산을 늘리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협찬이 불가피하다는 데 공감을 하더라도 PD들의 협찬 부담 해소에 대한 필요성은 제기된다. 이동희 MBC PD는 “요즘엔 기획의 완성은 펀딩까지”라며 “후원을 받은 작품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디렉터와 프로듀서의 역할을 분리해 연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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