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따져보기] ‘굿닥터’ 의사는 영웅, 환자는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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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소망>이라는 일요 아침 드라마가 있었다. KBS에서 1980년부터 신구 주연으로 방영했다는데, 내 기억 속 하얀 가운 입은 이는 배우 서인석이었다. 극의 후반부 주역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의사 선생님’ 서인석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매회 바뀌는 ‘환자’였다.

한 번은 이제는 원로급 배우인 오현경이 등장한 적도 있었다. 부인 몰래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인데, 장기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후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집안은 잔치 분위기인데 본인 혼자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다.

의사 역의 서인석은 “정관수술이 저절로 풀리는 예외적 경우”임을 설명해 주었고, 오현경은 자신의 ‘활발한’ 정자를 현미경으로 확인하고 환희에 찬 표정을 짓던 에피소드였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어야 했던 미모의 여인이, 담당의 서인석과 사랑을 싹틔우던 에피소드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많은 이들이 ‘메디컬 드라마’라고 하면 MBC<종합병원>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소망>이 있었다. 여기서 병원은 그저 ‘정거장’, 의사는 환자를 맞이하고 배웅하는 ‘호스트’ 같은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마치 관공서 같았던 공간인데, 기억 속에 굉장히 따뜻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어떤 환자가 오느냐, 어떤 질병 어떤 사연이냐에 따라, 일요일 아침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의사는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다 동원해 정성껏 치료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설명했다. 선택은 환자의 몫이었다. 의사는 열정적이었지만 담담했고, 환자는 신중했지만 비굴하지는 않았다. 치료의 방식을 함께 고민할 뿐이었다.

 

▲ KBS <굿닥터> ⓒKBS


KBS 월화극 <굿닥터>는 의사를 작정하고 영웅으로 설정했다. 아픈 영웅이다. 100만 명 중에 한 명 나올까말까 싶은 특이한 영웅이다. 일명 ‘서번트 증후군’이 있는 박시온(주원 분)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장애에 천재까지 이중·삼중고를 설정한 이유가 ‘시청률’ 말고는 없는 듯하다. 자폐증을 장애로 봐야 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논의 따위는 발 디딜 틈 없다.

박시온은 최대한 희한하고 특이한 표정과 동작과 말투로 자신이 ‘장애인’이면서 동시에 ‘천재’임을 한꺼번에 드러낸다. 때때로 몸이 뜻대로 반응하지 않아 의사로서는 최악의 열악한 조건에, 임용마저 불투명한 비정규직 청년의 비애까지 짊어진, 누구와도 닮지 않은 ‘특별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초인이 따로 없다. 게다가 (유아어에 갇힌) 그 천진무구한 인간미란!

가도 너무 갔다. 내가 환자가 됐을 경우, 정말 그런 의사를 택할 것 같은가? 일말의 신뢰도 갖기 어렵다. 그가 일상의 많은 시간을 손발을 떨며, 주변의 말조차 들리지 않는 ‘해리’ 증상을 겪는 줄 알게 된다면, 절대로 내 아이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의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환자가 되어 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설사 어떤 순간에는 번득이는 천재성과 놀라운 ‘신의 손’을 발휘할지라도, 환자 입장에서 그런 예측불허의 확률 게임을 의사와 벌일 수는 없다. 환자에게 있어 의사의 신뢰도는 ‘어쩌다 천재성’이 아닌 안정성 99%여야 한다. 생명을 다루는 직종을 ‘도박사’들처럼 다루는 이 판타지적 발상은, 그리고 이 드라마의 인기는, 역설적으로 의사를 불신하면서도 ‘굿닥터’를 갈망하는 우리의 현실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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