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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PD, 신화를 깨고 진실을 두드리다

[홍경수 교수의 PD학개론 ③] 최승호 ‘뉴스타파’ PD 홍경수 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l승인2013.09.30 12: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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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하나만 남는다면? 어느 언론인은 그것이 MBC <PD수첩>이라고 과장되게 말했다. 이 말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PD수첩>이 한국의 PD저널리즘의 씨앗을 뿌렸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시대를 흔들만한 특종을 통해 한국 사회를 고발해온 대담성과 용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때 <PD수첩> MC 겸 책임PD로 ‘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 ‘검찰과 스폰서’,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 등 하나같이 골리앗과 같은 거대권력 아니, 이 시대의 신화 혹은 금기에 돌팔매를 해온 최승호 PD. MBC에서 26년여 시사교양 PD로 근무한 그는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었고, 현재는 인터넷 독립언론 <뉴스타파>에서 MC겸 PD로 일하고 있다. 지상파에서 시작해서 인터넷 미디어라는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PD와의 대화: 확장하는 PD들’이라는 범주에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최승호 PD는 1961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직업군인인 부친이 대구에 근무하게 되면서 초등학교부터 대구에서 자라, 경북대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MBC에 입사했다. MBC에서는 교양프로그램을 연출했으며, 1995년 <PD수첩> 제작팀에 합류했다. 2003년부터 MBC 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하고, 2005년 <PD수첩>의 MC이자 CP로 복귀했고, 시대의 문제작들을 연출했다.

그는 어쩌면 MB정부가 가장 두려워했던 언론인 중 한명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MB정부의 역점 사업이었던 4대강 사업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며, 그 이유 말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해직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논현동 사저로 들어가는 기자회견장에 참석하여 MB와 악수를 한 뒤 "4대강 수심 6미터 대통령이 지시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단박에 던져 대통령과 경호원들을 놀라게 한 장면을 <뉴스타파>에서 방송했다. 나이 쉰이 넘어서도 대담함이 녹슬지 않은 최승호 PD가 점점 궁금해졌다.

지난 9월 13일 금요일 오후 4시에 방문한 <뉴스타파> 사무실에는 KBS를 그만두고 <뉴스타파>로 간 김용진 대표(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최경영 기자 등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고, 최승호 PD는 편집실에서 편집본 리뷰를 하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2012년 YTN과 MBC 해직 언론인이 주축이 되어 만든 <뉴스타파>는 3만여 명의 회원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다.

최근 보도된 조세도피처 특종은 미국 탐사저널리스트회의(ICIJ)와의 파트너십에 의해 거둔 국제적 협업의 결과물이다. <뉴스타파> 시즌 3를 제작하고 있는 2013년 9월 현재 화, 금 주 2회 업로드 하는 체제로 바뀌었고, 방문한 그날이 바로 금요일 마감이었다. 한쪽에서는 외국에서 <뉴스타파>를 취재 온 손님을 맞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방송마감을 하는 등 사무실은 분주했다. 방송 마감이 끝난 뒤에 인터뷰를 하려고 한 최승호 PD는 마감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며 인터뷰에 바로 응했다. 우선 비교적 최근에 <PD수첩> 이름으로 나온 두 권의 책 <PD수첩:진실의 목격자들>,  <응답하라 PD수첩>을 화두로 꺼냈다.

책으로 기록된 아픈 기억 ‘PD수첩’의 수난

  ▲ 최승호 ‘뉴스타파’ PD ⓒ강의정  
▲ 최승호 ‘뉴스타파’ PD ⓒ강의정

: 책을 많이 내셨던데…….

: 제가 낸 건 아니고 <PD수첩> 팀에서 내자고 하면 써주고 뭐 그런 식이었죠.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기고 난 뒤에 이제 오랫동안 초창기부터 논란이 좀 많았잖아요? PD저널리즘이라는 말도 생기고 또 PD들이 사회현상을 취재하니까 사람들이 궁금해 했어요. 처음 보는 현상이니까 굉장히 궁금해 했어요. 그래서 바깥세상에다가 PD들도 이런 일을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PD수첩: 진실의 목격자들>은 <PD수첩> 20주년 기념으로 낸 겁니다. 그 때는 방송 20년이니까 한 번 정리해볼 만큼 <PD수첩> 역사가 어느 정도 단계에 도달한 거 아닌가 해서 그때 팀장이었던 김태현 팀장 등이 만든 책입니다. 이걸 펴낸 때가 한참 검사와 스폰서를 취재하던 때였는데, 그 때만해도 좋은 시절이었죠. PD저널리즘 혹은 <PD수첩>이 절정의 순간에 있었던 상황이랄까.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난 뒤에도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이 굉장히 정부로부터 탄압이라고 할까 그런 거 받고 또 이때도 이미 김재철 사장이 MBC에 들어와서 상당히 많은 면에서 MBC를 바꿔 놓기 위한 노력하고 있었지만 <PD수첩>을 어쩌진 못하는 상황이었죠. 그 와중에 ‘검사와 스폰서’ 등을 방송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PD수첩>이 저널리즘으로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시사프로그램이다 이런 평가를 들을 때였죠.

<응답하라 PD수첩>은 완전히 다 망가지고 난 뒤에 파업이 끝나고 대부분의 PD들이 다 쫓겨나고 <PD수첩>을 망가뜨리려는 간부들과 이른바 시용PD들(2012년 파업 이후 대체 인력으로 고용한 PD)이 장악한 상황에서 도저히 방송으로 아무 것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건 이제 그야말로 책으로라도 기록을 해야 된다. 이런 차원에서 한 것이죠.

: 이 두 권을 연달아 읽어보니 초창기 프로그램에 공헌을 했던 PD들 중 일부는 다른 책에서는 후배들의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그런 걸로 나오던데요.

최: 네, 대표적인 분이 윤길용, 시사교양국장을 하셨던 분인데 지금은 이제 울산 MBC 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윤 전 국장은 <PD수첩> 초창기에 ‘소쩍새마을의 진실’ 등 사이비 종교 고발 프로그램들을 많이 했습니다. 윤 전 국장은 취재를 아주 집요하게 해서 까발리는 그런 폭로저널리즘의 강자였죠. 그래서 <PD수첩>이 처음 시작했던 분야였기 때문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아마 <PD수첩>을 그만두고 다른 프로그램들을 했습니다. 소송을 많이 당하면서 아마 개인이 힘들었나 봐요. <PD수첩>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고 난 뒤 시간이 오래 지났죠.

그 이후 <PD수첩>에 후배들이 합류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사회 본류의 핵심적인 문제를 취재하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정치적인 것도 이야기하고 정부의 중요한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프로그램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이분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거죠. 예를 들어서 ‘광우병’ 편이 그 당시 가장 편향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했어요. <PD수첩>이 굉장히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며 자기가 할 때는 안 그랬는데 후배들이 굉장히 편향적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PD수첩>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겠다. 뭐 이런 식의 생각을 갖고 그걸 아마 김재철 전 사장한테도 어필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사교양국장 자리에 온 것 같아요.

윤 전 국장은 그 자리에서 실제로 자신의 생각대로 했죠.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저를 비롯해서 PD들을 다 쫓아낸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분이 오자마자 했던 얘기가 <PD수첩> 시청률이 왜 이렇게 낮나? 그런 얘길 했어요. 물론 윤 전 국장이 <PD수첩> 제작 할 때보다는 시청률이 낮았어요. 왜냐면 초창기 <PD수첩>은 사이비종교 문제 등을 다루면서 자극적인 영상을 많이 썼고,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시청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그 이후 아무래도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의 무게감도 생기고 또 중요한 문제를 다루다보니 개인 프라이버시 같은 법적인 문제를 완벽하게 보장하면서 비판할 부분은 제대로 비판하는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영상의 자극성은 좀 많이 떨어졌죠. 아무래도 시청률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도 제 기억으로는 윤길용 전 국장이 오기 전에 시청률이 기본적으로 8%는 된 것 같아요. 낮은 수치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오자마자 시청률이 “왜 이렇게 낮나?” 라면서 그걸 명분으로 “<PD수첩>에서 일한 지 1년 이상 된 PD은 다 나가라”며 잘랐습니다. 1년 이상부터 잘렸으니 저부터 경험이 많은 PD들이 다 나가게 됐죠. 그런데 이 사람이 국장이 된 뒤에 <PD수첩> 시청률이 정말 많이 떨어졌죠. 2010년 평균이 약 8% 될 텐데 2011년 평균이 6% 그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떨어진 거죠. 그런 모순된 일을 했죠.

처음에는 윤 전 국장이 그 정도로 하리라곤 생각을 못했는데 진짜 끝까지……. 물론 상승작용이라는 것이 있어요. <PD수첩>이 있는 시사교양국만 해도 풍토가 굉장히 리버럴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PD 국총회 하자 해서 난상토론해요. 난상토론하는 과정에서 국장한테도 대놓고 비판도 하고 그런 분위기란 말이죠. 그래서 아마 급전직하로 정말 이제는 도저히 얼굴보기 힘든 사이가 된 것 같아요. 본인은 어쨌건 그 보답으로 잘 됐습니다. 지금 뭐 지역사 사장이기도 하니까 본인은 아마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오늘 해고 무효 소송에 회사 측 증인으로 법원에 출소를 하는데, 이게 참 힘든 거거든요. 후배가 해고 됐는데 그 재판에 해고가 정당했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오는 거니까……. (웃음) 자기가 국장으로서 한 행위에 대해서 물론 본인이 한 거니까 정당하다고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겠으나, 보통은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죠. 재판에 나가서 증언까지 하진 않는데 말이죠.

  ▲ <PD수첩> 제작진이 발간한 두 권의 책. ⓒ강의정  
▲〈PD수첩〉 제작진이 발간한 두 권의 책. ⓒ강의정

필자는 2012년 '공영방송사 제작체계 변화가 PD 전문직주의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KBS의 21명의 PD들을 심층 면접했다. 소위 MB정부 하에서 공영방송사 PD들의 전문직주의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가 연구주제였던 셈이다. 다양한 PD들의 인터뷰 결과, PD들의 자율성이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사실과 PD들의 전문직주의가 의외로 허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율성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은 정치화, 시장화, 디지털화, 통제화로 인해 PD들이 프로그램에 미치는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와중에 시사 다큐멘터리 PD들이 치열한 다툼을 통해 일정의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PD들의 전문직주의는 허약하다고 볼 수 있는데, PD들 사이의 전문직주의에 대한 이해가 장르별로 통합되지 않았고 내면화되지 않았으며 전수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PD 조직 내부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현상들, 즉 젊었을 때는 언론자유와 정의 등 자율성 투쟁에 앞장섰던 PD들이 간부가 된 뒤에 전향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한 설명도 전문직주의로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변절한 간부에 대한 설명은 간부가 된 PD가 변절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일부 간부가 정치세력이 어떻게 변하든지 관계없이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가 공공서비스 지향적이기보다는 내부권력 지향적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콤플렉스론이다. 마음에 맺힌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직 등 내부 권력이 아쉬운 사람에게는 그것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권력에 매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맺히지 않게 풀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최근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문화적인 일탈적 행위들의 빈발도 콤플렉스론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따라서 사회구성원들이 맺힌 곳이 없이 잘 풀어주지 않으면, 그 결과는 우리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극심한 빈부차이는 납치산업을 성장시키고 그 비용은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

간부의 변절을 전문직주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불행한 정치사회적 환경으로 PD들의 자율성은 항상 위협받았으며, 자율성 확보라는 과제는 항상 우선하는 급선무였다. 따라서 전문직 규범이나 공공서비스 지향성 등 전문직주의의 다른 부면들에 대한 고찰은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PD 집단이 정치 체제와의 차별화를 통해 스스로를 구분하고 정체성을 찾게 된 결과로 이어진다. PD 집단이 전문직 규범이나 공공서비스 지향성 강화방안보다는 자율성투쟁에만 지나치게 매몰될 경우 전문직주의가 내부빈곤에 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한국언론의 사표’로 칭송되는 청암 송건호 선생의 초상 앞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최승호 PD. ⓒ강의정  
▲ ‘한국언론의 사표’로 칭송되는 청암 송건호 선생의 초상 앞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최승호 PD. ⓒ강의정
세상을 알고 싶은 욕구, PD의 길로 인도

: 어린 시절 이야기 해주세요.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크셨는지…….

저는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직업 군인 하사관이셨는데 거기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성장을 했어요. 아버지가 월남 참전하시고 돌아오면서 배치 받으신 데가 대구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대구에서 성장해서 대학교 졸업까지 거기서 나왔습니다. 대구가 고향인 셈이죠. 정신적으로 어쨌건 내가 그렇게 대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건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대구라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어릴 때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별한 기억은 없어요. 뭐랄까 즐겁게 생활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기억이 대체로 좀 우울해요. 세상이 즐겁고 행복하고 매일이 기대되고 이런 삶을 살진 못한 것 같아요. 그런 분위기가 생각나요. 여름방학 때 무료함과 찌는 듯한 더위와 같이 놀 애들도 없고…. 그렇게 친구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많았던 것도 아니지만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경북대 법대 행정학과에 들어갔어요.

: 법대란 단과대 안에 행정학과?

최: 그렇죠. 행정학과는 사실 원래 법정계열로 다 같이 뽑아서 2학년 올라갈 때 성적에 따라서 배분하는데 성적이 별로 안 좋았기 때문에 행정학과로 가게 된거죠. 법대는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들어갔어요. 특별히 고시 볼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어요. 고시공부는 딱 한 달 해봤습니다. 방학 때 한 달 해봤는데 한 달 하자마자 그만 뒀고 대학 때는 연극을 하면서 살았죠. 거의 뭐 연극하면서…. 법대는 제가 수업도 제대로 안 들을 정도로 3학년까지는 거의 안 갔던 것 같아요. 그때는 또 그런 게 허용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때만 해도 1학년 되자마자 휴교령 떨어지고 나서 학교 간 날보다 안 간 날이 더 많을 때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선배들하고 연극반 선배들하고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술 먹고 이러면서 정말 그때부터 세상을 많이 배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 그 때 출연도 하셨단 말씀이죠? 배우로

: 그때는 제가 경북대 연극반에서 가장 촉망받는 배우였죠. (웃음) 실제로 제가 주인공을 많이 했습니다. 3학년이 되어서는 연출도 했어요. 그러다가 입대를 했어요. 도저히 이렇게 살아서는 밥 먹고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남자들은 군대라는 피난처가 있으니까요. 군대는 카투사를 갔어요. 그 때 막 시험 치는 게 생겨서 카투사를 갔는데, 군대 후배 하나가 공부를 하길래 ‘야 무슨 공부 하냐?’ 그런데 기자공부를 한다는 거였어요. 언론사 공부를 한 대요. 저는 참 무식한 게 기자를 그렇게 시험 쳐서 들어가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거 한번 해볼 만도 하겠다 싶었어요. 알아보니까 언론사 시험은 성적을 요구하지 않는대요. (웃음) 거의 3년을 공부 안 하면서 지냈으니까 한 번 언론사 시험을 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한 편으로는 사실 기자라는 직업이 상당히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맨 처음 시험 친 게 MBC 였어요. 그런데 MBC 기자로 지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 당시에만 해도 MBC가 완전 땡전뉴스였잖습니까, 그러니까 공영방송이 다 그런 처지였어요. 당시 연극반만 해도 운동권 서클까지 아니었지만 정권에 비판적이었어요. 우리 후배들은 굉장히 운동도 열심히 했지만 저희는 좀 나이브한 세대였어요. 그렇다하더라도 선배가 MBC 기자로 들어간다는…….(웃음) 그 당시에 후배들이 상당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정도로 MBC라는 데가 좀 그랬어요. 그래서 <동아일보>나 그 정도 되면 기자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MBC는 기자로 시험 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MBC에 PD로 시험을 쳤죠. 또 한편으로 그 당시에 꼭 그 이유만 있었던 건 아니고, 그 당시에 고석만 선배라는 아주 불세출의 PD가 있었는데 이 양반이 굉장히 좋은 프로그램 많이 만들었어요. 굉장히 실험적인 작품도 많이 만들고 사회성 있는 작품도 많이 만들고, 제1 공화국도 만들고, 그 당시에 봤던 게 <농노>라는 신경림 시인의 시를 드라마 비슷하게 영상화해서 만든 그런 작품을 보면서 ‘야 이 참 PD 라는 게 해볼 만 한 거다’ 생각했죠. 또 제가 연극 연출도 해봤으니까 드라마 연출하면 딱 연극 같진 않더라도 어쨌거나 예술 하면서 밥도 먹고 살겠다 싶었어요. 굉장히 기회주의적인 (웃음) 생각도 들고 해서 PD 시험을 쳤던 거죠. 운이 좋게 붙었어요.

처음에 드라마PD로 들어갔는데 6개월 동안 연수를 하면서 각 파트별로 돌아가면서 보니 그 당시 시사․교양 PD라는 게 있더라고요. 시사까지는 아니었지만 교양이라는 게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서 얘기 듣고 그걸 프로그램화 하고, 가고 싶은데 가는 이런 거 아니겠어요? 야 굉장히 좋아보이는 거였어요. 드라마 파트를 봐도 맨날 밤샌다는 얘기만 들리고 ‘여기 오면 죽는다’ 군기만 센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을 알고 싶다는 그런 생각, 대구라는 좁은 사회에서 살아왔는데 그러한 제한 속에서 벗어나서 넓은 세상에 들어가 보고 싶은, 알고 싶은 이러한 부분들이 많이 작용했죠. 그래서 교양을 선택 했어요. 참 선택을 잘한 것 같아요. 뭐가 좋다 나쁘다기 보다 제 적성에 맞는 걸 잘 선택했어요.

  ▲ 최승호 PD는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고, 시사 교양PD가 된 것이 잘한 선택이며, 후회 없다고 선선히 밝혔다. ⓒ강의정  
▲ 최승호 PD는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고, 시사 교양PD가 된 것이 잘한 선택이며, 후회 없다고 밝혔다. ⓒ강의정

홍: 그러면 본인이 판단할 때 본인의 어떤 부분이 교양 프로그램과 적성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최: 제 적성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교양PD를 하면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부분은 제가 모르는 사회를 알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 즐거움 그것이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다음에 또 제가 어떤 것을 알고 표현하는 거죠. 세상의 어떤 면을 갖다가 재구성하고 그걸 갖다가 제가 생각하고 받아들인 것을 나름대로 형상화해가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과정 자체도 굉장히 즐거운 일이예요.

이런 부분이 기자들하고 조금 다른 부분이죠. 알아 간다는 건 비슷하지만 기자들은 어떻게 보면 엑기스만 뽑아서 텍스트로 던지지만 PD들은 형상화 하는 과정 자체가 뭐랄까, 또 다른 요소가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 뒤에 방송이 나가고, 그것이 실제로 현실에 영향을 준 과정을 보면서 느끼는 굉장히 본질적인 즐거움도 있죠. 이게 가장 핵심적이죠. 그런 부분이 저한테 즐거움으로 작용한다는 거죠. 제작을 하다보면 고난도 많아요. 힘들고 여러 가지 별의 별일이 다 있어요. 결국 그것을 다 이겨내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을 하고, 현실에 반영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 그 뒤에는 다시 새로운 걸 찾아서 갈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이 결국은 제 적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치적 사회적 압력을 받고, 온갖 법적 쟁송에 시달리며, 최근에는 회사 내의 게이트키핑으로 소재 선정에서 방송까지 많은 난관들을 돌파해야하는 것이 시사PD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즐거움’은 낯설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는 현재 해직된 상태가 아닌가? 그는 인터뷰 도중 초탈한 듯 너털웃음을 여러 번 터트렸다. 이야기에는 비장감 대신에 유머감각까지 엿보였다. 드라마PD를 꿈꾸며 입사한 그가 시사PD로 거듭난 것을 보면, 입사초기부터 사회적 의식 이른바, 공공서비스 지향성이 높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런 그가 공공서비스 지향성을 어떻게 내면화한 것일까?

저 같은 경우에는 1980년에 1학년이었기 때문에 '서울의 봄' 80년 5월에 데모 많이 했어요. 선배 따라서 그러다가 한 순간에 전두환 씨가 5·17계엄하고, 광주 사람들 죽이고 암흑기로 들어갔는데, 그런 암흑기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대학생활에 굉장히 낭만이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술 먹고 친구들하고 놀고 연극하고 그 당시 연극도 의식적인 그런 연극이 아니라 좀 뭐랄까 좀 순수 연극이랄까? 그런 치기어린 낭만이랄까, 젊음의 발산 이런 것들 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어마어마한 억압을 느끼고 있었고, 주변에서 열심히 활동하다가 잡혀가는 것도 보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런 부분들에 대해 늘, 특히 광주의 죽음이나 이런 부분에 부채의식 같은 것…. 기자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런 부분이었어요.

그리고 MBC 입사해서 교양 쪽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죠. 1987년 6월 항쟁이 그 당시 아마 공통으로 영향을 미쳤을 텐데, MBC 앞에 술집에 기자들 PD들도 그렇고 굉장히 통탄하면서 술 먹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때 뭐 명동에서 시위하고 이럴 때 MBC 중계차 가면 돌 맞았으니까요. 아무리 찍어가도 방송 안하니까 뉴스 안 나오고 심지어 왜곡하고 어마어마하게 모였는데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6월 항쟁이 끝나고 난 뒤에 방송민주화 운동, 그래서 그 때 막 MBC 사옥 안에서 저희 사무실 안에서 PD들이 다 모여 PD협회를 결성하고 그동안 잘못했던 것 반성하고 앞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노조도 만들어졌어요.

반성의 과정에서 결국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되었던 게 PD쪽에서는 시사 프로그램을 해야 되겠다는 집약적 요구가 나온 것이죠. 그 당시 저 하나뿐 아니라 일반적인 방송사 내부의 분위기, 자연스러운 역사 속의 흐름이었어요. 과거 땡전뉴스를 하고 권력에 복종했던 방송인들 특히 주니어들이 중심이 되어 그런 현실을 탈피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그런 당연한 수순이었죠.

  ▲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최승호 PD와 홍경수 교수. ⓒ강의정  
▲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최승호 PD와 홍경수 교수. ⓒ강의정
수평적 조직문화 ‘PD저널리즘’ 만들어


: PD저널리즘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요. 책에서는 기자․ PD저널리즘이 중요한 게 아니고 탐사 저널리즘이 중요하다는 얘기 하신 것 같아요. 기자들이 갖는 한계를 PD들이 극복을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PD수첩>이라고 하셨는데, 기자 저널리즘과 PD 저널리즘에 차이가 있나요?

: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기자 저널리즘이라는 것은 권력의 통제에 순치된 저널리즘이죠. 보도지침이라든가, 권력이 주는 촌지를 받고, 심지어 촌지를 나누기도 하면서 말이에요. 거기에다가 당시 기자들은 갑종 근로소득세를 안 냈어요. 면제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권력이 시키는 대로 기사를 썼죠. 그러니까 저널리즘이라고 말할 수 없죠. 출입처를 통해 일일이 통제 받았어요. 굉장히 수직적인 문화, 아무리 밑에서 뭐라고 해도 데스크가 그냥 빨간 줄 하나 쭉 그으면 그냥 무조건 빠지는 거죠. 그건 그냥 룰이죠. 만약 밑의 기자가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하고 ‘이렇게 하면 돼요?’ 대들어도 그런 것들이 인정 될 수가 없는 반면에, PD들의 문화는 그런 건 아니었거든요.

PD들은 직접적으로 사회를 다룰 순 없었죠. 어떻게 보면 사회 현실을 다루는 건 PD들에게는 ‘오프 리미트’였죠. 아주 신성한 영역이라 기자들만 할 수 있는 거였고 PD들은 문화 프로그램이랄지 주부대상 생활정보 프로그램이랄지 이런 것만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PD들의 문화는 그래도 드라마, 예능, 교양 할 것 없이 굉장히 수평적이었어요. 누구든 담당 PD가 그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핵심 키 역할을 하고 담당 PD가 중요한 결정을 해요. 물론 2008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정도의 자율성에 비교할 순 없었지만은, 그래도 그 당시 기자들에 비해서는 훨씬 더 자율적인 문화 속에서 있었던 거죠. 그런 문화 속에서 사회를 다뤄나갈 때 기자들이 아무리 극복하려고 해도 이미 수직적인 문화와 출입처 저널리즘 속에 갇혀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PD들은 출입처가 없었던 데다가 수평적인 문화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무리 밖에서 어떤 외압이 있더라도 그걸 극복해 나가는 힘이 있었던 거죠. 왜냐면 사실 우리 PD 선배들도 밖에서 전화를 많이 받았겠지만 그 전화 받았을 때 ‘받았으니까 이것 좀 빼줘’ 라고 이야기하는 거 굉장히 쪽팔려하고 굉장히 어려워했어요. 안 해보던 짓이니까 (웃음). 기자 사회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고, 어떻게 보면 자기도 어릴 때 선배가 그렇게 얘기하면 뺐고 자기가 고참이 되어서는 당연히 그런 거였죠. 그렇지만 PD사회는 그런 건 아니었죠. 물론 지금보다는 훨씬 더 PD들도 수직적인 게 강했기 때문에......

그 당시 <PD수첩>이 처음 시작 되었을 때 김윤영 선배 이런 사람들이 ‘외압에 휘둘리지 않는다’ ‘촌지 받지 않는다’ 등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그런 걸 지켜나가려고 애를 썼죠. 그런 면에서 굉장히 빨리 PD저널리즘이라는 것이 두각을 나타낸 거죠. 물론 그때만 해도 정부의 아주 핵심적인 아주 중요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거나 하진 못했어요. 물론 우루과이 라운드 등 일부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좀 힘들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소쩍새마을 다뤘다가 그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서 재벌 다루고 검찰, 청와대 그리고 국정원도 다루고 이렇게 된 거죠. 그런데 2008년도에 청와대를 비판하니까 보수 세력이 폭발한 거죠.

  ▲ 홍경수 교수. ⓒ강의정  
▲ 홍경수 교수. ⓒ강의정
: 어쨌든 기자 저널리즘과 PD저널리즘의 존재와 차이점은 인정하시는 건가요?

최: 발생과 발전과정의 차이는 있어요. 지금도 어느 정도 차이는 있죠. 출입처 또 아까 얘기 했듯이 텍스트 중심, 핵심 내용 중심으로 한 줄로 딱 표현되는 ‘야마’(기사의 핵심 주제)가 기자 저널리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면 PD들은 ‘야마’ 한 줄보다는 아무래도 개인 프로그램을 다루니까 좀 그렇겠지만 ‘야마가 뭐야?’보다는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해가지고 분위기 이런 것들을 전달하는 거에 더 집중하죠. 그러니까 똑같은 건데 피디들이 만든 것 보면 사람들이 더 열 받고 분노하고, 상대적으로 보면 어떤 땐 좀 핵심을 전달하는 것은 어눌하기도 하고 그렇죠.

: PD와 기자가 함께 있는 <뉴스타파>는 탐사저널리즘을 표방하는데, 먼저 얘기하신 탐사 저널리즘이 PD에게 좀 가까운 건가요? 그걸 어떻게 보시는지?

: 따지고 보면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은 결국은 다 비슷비슷하고 통하는 거죠. 탐사저널리즘의 본질은 아주 큰 권력을 갖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익과 관련해 숨기려고 하는 내용을 파헤쳐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한 부분은 PD건 기자건 다 똑같은 거죠.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이 무슨 중계보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뭐냐를 추구한다는 그런 부분이 동일한 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원래 PD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PD저널리즘의 속성이 그런 거예요. 근데 저널리즘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저널리즘이 원래 그런 건데 우리나라에서 그렇지 않은 저널리즘이 아직도 지배적인 경향이 있는 거죠.

: 그렇다면 기자와 PD의 협업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 글쎄요 협업, 협업이라는 게, 그냥 같이 하는 건데 특별히 큰 차이는 못 느껴요.

어떻게 보면, 참된 저널리즘에는 기자 저널리즘과 PD저널리즘의 구분은 없다. 저널리즘만 있을 뿐. 그렇다면, 기자저널리즘이나 PD저널리즘이라는 용어는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전제가 깔린 구분법일 수도 있겠다. 기자와 PD라는 취재 주체가 다르고 접근법이 다소 다르지만, 저널리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서는 다를 수가 없다. <뉴스타파>에서 기자와 PD들은 탐사저널리즘이라는 이름 아래 잘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 <뉴스타파>에서 최승호 PD께서 하시는 역할은 무엇인가요?

: 저는 앵커역할 그 다음에는 PD 역할을 하죠. 독자적으로 취재를 하고 프로그램 만들고 뉴스에 내기도 하고 좀 오래 취재해가지고 추석 연휴 때 내려고 만든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자백이야기) 시사를 하고 있습니다.

: 프로그램 진행하신 경력이 꽤 많이 되셨죠?

: 그렇죠! 제가 2005년도에 <PD수첩> 앵커가 되어가지고 <PD수첩>을 좀 했으니까 <뉴스타파> 앵커를 해달라고 해서…….

: <PD수첩>의 경우, PD가 앵커를 하고 내레이션도 하고 아나운서가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PD가 직접 진행하게 되었을 경우에 어떤 장점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것 같아요. 경우에 따라서 다르죠. 너무 못하면 안 되죠. 사실 사투리 때문에 듣기 괴로울 정도면 조용히 물러나서(웃음) 좀 잘하는 사람이 하도록 하는 게 맞죠. 음 근데 어느 정도 하면 아무래도 그런 건 있습니다. 취재를 실제로 한 사람이 가장 그 사안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직접 이야기하면 보는 사람들도 좀 더 신뢰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PD수첩>에서는 그 형식이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PD들이 굉장히 오랫동안 진행하다가 그 다음에 진행은 PD들이 하는데 내레이션은 아나운서들이 몇 년 쭉 진행했어요.

그러나 요즘은 다시 PD들이 합니다. 제 생각엔 내레이션은 좀, 그러니까 <PD수첩> 같은 프로그램에서 어눌한 PD들이 내레이션 훈련을 제대로 안 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전달력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어요. 사실 윤길용 국장이 되었을 때 다 바꾸어버린 거예요. PD들이 직접 내레이션 해라, MC도 없앴고 PD 둘이 출연해라. 그런데 앵커가 있어야 해요. 늘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소화하기 쉽거든요. 앵커를 없애버리고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 이런 식으로 하면 프로그램의 정체성 확립이 어렵죠.

문제점 세팅하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창의력이다

: 가장 궁금한 것 중 하나는 탐사저널리스트에게 창의력이 어떤 식으로 발현 되느냐입니다.

: 창의력이라는 게 제가 생각할 때는 여러 면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어떤 것이 문제다’라고 세팅하는 게, 그것이 상당한 정도의 창의력이라고 생각해요, 일단. 어떤 것이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사건에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가 가짜일 수 있다 하는 거를, 그것도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부분이 쉽지가 않아요.

그 다음 ‘검사와 스폰서’편에서 스폰서가 검사들 접대하고 술 먹이고, 룸살롱 가서 성 접대하고 이런 거 법정 출입 기자들은 다 아는 거거든요 자기들도 다 같이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입처 저널리즘에 빠지다보니 ‘그게 왜 문제가 돼?’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체제가 아니다보니까 문제라고 느끼는 거고 그것을 실제로 형상화할 수 있다고 느끼는 거죠. 그것을 어떤 기자는 보니까 ‘PD들은 상상력이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그런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죠.

문제를 세팅하는 것 그 다음에는 취재해 나가는 과정에서 장애물을 돌파하는 과정에 창의력이 필요하겠죠. 황우석 줄기세포 같은 경우 그것을 가짜라고 입증하려면 한학수 PD가 서울대 수의학과 실험실에 있는 줄기세포를 꺼내서 그거를 유전자 테스트를 해서 줄기세포의 근간이 된 유전자를 제공했던 사람의 머리카락 이런 것과 대조를 해서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야 가짜라는 것이 나오는 건데 서울대 실험실이라는 게 국정원의 보안시설이기 때문에 꺼내온다는 게 불가능한 겁니다. 아마 웬만한 경우에는 취재를 포기했을 겁니다. 어쨌건 한학수 PD가 돌파했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상상력과 인내력 모든 걸 동원해가지고 돌파를……. 그런 부분들이 이제 뭐 탐사 PD들의 창의력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 다음에는 뭐 취재가 되면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해내냐는 거겠죠.

: 어떻게 보면 한국 방송의 역사적인 장면 중 한 가지가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할 때 가셔서 수심 6m 질문하셨던 그 장면이라고 전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걸 하려고 생각하셨는지? 창의력과 관련해서 한 번…….

: 그때 제가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을 만들고 사실은 그것 때문에 잘린 거죠.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는 것을 명시적으로는 내세우고 있지만 파업이야 서울, 지방 해가지고 2000명이 참여했는데, 그거 가지고 하면 안 되고, 결국은 이제 MBC에 좀 두기 힘들 정도로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게 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요. 제가 MBC에서 잘리고 난 뒤에 <뉴스타파>에 와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 그 프로그램 후속 편을 만드는 거였죠. 그래서 후속편을 만들었습니다.

‘4대강 수심 6m의 비밀 2’. 한참 여러 가지취재를 하고 있는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한단 얘기를 들었어요. 퇴임하기 전에 한 번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퇴임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언제 논현동으로 간다' 그런 보도가 나오더라고요. 실은 그렇게까지 기대는 안했습니다. 일단 멀리서라도 이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라도 찍어놔야겠다 멀리서라도 찍어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현장엘 갔는데 생각보다 경호가 허술하더라구요(웃음). 아무래도 퇴임하는 날이니까 이명박 대통령도 격의 없이 좀 사람들하고 손도 잡아보고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거죠. 줄을 쭉 세우고 앞에 폴리스 라인을 치고 앞에 대통령이 지나가는데 제가 가서 딱 보고는 ‘참 운이 좋다’ (웃음) 그런 생각을 했죠.

카메라 두 대를 배치 해놓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제 음,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질문을 던졌는데, 제가 악수를 하면, 거기 다른 사람들하고는 컬러가 틀리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뭐 거의 아줌마들 그런 사람들이고 이명박 인터넷 무슨 후원회 동호회 비슷한 이런 사람들인데, 다른 칼라가 생긴 거죠? 그리고 제가 ‘아 수고하셨습니다. 이랬어요. 이랬더니 이 양반이 되게 반가워하더라고요(웃음). 이 양반은 아마도 제 생각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제 얼굴이 아마 낯익었을 거예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낯익은 친구가 그리고 아마 어딘지 모르겠는데 언론인이다는 정도까지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근데 어쨌거나 제가 “수고하셨습니다” 하니까 정말 반가워했어요. “오!~” 이렇게 손을 잡더라고 그래서 손을 잡고는 물어봤지요. “4대강 수심 6미터 비밀 대통령께서 지시하셨냐고” 그랬더니 놀래가지고 “어” 하기에 미안하잖아요 제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그래서 대통령한테 “죄송한데 제가 여쭤볼 기회가 없어서 지금 여쭤본다”고 하면서 한 번 더 물었어요. 한 번 더 물었는데 끝내 나중에 얘기하자고 가버리더라고 아직까지 얘길 안 하고 있는 거죠.

: 그리고 또 한 말씀 더 하셨죠?

: 거기서 계속 할 것 같으니까 경호원들이 나를 끌어냈어요. 라인에서 대통령은 지나가고 경호원들이 저를 끌어내는 거예요. 끌어내기에 이제 얘기를 한 거죠. “‘질문을 못하게 하면 나라가 망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하면서 사실 기자회견을 몇 번 안 했고 기자회견을 해도 언론인들한테 자유로운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고 짜놓은 대로 질문을 하도록 하고 짜놓은 대로 답변을 하는 그런 대통령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나라가 결국 이 모양이 되는 거지. 언론이 전부다 자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비판을 안 받았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퇴임 후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결국 대통령이 불행하게 되면 나라도 불행한 거니까 결국은 그렇게 되는 거죠.

언론, 자기 라인 설정하고 안 넘으려 해

  ▲ 최승호 PD. ⓒ강의정  
▲ 최승호 PD. ⓒ강의정

: 그 장면 나가고 나서 이야기 좀 많이 들으셨어요? 주변 분들한테.

: 아니 보니까 대통령이 이리 오는데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 물어보는 사람이 저 하나밖에 없었어요(웃음). 그러니까 대한민국 언론 일 하는 사람들이 자기 라인을 설정 해놓고 거기를 안 넘어가는 것 같아요. 그런 것이 일종의 출입처 저널리즘의 한계인 것 같아요. 출입처에서 어떻게 보면 다 짜놓고 자기네들끼리 말하자면 ‘어 우리 이 라인 지키자’ 이러면서 하는 거거든요. 포토라인 딱 있으면 그 포토라인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하는 거니까. 정말 어떻게 보면 특종 한 기자가 배신자 되고 나쁜 놈 되고 그런 분위기인데. 그러니까 그런 부분들이 기존의 기자들 입장에서 보면 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저 나이에 저러고 싶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오십 넘어 가지고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참 구질구질하다’ 랄지.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 한 사람이라도 질문해야지. 그렇게 질문하는 게 중요하고 그 때 그거라도 질문 안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지금 감사원에서 (4대강 사업이) 대운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그 질문이라도 했기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까지 답변을 안 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있는 거죠. 그 때 이미 그 질문을 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모든 PD에게는 창의력이 필요하다. 의제를 설정하는 ‘거시적 창의력’과 시청각적으로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미시적 창의력’이 모두 필요하다. 21세기, SNS와 유투브 등 첨단 미디어가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디지털 시대와 해직 언론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단어의 충돌은 한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했다. 먼지 풀풀 나는 한국 언론사의 한 페이지엔가 있을 고색창연한 단어가 지금 여기에 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고, 시사 교양 피디가 된 것이 잘한 선택이며, 후회 없다고 선선히 밝혔다. 그는 매우 창의적이게도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던 사실의 샅바를 잡았으며, 그것을 밝혀내어 뒤집어낸 뚝심과 강단을 지녔다. 게다가 긍정적인 유머감각과 초탈한 듯한 태도도 넘쳐났다.  

: PD로서 본인이 생각하실 때 창의적인 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난 창의적인 편이다’ 스스로?

: 창의적이라는 게 창의적인 편이라고 생각하죠.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피디가 창의적이다 이렇게 얘기할 때 하여튼 저는 늘 그 새로운 걸 해보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새롭게 뭐든지, 주제라는 측면에서도 새롭게, 또 어떤 측면에서는 전달하는 방식을 좀 새롭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썼죠. 그런 부분들 뭐 <검사와 스폰서> 같은 거 할 때 프로그램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인형, 그 나무인형 가지고 룸살롱 장면 같은 거 표현하는 것 그런 것들, 새롭게 한번 해보려고 한 거였죠. 우리 같은 경우 늘 직접 촬영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형상화 해 낼 것이냐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번에 만든 것이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인데 애니메이션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갔죠.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좋은 수단인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삽화를 많이 쓰는데 애니메이션은 거기서 좀 더 강도가 센 거죠. 센 것이기 때문에 조금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제를 하면서 활용하면 굉장히 좋은 표현방법인 것 같아요.

: PD가 전문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 전문직 아닌가요? 나는 전문직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세상을 다루는 세상을 형상화 하는데 여러 가지 있지만 시사교양PD는 약간 직접적으로 본인이 본 세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형상화 해내고 예능이라든지 드라마라든지 그거보다 조금 다른 차원의 형상화를 해내는 거지만 가장 대중적인 수단을 가지고 세상을 형상화해서 가장 대중적인 수단으로 대중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굉장히 강력한 임팩트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전문가. 제가 생각할 때는 굉장히 영향력이 큰 집단으로 생각합니다.

전문직에 대해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다양한 정의를 내렸다. 책 <미디어시스템 형성과 진화>을 쓴 핼린과 만치니는 전문직 구성요소를 자율성, 전문직 규범, 공공서비스 지향성으로 규정했다. 한국의 언론인이 자율성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직 내외부의 압력이 만만치 않다. 그는 자율성을 담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거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 비판보도를 하는 것은 자신을 걸어야 가능하다. 그렇지만 저널리스트는 이런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스트가 구조적으로 약자인 쪽에 서있을 때 강자들이 굴복시키려고 한다는 거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우선 철저하게 사실 확인을 해서 정확한 보도를 해야 하고,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강자들이 체계적으로 옭아매서 올가미를 씌운다면 , 올가미를 써야 한다. 올가미를 쓰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올가미를 쓰고 싶지 않다고 해서 피하면 그것은 더 이상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다. (PD수첩 제작진, 2010, 260쪽)

그는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며 진실을 밝히려 했고, 이 올가미가 자신에게 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강자들이 옭아맨 해직이라는 올가미를 피하지 않고 쓴 셈이다.

: PD 하면서 굉장히 어려움이 많으셨잖아요! 어떻게 보면 지금 해직 상태고, 또 시사 프로그램을 하다보면 협박이라든지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그걸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요.

: 극복이라는 게 뭐……. 재밌어요. 이 과정 자체도 재밌어요. 뉴스타파 와서 일하는 것도 재밌고, 재밌는 것 같아요. 새로운 경험이고. 저는 뭐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만약에 계속 MBC에 있었으면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를 못 만들었을 것이고 주제가 국정원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고 다음에 간첩 조작사건인데 MBC에 있으면 지금 분위기에서 그걸 아마 PD수첩으로 다루는 것도 안 됐을 것이고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를 언감생심으로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근데 여기 와서 하니까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새로운 경험들 많이 하고 저는 뭐 전혀 유감이 없습니다.

: 지금 <뉴스타파> 하시면서 어떻게 보면 MBC에서 못하던 아이템들도 하실 수 있고 애니메이션 다큐 같은 것들도 하셨는데 <뉴스타파>에서의 한계는 어떤 것이 있나요?

: 한계는 지금 보면 돈을 많이 쓸 수가 없고 스태프들이 없으니까 스태프들이 방송사 안에서 아주 전문적인 지원을 받잖아요? 그런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봐야죠. 근데 제가 맡고 있는 영역이 시사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런 한계보다는 더 열려 있는 측면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어떤 주제를 다룰 수 있느냐 없느냐가 사실 관건이기 때문에 뭐 그 과정에서 물론 방송사처럼 작가도 없고 운전도 심지어는 우리가 해야 되고, 프리뷰도 우리가 다 해야 되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 난점이나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못 다룰 건 아무 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훨씬 나은 거죠.

: MBC에서 일하실 때 느꼈던 사회적 책임감과 지금 <뉴스타파>에서 느끼는 책임감의 차이가 미묘하게 있나요?

: 그걸 책임감이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차이가 있어요. MBC <PD수첩>을 제가 할 때는 그야말로 한 번 방송했다 그러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보죠. 여기는 보고 싶은 사람들만 보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때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보면 그때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많이 재단을 했다고 할까? 알아도 방송 안 하는 것도 있었고, 뉴스타파는 그 부분에서는 좀 더 자유로우면서도 시시콜콜 굉장히, 이제 취재하는 만큼 취재하는 대로 다 방송할 수 있는 그런 측면들은 있지만, 영향력의 한계는 분명히 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역할을 다하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많은 언론들과 함께 역할을 해야 하죠. 서로 도와야 되는 이런 측면들이 좀 더 있어요. 책임감이라는 것보다는 아쉬움이랄까? 이런 것들이 있긴 하죠.

홍: 마지막으로 <뉴스타파>의 콘텐츠를 내용적으로 비평을 하신다면?

: 사실 저희가 부족한 부분은 모바일 시대에 적합한 콘텐츠를 좀 더 개발해서 쉽게 전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그렇게 잘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고 있고, 방송 길이도 좀 길어요. 연구대상인거죠 PD로서는.

홍: 지금 후원 상황은 좀 어떠신가요 ?
: 지금 한 삼만 명 될걸요? 삼만 명이니까. 뭐 아직은 여기 우리 운영하는데 문제는…….

: 혹시 주변 PD들, 동료 PD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최: 제가 제일 가슴 아픈 게 제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조직이 완전히 망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망가지는 과정에서 제가 사랑하는 후배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고 절망하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픈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뭐, 글쎄요. 이 상황도 즐기라고 해야 되나? 어쨌거나 그 세상이라는 게 결국은 우리가 한 순간 사는 것인데, 그렇게 막 너무 안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즐겁게 받아들이면서 즐겁게 살면 되지 않을까? 너무 자학하지 말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또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하면서……. 상처받고 이러는 게 제일 안 됐어요……. 우리 후배 PD들 보면 지난 몇 년 동안 어떤 친구는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는데, 그래서 이제 절망하고 그런 부분들이 제일 가슴 아프죠

: 이번에 김진혁 PD님(현, 한예종 교수)도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뉴스타파>와 같이 하시기로 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 네, 하기로 했죠. 그 분이 <지식채널 e> 같은 형태로 계속 저희들과 같이 할 예정입니다.

: 혹시 준비하셨는데 못하신 말씀 있으면 해주세요!

: 없어요. (웃음)

  ▲ 인터뷰 촬영 후 기념 촬영 중인 최승호 PD(왼쪽)와 홍경수 교수. ⓒ강의정  
▲ 인터뷰 촬영 후 기념 촬영 중인 최승호 PD(왼쪽)와 홍경수 교수. ⓒ강의정

롤랑 바르뜨의 <신화론>에 따르면, 기표와 기의가 합쳐져 기호를 만드는데, 기호가 다시 기표로 작용하여 새로운 기의와 함께 또 다른 기호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신화가 만들어지는 지점이다. 정부의 주장, 언론의 말, 검찰의 행동은 우리 사회를 위한 것이라거나, 번영은 옳은 방향이다라는 우리 속의 신념에 대해 의문부호를 던지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신화를 깨는 일에 다름 아니다. 최승호 PD는 신화를 향해 돌팔매를 하고 진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아닐까?

<PD와의 대화: 확장하는 PD들>을 통해 다양한 직종의 PD들을 만나고 있다. 예능PD에서부터 해직된 시사PD까지. 이들은 PD라는 이름만큼의 공통점과 장르만큼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예능PD의 정체성이 엔터테이너에 가깝다면, 시사 PD의 정체성은 지사에 가깝다. 또한 드라마 PD가 아티스트라고 한다면, 교양 PD는 상식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들이 행사하는 자율성 역시 엔터테이너적 자율성, 지사적 자율성, 아티스트적 자율성, 상식적 자율성으로 분기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창의성은 똑같이 중요하며, 프로그램을 잘 만드는 능력도 중요하다. 프로그램을 잘 만든다는 것은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능력과 섭외를 잘하는 능력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수용자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며, 사회의 건강한 에토스를 만들어가는 데 이바지 하는 데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PD는 전문직주의에 충실한 PD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최승호 PD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홍경수 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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