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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과 ‘오만의 제국’

|contsmark0|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월드컵은 역시 힘이 세다. 사실 축구 자체가 이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엄청난 힘을 발휘해 왔다. 필자가 중학생이었던 1970년대 말의 어느 해인가, 하루는 반마다 학교 근처에 사는 학생들에게 교실로 텔레비전을 가져오도록 해서 전교생이 교실에서 축구시합을 봤던 적이 있다. 축구는 숨통을 조이는 학력주의의 그물 속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축구는 참 힘이 세다.
|contsmark1|지난 6월 10일, 우리 선수들이 아메리카합중국과 경기를 벌였다.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아주 많은 사람들이 길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contsmark2|어느덧 길 거리로 몰려나와 함께 모여 대형 전광판으로 경기를 보며 열렬히 응원하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옛날의 눈으로 보면, 아주 이상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축구가 좋다고,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맞아가며, 길 거리에서 꽥꽥 소리를 질러대다니.
|contsmark3|‘대~한민국’이나 ‘오~ 필승 코리아’를 따라 외칠 수는 없었지만, 필자도 길 거리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반 세기가 넘도록 이 땅의 유력자들이 ‘아름다운 나라’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 아메리카합중국,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이기적이고 패권적인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추악한 아메리카합중국, 상대가 바로 이 ‘오만의 제국’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시민들이 더 큰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contsmark4|그런데 이 날의 경기를 두고 경찰은 진작부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세종로 네거리로 모여들텐데, 그 옆에는 바로 아메리카합중국의 대사관이 있질 않은가? 평소에도 이 거리는 수백명의 경찰이 하루종일 순찰을 도는 ‘감시의 거리’이다. 그 이유도 물론 아메리카합중국의 대사관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contsmark5|‘오노사건’과 ‘f15사건’을 통해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낸 아메리카합중국으로서는 그 대사관 부근에 수많은 한국 시민들이 모여든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contsmark6|오랫동안 이 나라에는 축제가 없었고, 따라서 열광도 없었다. 넘쳐나느니 사이비 축제요, 사이비 열광들이었다. 팬이 문화의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는 이른바 ‘팬덤문화’의 등장은 이런 착잡한 상황을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뒤엎어 버리고 있다.
|contsmark7|서태지팬클럽이 그렇고, 붉은악마가 그렇고, 노사모가 그렇다. 1990년대를 지나며 한국 사회는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2002년의 월드컵은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확실한 예로 남을 것이다.
|contsmark8|그런데 아메리카합중국은 축제를 즐기려고 모여든 시민들을 왜 두려워하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은 아마도 이런 경우에 쓸 수 있을 것이다. 도둑질하지 않았으면, 발이 저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contsmark9|그러므로 아메리카합중국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맹방의 이름으로 자신이 저지른 그리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잘못들이다. 정말 맹방이라면 잘못을 일깨워주는 한국의 시민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의 축제에서도 이런 사실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었다. 시민들은 스스로 축제를 만들고 즐기는 데 몰두함으로써 잔뜩 긴장했던 ‘오만의 제국’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contsmark10|축구의 센 힘은 매체의 센 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텔레비전이 없었더라면, 제 아무리 월드컵이라고 해도 별 힘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공동체의 확인’과 ‘반미에 대한 우려’라는 두가지 내용으로 대별될 수 있는, 이번의 ‘축제’에 대한 대중매체의 보도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contsmark11|이런 식으로 보도한다고 시민들이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아메리카합중국의 정체를 모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고 토론되는 인터넷 시대이다. 시민의 역량은 훌쩍 성숙했으나 우리의 대중매체는, 아니 이것을 통제하는 유력자들은 아직도 옛날을 살고 있지 않는가?
|contsmark12|홍성태상지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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