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세상보기 첫번째 … 문화읽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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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에서의 저항과 쾌락

|contsmark0|프로듀서연합회보는 이번 호부터 ‘프로듀서의 세상보기’라는 제목의 장기연재물을 시작합니다. ‘프로듀서의 세상보기’는 우리 주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한 기획입니다.세상보기 첫 번째 기획은 ‘문화읽기’입니다. 문화읽기는 한겨레문화센터 제11기 가을강좌의 전문강좌인 ‘문화비평-90년대말 문화담론의 이해’에 참가하는 강사들의 강의내용을 프로듀서연합회보에 맞게 요약·발췌해서 앞으로 약 7회에 걸쳐 실을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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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3|대중문화에서의 저항과 쾌락이재현<문화비평가>
|contsmark4|대중문화적 문맹 상황대중문화는 ‘보통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이며 사람들은 대중문화로부터 다양한 즐거움을 얻는다. 우리 일상생활은 이러한 자잘한 즐거움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들끼리 만나서 암울한 정치·경제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어제 본 드라마 얘기, 요즘 새로이 뜬 탤런트나 가수 얘기를 하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즐거움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견디는 문화적 저항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하나의 리터러시(literacy)라고 한다면 상당수의 기성세대는 대중문화와 관련해서 문화적 문맹에 처해 있다. 사진기의 필름을 제 스스로 한 번도 갈아 본 적이 없는 사람, tv나 유선방송의 프로그램을 한 번도 비디오로 녹화해 본 적이 없는 사람, 요즘 인기있는 노래의 랩 부분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문화적 문맹은 한국 사회의 도처에 있는 셈이다.이러한 대중문화적 문맹 상황은 지나치게 공식 윤리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상하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주의란 나쁘다는 통념이 지배적이다. ‘개인주의 = 개인의 쾌락이나 사적인 이익의 추구 = 이기주의’라는 어처구니없는 등식이 공식 윤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압력은 매우 크다. 그런데, 자립적 개인이나 소집단의 존재 자체나 그들 사이의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도하게 공공성을 요구한다면 이는 사이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사정에는 식민지, 분단, 전쟁 등과 같은 전국민적 역사 체험이 작용했을 터이며, 또 산업에서의 근대화는 급속하게 이루진 반면에 심리적·문화적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공허한 사이비 공공성을 내세우는 윤리적 통념은 대중문화를 보는 시각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예컨대, 봄 가을에 방송 프로그램 개편이 이루지면 일간지 한 구석에는 어김없이 방송 프로의 공공성 결여를 우려하는 논조의 사설이 실린다. 논설위원들은 교양 프로보다 오락 프로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시청률에 연연하지 말라는 주문을 상투적으로 덧붙이기 마련이다.
|contsmark5|문화적 엄숙주의와 즐거움이러한 시각은 방송을 국민 계도의 수단쯤으로 치부하는 전근대적이고 획일적인 권위주의의 소산일 뿐이다. 그러한 시각은 일간지 스스로가 한 주에 하루씩은 인터넷으로 떡칠하는 소위 뉴 미디어 시대에 여전히 tv 이전의 올드 미디어 수준에서 교양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전근대적 의미의 교양이 여러모로 유명무실해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tv와 같은 대중매체에서 소위 교양을 찾는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교양’이 없는 문맹 상태의 소산에 불과하다.과거, 대개의 사회과학적 대중문화론, 예컨대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론은 엘리트주의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에서 대중문화를 보았다. 그러한 관점은 한국 사회에서 ‘사이비 공공성’에 대한 지나친 요구와 결합하여, 한편으로는 대중문화를 이념, 의미, 이데올로기 등의 인지적 차원에서만 다루고, 다른 한편에서는 통제와 검열을 통해서 문화적 엄숙주의와 획일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반면에 최근 대중문화 연구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즐거움, 욕망, 의지 같은 비인지적인 차원에 대한 관심이다. 대중문화에서 즐거움을 강조하는 시각은 대개 수용자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한다. 수용자는 백지가 아니다. 시청자나 청취자는 나름대로 영리하며 통찰력이 있다. 수용자는 문화 산물의 지배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스스로 그 의미를 변형시키고 가공하는 방식으로 재생산하면서 그 의미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은 즐거움을 동반한다. ‘서태지기념사업회’라든가 ‘엑스파일 동호회’ 등과 같은 갖가지 팬클럽 안에서 재생산 되는 팬 토크(fan talk)가 이 단적인 예다. 바로 이 점이 고급문화의 수용자들과 대중문화의 수용자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이며, 대중문화가 고급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contsmark6|문화적 대중주의대중문화 연구에서는 수용자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문화적 대중주의(cultural populism)라고 부른다. 문화적 대중주의를 대표하는 이론가는 몇 년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도 있는 존 피스크(john fiske)인데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화란 우리의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의미를 생산하는 지속적인 과정인데 이런 의미로부터 대중의 사회적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생산과 순환 속에 즐거움이 있다. 이러한 즐거움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늘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의의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피스크의 입장에 따른다면, 대중의 문화 소비는 단순한 소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생산이며, 즐거움의 생산이며, 일종의 저항적 실천이다.예컨대 ‘깻잎’ 머리에 핀을 꽂고 거리를 어울려 쏘다니는 10대 여중생 ‘핀족’을 놓고 얘기해보자. 이들이 머리에 꽂는 핀은 사소한 듯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들 자신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헤어 스타일, 핀의 모양과 색깔, 그리고 머리에 꽂는 부위와 꽂는 방식은 나름대로의 차별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러한 핀 꽂이의 미세한 차이를 식별해가면서 즐긴다.사회의 지배적 공식문화를 대변하는 사람들, 혹은 부모 등을 포함한 기성 세대가 핀족의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깻잎 머리’에 핀을 꽂는 스타일의 선택은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동반하면서 동시에 저항적 의미를 지닌다. 이 저항은 질식할 것 같은 입시 제도와 억압적 가정을 포함한 기성의 지배 제도와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물론 이 저항은 파업이나 데모와 같은 정치·사회적 저항과는 차원이 다르며 당연히 사회적 파급력도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0대 청소년이 갖가지 사회 제도의 압력을 버티어 내는 방식, 비틀어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서의 문화적 저항이라는 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기성 지배체제가 사소하게 간주하는 그들 또래 집단의 문화적 선택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와 저항적 즐거움이 얼마나 큰가 하는 점은 예컨대 그들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잘 알 수 있다. “학교는 그만 둘테니 가발일랑 돌려주세요.” 이 경우 가발은 10대 당사자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인 것이다.
|contsmark7|한국적 특수상황물론 사정이 이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바꿔 보자. 가요와 패션에 한정해서 말할 때 오늘날 한국의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수용자층은 10대와 20대이다. 이렇게 된 사정에는, 미국의 대중문화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의 문화 시장의 역사나 규모가 미미하다는 점도 작용할 것이다. 즉, 가요를 예를 들어 말하자면, 미국에는 ‘어덜트 컨템포러리’라고 부르는 주류 대중음악, 즉 어른들이 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팝 음악과 같은 장르의 주류 음악이 있다. 이에 반해 한국에는 그것이 없다. 물론 뽕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재 대중음악의 주류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대중음악의 주류는 댄스 음악이며 계절에 따라 발라드가 가끔 부상하기도 하는 게 한국의 실정이다. 미국에서 락 음악이나 힙합 계통의 음악은 오버그라운드이든 언더그라운드이든 간에 주류인 것은 아니지만, 반면에 한국에서는 10대와 20대의 취향이 주류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한국적 특수 상황, 즉 주류 대중문화라 할 만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90년대 들어 형성된 새로운 문화 소비자층이 대중문화 전반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문화에 대한 사이비 공공성의 요구는 언제라도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반달리즘(vandalism 문화파괴주의)의 형태로 돌출할 수 있는 것이다. 즉, 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 공연 때에 가요를 중심으로 해서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터무니없는 숙정 캠페인이 벌어졌었고, 또 지난 여름에는 만화와 영화를 중심으로 해서 다시 ‘문화 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캠페인들은 늘 대중문화에 대한 국가나 시민사회의 공식 부문의 통제와 검열을 강화하거나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contsmark8|갈등 또는 차이의 문화이러한 캠페인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 글의 맨 앞에서 지적한대로 대중문화를 계도적인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대중문화는 무조건 천박하고 저질이며 음란하고 저속하며 퇴폐적이라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은 대중문화는 쓰레기 문화이고 하수도 문화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격리시키거나 정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대중문화에서의 즐거움과 저항을 강조하는 시각은 우리 대중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문화적 대중주의에서는 대중문화를 갈등의 문화 내지는 ‘차이의 문화들’로 본다. 이 말은 어느 사회에서든지 문화라는 것이 획일적으로 통합될 수는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예컨대, ‘교과서 음악회’에서 가수들이 정장 차림으로 댄스 음악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허황된 공공성에 입각한 어릿광대 놀음인가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60년대 미국의 락음악은 당시의 정치·사회 상황과 관련하여 문화적 저항의 의미를 지녔다. 한국에서는 어떤가. 그룹 ‘넥스트’가 해체한 상황에서 ‘자우림’ ‘쥴리엣’과 같이 새롭게 뜬 락 밴드들은 무대 위에서 마치 아무 생각이 없는 듯 어린애들처럼 즐겁게 논다. 또 그 이전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다른 아마추어 언더그라운드 락 밴드들도 마찬가지이다. tv 출연자의 헤어 스타일과 패션에 대해 간섭하는 바의 공식문화의 사이비 공공성에 대항하여 “제발 내비둬”라고 저항적 말투로 말하면서 오늘도 라이브무대에서 저희들끼리 즐기고 있다. 90년대 한국에서는 즐기는 것 자체가 사이비 공공성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모두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은 갔다. 그 시절의 대중문화는 ‘피로 회복에 박카스’ 수준의 역할만을 했을 뿐이다. 지금은 다르다. 문화적 소비의 영역이 커졌고 일반 소비의 문화적 성격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문화 특유의 즐거움과 문화적 저항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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