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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승인 1997.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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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6남매가 고향에 모였다. 일흔 셋이신 어머니는 자식들을 한자리에서 모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 하셨다. 지난 추석 때 뵈었던 어머니는 그 동안 눈에 띄게 허약해지셨다. 당신의 말씀도 발음이 잘 안 될 정도로 어눌해지시고, 다리에 힘이 빠져 뭔가 짚어야 간신히 일어나신다. 가슴이 아팠다. 자식들 얼굴이 보고 싶다고 자꾸 우시고, 새벽에 일어나 몸단장하고는 외출을 고집하시는 어머니가 치매 초기 증상 같다며 곧 돌아가시면 어쩌나 걱정하던 여동생의 전화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어머니는 셋째인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끼니를 굶고 학교 가면 당신은 못 드셔도 돈을 빌리거나 쌀을 꾸어 따뜻한 밥을 지어 학교로 날랐던 어머니. 친구들은 그런 어머니를 ‘효모(孝母)’라 불렀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자식들 잘되기만 바라셨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혼미해진 정신과 쇠약해진 노구를 바라보며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으셨구나. 언제까지나 까랑까랑한 성격을 가진 고운 모습으로 계실 것 같았는데, 그 동안 자식들은 무엇을 했던가.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기껏 용돈이나 생활비 드리고, 명절 때 얼굴 한번 비치는 걸로 도리를 다했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이제 조금 남은 살아생전에 전화라도 자주 드리자. 그리고 형제들이 돌아가며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오자.자식들은 그렇게 약속하고, 각자 살고 있는 객지로 떠나야 했다.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아내가 갖고 간 70년대 노래들을 들었다. 기분 탓인지, 참으로 많은 기억의 편린들이 차창 밖 풍경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노래들인데 참으로 오래 잊고 살았구나. 맞아 그땐 그런 생각도 했었지. 저런 고민도 했고, 하고 싶었던 것도 참 많았는데. 그때 꿈과 생각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주변의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하거나 가슴 아파하고, 아닌 것에 대해 분노도 할 수 있었는데. 지금 나의 삶은 얼마나 가벼워지고 무디어졌는가.가장 소중한 어머니조차 잊고 살 수밖에 없는 반복되는 나의 일상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그러고 보면 생활에 쫓겨 소중한 가치를 참으로 많이 잃어버렸고, 나의 관심사도 많이 달라졌다. 집과 차가 생기며 어느 순간부터 집 없는 설움과 만원 지하철의 고통도 남의 일이 되었다. 한동안 통일이니, 빈민이니, 농민, 노동자니, 환경이니 하는 분야에 관심도 높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려 무던히 애썼던 시절도 있었는데. 방송은 약한 자의 편에 서야 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사회 통합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던 사명감의 크기는 얼마만해졌을까. 사회 감시나 사회 정의라는 큰 가치를 잊어버리고 본질과 벗어난 작은 현상 하나하나에 빠져 숲을 보는데 소홀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치열함과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기교와 재미에 빠져 시청률 구렁텅이 속을 헤매고 있지나 않을까.어머니는 참으로 많은 상념에 빠져들게 하였다.연말이다. 꼭 연말이라서라기보다, 한 번쯤 늘 우리 옆에 있어 그들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던, 그래서 소홀했던 사람이 없었는지 돌아보자. 문득 보고 싶었지만 일에 쫓겨 잊었던 사람, 작은 신세라도 졌던 사람에게 편지를 쓰거나 카드를 보내자. 우리가 마음놓고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모든 조건을 만들어 준 아내를 위해 오늘은 퇴근할 때 장미 한 송이 사 들고 가자. 고향에 어머니가 계신다면 이번 주말에 가족 모두 이끌고 한 번 다녀오자. 그리고 시간이 날 때 가장 치열하게 살 때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자. 이 사회에 지금 가장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프로듀서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이 추운 겨울에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북한 주민들이 얼마나 힘들지 가슴아파하자. 그래서 지금 내가 프로그램을 무슨 생각으로 만들고 있고,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보자. 그런 고민 속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새삼 확인하고, 자신의 자리를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당신은 언제나 제게 무한한 용기와 사랑을 주십니다.어머니,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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