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호 PD, 한류의 역사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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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수 교수의 PD학개론 ④] 윤석호 ‘윤스칼라’ 대표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국의 드라마가 전 세계인이 즐겨보는 콘텐츠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대 사건임에 틀림없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외국의 방송을 보면서 베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PD들이 부산이나 일본 규슈지방에 출장 가서 일본의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합숙연수'를 하거나, 일본의 통신원을 통해서 최신 프로그램 테이프를 공급받아 '해외동향'을 파악했다. 그리고 잘 기억하듯이 신문의 방송 때리기 소재는 주로 왜색, 모방, 표절 등이었다. 이러한 지적들은 예능 프로그램의 '저질' 논란과 더불어 증폭되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시대가 바뀌었다. 그 변화의 첫 단추가 바로 <가을동화>(2000년 방송)가 중화권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어서 2002년 방송된 <겨울연가>는 일본에서 더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욘사마 신드롬까지 생겨났다. 간혹 한류의 시작을 MBC의 <대장금>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대장금> 첫 방송은 2003년 9월 방송되었고 얼마 전 방송 10주년 특집을 했다. 따라서 방송프로그램 한류의 시작은 <가을동화>와 <겨울연가>를 만든 윤석호 PD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견해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세 번의 큰 한류가 있었다. 첫 번째가 4세기말 백제시대 근초고왕 때 왕인박사가 천자문을 건네준 것인데, 왕인박사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주조기술자, 요리사, 가죽장이, 옷 만드는 사람 등 다양한 기술자들을 대동하여 전남 영암 상대포를 떠나 쓰시마의 와니우라(와니는 왕인의 일본식 발음)를 거쳐 본토에 들어갔다. 일본의 사케 중 맑지 않고 탁한 니고리 사케를 마신 적이 있다. 심지어 쌀도 동동 떠있어서 한국의 동동주가 연상되었다. 그리고 연달아 식혜가 떠올랐다. 식혜와 사케, 언뜻 발음이 비슷해보였다. 식혜, 삭혜 혹시 이 두 단어의 어원이 같은 것은 아닐까? 찾아보니 어느 학자가 이 두 단어의 연관성을 어원 ‘삭히다’로 분석해 놓았다(정대성, 1995). 일본 고사기에도 일본의 주신은 백제인 수수보리로 그가 일본에 술을 전했다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 한류가 아니고 무엇이랴.

두 번째의 한류는 1400년대부터 400여 년간 이어져 온 20여회의 조선통신사 파견이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다녀간 다음에는 한국 풍 문화가 붐을 이뤘다고 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뭔가 앞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비용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통신사가 1811년 파견된 뒤 일본제국주의 시대를 거쳐서 200여년이 지나 다시 한국의 대중문화가 일본에 쏟아진 것이다. 윤석호 PD의 드라마는 역사적 의미에서 큰 이정표를 만든 것이 분명하다.

윤석호 PD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제일기획에 PD로 입사했다가, 1985년에 11기로 KBS에 입사했다. 그는 예능국에서 조연출을 하다가 드라마 국으로 건너가 <느낌>, <사랑의 인사>, <컬러>, <프러포즈>, <웨딩드레스>, <순수>, <광끼>, <초대> 등의 드라마를 만들었고, 4계절 시리즈와 얼마 전 종영한 <사랑비>를 제작했다. 그의 드라마가 일본에서 특히 많은 인기를 누린 덕분에 한국 방송 PD로서는 특이하게 제77회 키네마준보상 특별상 '한일우호 공로상', 일본 NHK ‘특별공로상’, 일본 프로덕션연합(ATP) ‘해외특별상’ 등을 받았다. 2009년에는 서울관광대상 최고 공로자상을 받기도 했다. 한류를 열고, 한국 방송콘텐츠의 수준을 높였으며,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올린 사람으로 기억될 윤석호 PD. 오랜 프로덕션을 잠시 멈추고, 10월말 영국으로 안식년을 떠나기에 앞서 그를 홍대 앞 윤스칼라 사무실에서 만났다.

▲ 윤석호 PD. ⓒ강의정

: 너무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니에요 저도 이래서 정리가 되죠. (웃음)

: 계속 일본 왔다 갔다 하시고 바쁘신 거 같아요.

윤: 그러니깐 <사랑비>를 끝내고 원래는 일본에서 드라마를 하기로 했어요. 특집드라마. 그전에도 뭐 계속 일본 영화사하고 얘기가 되다가 한일관계가 좀 냉랭해지면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그냥 기다리긴 뭐해서 저는 영국에 다음 주(10월 말)에 가요. 방문연구원(Visiting Scholar)으로 그쪽 세미나와 이런 것들을 들을 수 있어요. 가기로 결정하고 교수들 만나고 왔는데 다시 일본에서 보자고 해서 갔더니 영화제작이 결정됐어요. (웃음). 근데 뭐 영화를 제작해도 (영국에서)기획은 할 수 있는 거니깐…. 일본에서 다음 콘텐츠를 만들 거 같아요. 일본이 제작하고 저는 연출만 하는 그런 시스템으로 말입니다.

홍: 그 어떤 회사하고 하시는지…….

윤: 그거는 좀 미리 얘기하기가……. 쇼치쿠인데.

홍: 아 쇼치쿠예요?

윤: 아직 뭐 계약하고 이런 게 아니라서

홍: 제작은 쇼치쿠에서 하고 연출은 윤 PD님이?

윤: 네. 그 전에도 계속 시도했는데 예산이 너무 많이 드는 걸 제가 기획해서 무산이 됐어요. 이번엔 그쪽에서 기획하고 시나리오 작업까지 하고 저는 감독만 하겠다고 해서 몇 가지 책을 보고 있죠. 그쪽은 제 취향을 아니깐 그런 류로 찾더라고요. 그래서 뭐 아시다시피 한국에서는 <사랑비>도 그 예가 될 수 있지만, 제가 추구하는 작품들이 약간은 최근의 스피디한 트렌드하고 잘 섞이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잖아요? 영화는 드라마 PD들이 하고 싶은 장르고 그래서 저한텐 좋은 기회인 거 같아서 다시 한 번 재도전을 하려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웃음)

홍: (웃음) 그럼 영국은 어느 학교에?

윤: 런던대학교 한국어과와 내년 4월 20일부터는 옥스포드대 한국어과입니다. 옥스포드는 두 달 짜리고, 런던대는 일 년짜리로 겹쳐있어요. 런던대학에 (제안서를)보냈는데 답이 안 와서 옥스포드에 보냈는데 됐어요. 그래서 옥스포트에 가기로 했는데 뒤늦게 런던대학에서 연락이 왔어요. 난 둘 다 하겠다고(웃음) 뭐 한류덕분에 받아줬죠. 그래서 글로벌한 측면이 아무래도 많이 부족했는데, 일본은 많이 접촉했지만 시야가 좁은 거 같아서 다시 한 번 시도하는 그런 마음으로…. 나이가 자꾸 먹으니깐 그런 부분을 느껴요. 지금 떠나기 직전이에요. 이달 말 비행기 타면 내년 8월 중순까지 있을 겁니다.

홍: 그래도 이렇게 PD로서 갈 수 있다는 게 참 행운이신 거 같아요.

윤: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겨울연가>라는 한류 성취가 있어서 제가 좀 그럴 수 있죠. 애도 없고(웃음). 결혼을 늦게 해서 애가 없으니깐 애 있는 친구들은 아무래도 바쁘죠.

한국 지상파 PD들의 직무행태 중 가장 경이로운 것이, 예능, 교양의 경우 거의 매주 1편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우는 기획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여유가 있지만, 외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넉넉한 편은 아니다. 따라서 창의적인 PD들은 스스로 안식월이나 안식년을 만들어 재충전해야 하는 상황이다. 강도 높은 노동 강도는 PD들의 조로현상을 부추기며, 창의적인 기획을 막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안식년을 떠나는 PD들은 자연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성장 과정에 따라 자연, 첫사랑, 영상미가 화두로

홍: 아버님이 서울대 교수셨다고…….

윤: 서울대가 아니라 지금은 시립대죠. 거기가 옛날에 서울시립농업대학이었어요. 농촌사회학 전공이셨어요. 거기는 농업대학교여서 대학 캠퍼스 자체가 시골이었어요. 왜냐면 실습지였기 때문에 원예과가 있으면 꽃밭이 있고, 축산과가 있으면 목장이 있고…….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거기서 생활했죠. 교수 자택이 그 안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거긴 나오면 도시고, 들어가면 전원인 특이한 공간이여서 저의 감수성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어요. 자연을 좋아하고 그래서.

홍: 거기서 언제까지 사신 거예요?

윤: 고등학교 2학년 때(1973년) 농업대학에서 산업대학으로 바뀌면서 그곳에서 나와서 서울에서 살았죠. 그곳에서 사춘기를 보낸 거죠. 제 기억에 꼬마일 때 장 크리스토프, 베토벤 위인전 등을 읽고 전원에서 악성이 떠오를까 해서 오선지 들고 막 걸었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좀 그런 쪽을 좋아했어요.

홍: 결국 영상으로 고전을 만드셨네요!

윤: 네, 영상으로. <가을동화> 때 본격적으로 했고 그 동안은 도시 얘기를 많이 했죠. 2000년 들어오면서 화두를 던지기 시작했죠. 내가 좋아하는 자연친화적인 작품, 동화 같은 걸 했는데, 대만과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얻었어요. 그때 깜짝 놀랐죠. 아 그런 어떤 보편적인 거는 다 똑같구나.

홍: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윤: 제가 막내에요 보통 막내들이 조금 이기적이잖아요. 형들이 다 일을 처리하니까. 대부분 뭐 예술가들이나 소설가들 통계를 보니깐 막내하고 외아들이 제일 많다고 하더라고요. 집안일에 무신경하고 자기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이기적인 성향이 좀 있죠. 막내여서 저도 그렇게 됐던 거 같아요.

홍: 성격은 어떠셨어요?

윤: 저는 내성적이었어요. 그리고 특히 일기 많이 썼어요. 그때만 해도 중학교도 시험보고 들어갔는데, 저는 1차 떨어지고 2차 시험 볼 때 성격 고치라고 남자다워져야 한다고, 얘기 들었어요. 제가 약간 소프트했으니깐 여리고 소프트하고 그래서 중동고등학교 들어가서 성격을 개조하려고 기타 배우고 교회 다니고 RCY 활동했어요. 중동(중동고등학교) 아이들의 특징이 있잖아요. 그때 첫 사랑도 하고, 가수가 되겠다고 기타 배우고 노래도 불렀어요. 노래 좋아하는 모임에 대한 어떤 향수가 있었던 거예요. 나는 그만큼 못 하지만 그 멤버들이 노래 잘 해서 나는 듣기만 했지만(웃음) 워낙 그런 걸 좋아했죠. 성장 얘기를 계속 하자면 첫사랑을 얘기해야 하는데요. 제 드라마에 첫사랑이 무지 많이 나와요. 거의 모든 드라마가 첫사랑인데. 지금도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야 이제는 잊었냐?” 그럴 정도로 후유증이 되게 오래 갔죠. 그것 때문에 대학 떨어지고 질풍노도의 시절이 시작됐죠. 재수하고 삼수까지 하고 대학 들어가자마자 군대 가고 20대를 ……. 취업은 제대로 해야 되겠다 싶어서 공부 열심히 해서 제일기획에 들어갔죠.

홍: 어떤 분야?

윤: 제일기획에 PD로 들어가서 광고를 찍었어요. 광고는 재밌어요. 확실히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그때 저도 별별 아이디어를 다 생각했어요. 소화제 광고를 생각했는데, 배 위에다가 샴페인 잔을 피라미드같이 세웠다가 와장창 깨지는 (웃음)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그런 아이디어들이 기억나네요. 광고주, 우리는 주님 이라고 하는데, 그 광고주가 개인의 어떤 성취 결과를 시청자들이 알기 전에 먼저 신이 되어 판단했거든요. 프리테이션 현장에 가면 “이거 아냐 모델 바꿔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그게 절대적인 거, 그러니깐 내 인생을 저런 사람한테 평가를 받는다는 게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재밌는데 그게 좀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 때 뭐 아시다시피 KBS에서 올림픽 준비로 PD를 많이 뽑았잖아요. 그래서 11기 신입사원 뽑을 때 시험을 봤는데 다행히 합격했어요. 그 전에도 <TV문학관>을 보면서 저런 작품, 한때 문학도 해볼까 했던 생각도 좀 있었고, 미술과 음악도 좋아하니깐 그런 게 다 합한 게 나의 적성에 딱 맞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입사 후 쇼 파트로 발령이 나더라고요. 자기 히스토리가 결국 자기 콘텐츠가 되는 거잖아요. 이를테면 CF적인 이미지 때문에 <느낌>이라는 드라마를 했거든요. 제목이 ‘느낌’인 게, CF는 필링(feeling) 느낌적인 게 많거든요. 그래서 우희진을 찍을 때 대사가 없으면 CF적인 느낌이 나게 찍었어요. 모자 같은 걸 쓰고 고개를 들고……. 그리고 쇼 파트에서는 <영상가곡>이라는 프로그램의 조연출 했어요. 그거는 심야시간대에 영상가곡에다가 그냥 아름다운 풍경 넣으면 되는 그런 일 이었어요. 당시 졸병이니깐 온갖 테이프를 다 체크하면서 우리 쇼 파트의 영상테이프를 제가 만들어요. 그때 약간 영상에 대한 어떤 감각을 키웠죠. 진필홍, 이남기 선배들 밑에서 쇼 프로할 때 영상 브리지 같은 거 편집했어요. 지금은 뮤직비디오라고 하는데 옛날엔 영상가요라고 했어요. 자막 나가고 영상 나가는 노래방 기초수준이었죠. 그런 거 2년 하고 드라마 파트로 계속 보내달라고 해서 드라마로 갔어요. 난 드라마 하고 싶어서 방송국 왔다고 솔직하게 선배들한테 말하고 좀 미움을 샀죠. 자기 파트 싫어하면 좋아하겠어요? 다행히 자리가 나서 드라마로 갔고, 그런 게 다 도움이 되었던 거 같아요.

▲ 윤석호 PD ⓒ강의정
윤석호 PD의 말처럼 어떻게 보면 한 PD의 연출 스타일은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직업경로를 거쳤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농업대학 교수를 아버지로 둔 덕분에 어린 시절은 자연 속에서 보냈으며, 고등학교 때 지독한 첫사랑 열병을 앓았고, 국문학과 졸업 후 첫 번째 직장은 광고회사였다. 언급한 그의 이력만을 간추려보더라도 자연, 첫사랑, 영상미라는 3가지 키워드가 추출된다. 그리고 이 세 키워드가 결합된 <가을동화>와 <겨울연가> 등은 인화성 높은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최고의 효과를 가져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환기시킨다.

홍: 드라마에서 조연출 맡았던 작품들은?

: 조연출할 때 드라마에서 제일 신났던 건 예고 만드는 일이었어요. 조연출 할 때는 거의 뒷받침하는 일이기 때문에 본인의 재량권이 많이 없잖아요. 하지만 예고 만드는 건 달랐어요. 예고는 절대적으로 제 일이였거든요. 저는 쇼 파트에 일해서 편집을 할 줄 알았는데 드라마는 편집자가 따로 있더라고요. 동기들은 잘 안 해봐서 편집을 못했는데 저는 쇼 파트의 경험이 있으니깐 선배가 찍은 작품에서 여긴 어떤 음악을 넣을까? 어떻게 편집을 할까? 고민했어요. 전에 ‘팝콘’ 곡을 써서 편집하기도 했어요. 음악과 영상을 매치시켜서 영상가요 편집 할 때 많이 했던 일이었어요. 그래서 예고 만드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예고 좋더라’ 얘기 들으면 신났고 하여튼 자기 것을 스스로 창조해 내는 기쁨이 컸어요. 옛날부터 시도 한 번 써 봤지, 작곡도 한번 해봤지. 자기의 어떤 걸 창조해내는 것이 신이 났죠. 근데 드라마는 그게 다 포함돼 있었어요.

: 종합예술.

윤: 네, 그렇죠. 드라마에서 제일 힘든 건 작가죠. 작가는 같이 가야 되니깐. 작가역할은 워낙 크니깐 그게 딜레마죠.

홍: 2000년도에 영국 가는 비행기에서 <TV문학관> ‘은비령 가는 길’을 틀어주더라고요. 보면서 저 작품의 그림만 보는데도 독특한 거예요. 알고 보니깐 윤석호 PD님 작품이었어요. 그때부터 윤 PD님이 영상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나 문법을 가지신 것을 알게 되었죠. (웃음)

윤: 그냥 뭐 그거죠. 저도 몰랐죠. 아시다시피 조연출할 땐 ‘내가 과연 연출을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하죠. 첫 작품으로 드라마게임에서 <우리시대의 사랑법>이라는 작품을 했을 때 사람들이 MBC 드라마 같다고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아 <느낌> 때 그랬구나! <느낌>도 사실 KBS적이지 않았거든요. 동아일보에서 ‘KBS가 뭐 두꺼운 갑옷을 벗다’ 뭐 이런 표현을 썼는데, 사실 조금 그래서 ‘아, 내가 개성이 있나보다’ 나중에 알았죠. 그땐 몰랐어요. 방송을 통해서 자기의 콘텐츠가 나오면서 평가를 받고 그들을 통해서 저를 알게 되죠.

그 전에는 수줍고 내성적이고 여성적이고 그런 것들이, 마초적인 한국 세계에서는 약간 힘들잖아요? 그런데 드라마 쪽에서는 ‘차별성이 있네’, ‘독특하네’, ‘유니크하네’ 이런 쪽으로 위안을 받기 시작했어요. ‘아, 그럼 내가 가졌던 콤플렉스가 오히려 소중한거다’를 느꼈죠. 그래서 다른 영향을 안 받고 저를 관리할 수가 있었어요. 어쩌다보니깐 계속 관리하고 제가 좋아하는 걸 추구했던 거 같아요. 초반 진입할 때 개성을 인정 받고 ‘내가 계속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아간 거 같아요. 그러다가 한류까지 보탬이 되니깐 ‘아! 이거 정말 기쁜 일이구나’(웃음)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그래도 ‘너무 안주하는 거 아닌가?’ ‘그런 정신은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표현이나 완성도 측면에서는 뭔가 새로운 게 있어야 하는데’라는 반성을 하면서 모색을 하고 있어요.

현장에서 몸으로 느끼는 감각을 중요시

홍: 스스로 생각할 때 본인이 창의력이 있다고 생각하시죠?(웃음)

: 글쎄요, 창의력……. 그러니깐 촬영 나갈 때 ‘그분’이 오실까 이런 농담 많이 해요, 스태프들한테 그리고 조연출한테도. 나한테 안 좋은 소리하지 마 제발. 왜냐면 자유 자유에서 상상력이 있거든요. 배우들도 항상 김혜숙 씨나 정동환 씨나 이런 배우를 쓰는 게 나이 든 배우들은 되게 어려워요. 나이든 배우가 스케줄을 조정한다든지 나보다 나이 먹고 어려운 배우들에 너무 신경 쓰는 순간 창의력이 떨어지잖아요. 그래서 제가 신인을 많이 쓴 거예요. 신인을 쓰면 제가 자유롭죠. 왜냐면 이 친구들은 ‘뭐든지 시켜주세요’ 이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즉흥적이든가 감정적이든가 그런 걸 되게 좋아하는 편이에요.

: 현장에서 몸으로 느끼는 거?

윤: 네, 이를테면 가장 큰 특징이 비주얼적인 측면을 탐닉하는 편이예요. 시각적인 측면 색감과 구도와 이런 어떤 것. 첫 커트가 공간설명 샷이라고 해서 풀샷을 많이 쓰잖아요? 풀샷을 잡을 때는 공간에 인물의 위치와 공간에 대한 정보를 주는 커트인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회화적으로 잡기를 좋아해요. 딴 거는 심리가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넓은 장면 같은 경우엔 정서가 들어가니깐 카메라렌즈가 붓이고, 캠퍼스다, 그래서 그때 풀샷을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풀샷을 통해 구도나 장소, 이런 거는 개인적인 탐닉이죠. 그렇게 찍든 안 찍든 드라마에서 큰 상관이 없는데, 나르시시즘, 자기만족적인 측면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창의력이라 볼 순 없지만 남과 다른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카메라에서 트리밍이거든요. 우리 눈은 다 열려 있잖아요? 거기서 카메라 위치를 어디다 둠으로써 망원렌즈로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자기의 시선이 느껴지는 거죠. 그런 거에 도움을 좀 받은 것 같아요.

아까 기내에서 봤다고 그랬지만 그런 데에 집착을 하는 편이고 심리, 대사보다도 몽타주 씬(장면)을 좋아하는 편인데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서 몽타주가 지루한 시대가 되었지만, 제가 아까 얘기했다시피 쇼 파트나 CF쪽에서 느꼈던 게 이미지의 힘이 굉장히 대단하다고 한 번 맛 봤거든요. 그래서 드라마할 때도 그런 걸 좀 넣었어요. 슬픈장면 하면 음악을 넣고 약간 회화적인 것과 표정과 지금의 뮤직비디오의 전신이죠. <내일은 사랑>할 때랑 <느낌>때 많이 넣었죠. 뮤직 몽타주 같은 게 제 스타일처럼 되었고 또 현장에서 창의력 같은 것들은 뭐 이를 테면 <가을동화>같은 경우 동화라는 제목을 썼을 때 그게 굉장히 힘이 됐어요.

뭐든지 저는 키워드가 되는 뭐든 화두가 되는 그런 걸 제목으로 가졌었거든요. 아 이번 얘기는 잘못하면 신파다, 애들이 바뀌었는데 나중에 사랑을 한다, 남매 같은 애들인데 연인이 되었다, 심플하잖아요 내용이. 16부작으로 갈 수 있을까? 작가가 은서, 준서를 병원에다 넣고 은서가 간호사고 준서가 의사고 병원장 딸하고 결혼할 거고 거기서 만나서 병원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많이 터지고, 아 동화를 만들고 싶은데 병원에서 동화가 가능할까? 이게 부딪쳐서 헌팅 하다가 폐교를 발견해서 난데없이 작가한테 “폐교로 가자”고 제안하고 이런 것들이 창의력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자기가 갖고 있는 이미지의 선, 일관성 그걸 주장하는 거죠. 그래서 작가가 ‘아니, 폐교에서 무슨 사건을 쓸 수가 있느냐?’ 저는 ‘이 이미지가 맞아’ 그런 고집이 있는데, 하다 보니 되더라고요.

홍: 그때 작가가?

윤: 아, 오수연 씨. <느낌>때 같이 했던, 그래서 결과적으론 더 잘됐던 거 같아요. 병원으로 하면 동화가 안 되죠. 뭐 다른 드라마랑 대동소이하고 차별성이 떨어졌을 텐데. 그때그때 느끼는 디테일 같은 게 좀 있죠. <겨울연가> 때도 일본 사람들이 대단하게 봐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별장에 둘이 있을 때 최지우 씨가 늦게 깨서 본 우유 잔에 티슈가 덮여져 있는 장면을 보았어요. 대본에는 그렇게 디테일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면 이 남자의 사랑의 따스함 이런 걸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여자들이 그 장면을 많이 얘기해요. 되게 디테일한 게 좋았다, 먼지가 안 들어가게 배려해주는 그 마음이 좋았다. 그런 것들도 뭐 그때그때 찍을 때 크게 좌우되는 건 아닌데 큰 골격은 어쨌든 작가가 많이 잡는 거고, 표현하는 거는 제 몫이죠. 이를테면 <겨울연가> 때도 ‘담을 넘어간다’ 하면 배용준 씨가 지각해서 등을 밝고 담을 넘어가는데 신발을 이렇게 신겨주는 장면이 되게 재밌겠다 생각했죠. 대본에는 그런 지문이 없어요. 그냥 담을 넘어갔다죠. 근데 현장에서 찍다보니 신발을 신고 등을 넘어가진 못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신발을 벗고 얘는 올라가서 담에 앉았는데 어떻게, 그럼 신발을 신겨줘야죠. 신겨줄 때 클로즈업을 해요. 개인적으로 남자들마다 기호가 다르지만 저는 목 뒷덜미하고 발목라인을 좋아해요. 그 곡선이 참 예뻐요. 그런 걸 클로즈업을 해주면 그 영상적인 힘이 생기죠. 그것도 CF같은 데서 쓰이는 이미지죠. 작가가 거기서 그걸 보고서 그 다음에 작가가 쓰는 거죠.

이를테면 공항에서 어떤 꼬마가 신발을 떨어뜨린다, 그걸 신겨주면서 옛날 생각, 기억상실증이니깐 그런 게 되고 그리고 웨딩 옷 입으러 간대서 또 그런 장면이 반복되면서 나오죠. 계속 어떤 창의적인 셔레이드(Charade)가 계속 보태지면서 풍부해지는 거죠. 그런 경우들이 있죠. 로망스 같은 경우에도 <가을동화>에서 다 아는 노래지만 그게 라디오에서 우연히 운전하다가 들어요. 로망스가 나온 영화의 제목이 <금지된 사랑>이잖아요 드라마하고 잘 어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게 직관 같은 거죠. 그래서 그 부분 썼는데 잘 맞았던 거 같아요. 그런저런 것들이 ‘그분’이 오셔서(웃음)…….

▲ <사랑비> 포스터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윤석호 PD. ⓒ강의정
방송사 다닐 때 윤석호 PD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가 매우 섬세한 감성을 지녔으며, 연출에서도 디테일에 천착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화가처럼 모자쓰기를 즐겨했고, 녹화 때 소품이 맘에 들지 않아 자신의 집에 있는 그림이며 소품을 직접 가져와서 촬영하고, 출연자 의상이 맘에 안들 때는 자신의 옷을 입힌다는 것이었다.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없는 그의 연출력에 경외감이 들었고, 이는 많은 PD들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디테일한 연출이 섬세함을 중요시하는 일본 시청자에게 크게 호소했을 것이다.

'글자로만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로 창조하는 사람'이라는 책을 쓴 토머스 웨스트는 많은 과학자들이 이미지로 사고하는 상상의 눈을 가진 덕분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전자기력선의 개념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기장의 개념을 도입한 패러데이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물질처럼 실제적으로’ 볼 수 있었다. 패러데이는 일반적인 수학적 방법론과 달리 전체에서 시작해 분석을 통해 부분으로 도달하는 방식을 즐겨했다고 한다. 이른바 직관을 통한 통찰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윤석호 PD도 이미지로 사고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이 확실하다.

: 다중지능 쪽에선 이미지로 사고하는 능력이나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이야기합니다.

윤: 그런 게 있어요. 제가 한 장소를 보면 장소가 나한테 말을 건다, 나한테 스토리를 이야기 한다, 그런 게 있어요. 그 장소에서 꼭 찍고 싶다. 이를테면 청산도 갔다가 보리밭을 보고 나서 ‘아 보리밭, 숨바꼭질, 숨으면…….’ 보리밭이 5월 어버이날 쯤, 무게가 있을 때 움직이더라고요. 그때 막 그 콘셉트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죠. ‘숨바꼭질’, ‘보이지 않아도 있다’, 화두 ‘사랑은 보이지 않아도 있다’, ‘이 친구들이 헤어지지만 결국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하면서 청산도가 그들의 사랑의 시작인 장소다, 숨바꼭질도 시작이 되는.

홍: 중요한 모티브가…….

윤: 그렇죠. 청산도 보리밭에서 시작되는 테마가 떠오르는 거죠. 숨바꼭질 장면을 찍고, 성인이 되어서는 유채꽃밭에서 이렇게 서로 확인하는 과정을 겪고, 엔딩까지 다 생각해 놓는 거죠. 여기서 나중에 살면서 둘이 만나면 좋겠다, 그 장소 보고 이미 엔딩 신까지 생각이 드는 거죠. <가을동화> 때도 헌팅 다니다가 속초에서 갯배를 보고서 ‘야! 저거 참 신기하다’ 라고 생각했죠.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배 신 같은 경우에는 촬영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정상적으로 못 찍잖아요. 그래서 타이틀 찍는다고 배우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갔어요. 대본도 아직 안 나온 상태였는데 서로 스쳐지나가는 오빠와 동생 그런 게 필요했어요. 그래서 갯배에서 하루 종일 찍었어요. 그 때는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긴 전이니 하루 종일 찍어도 되니깐 그렇게 했어요. 그걸 찍어서 작가한테 보여주고 “이거 넣어 달라”요구했죠. 그렇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공간에서 중요한 의미를 두고 만나는 걸 좀 많이 넣는 편이죠.

헌팅 다니면서는 하이라이트가 되는 이미지를 많이 생각해놓아요. 그러니깐 다 CF 일을 하면서 영감을 받은 측면이죠. 아시다시피 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그런 게 좀 너무 크다, 영상에 대한 욕심이 그게 너무 크면 스토리를 침해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과욕을 부린 경우에 대해 저도 알아요. 후배들 작품 보면 오버하는,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 자신도 절제하면서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죠. 그래도 어쨌든 제 특징은 스토리텔링만으로 성공하기는 싫어요. 그건 좀 재미없어요. 그러니깐 스토리텔링의 효과를 감성적 커뮤니케이션으로 포장해서 사람들이 더 흡수가 잘 되게 하는 나만의 시선 같은 것들이 포함된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러기에는 역시 사랑 얘기를 하는 거죠. 요새는 뭐 정의, 돈에 대한 드라마들이 많잖아요. 그런 드라마들은 영상미를 추구할 이유가 없잖아요. 사랑얘기가 그러기에 저와 잘 맞는 거죠. 저의 감성적 소구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까요.

윤석호 PD는 스토리텔링 이른바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부류의 드라마와는 달리, 영상미를 통해 감성적으로 소구하는 자신만의 드라마를 고집하고 싶어 한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5가지만 알면 나도 스토리텔링 전문가’의 저자 리처드 맥스웰, 로버트 딕먼에 따르면 스토리 즉, 이야기란 하나의 사실을 감정이라는 포장으로 감싼 것이다. 즉 ‘스토리=사실+감정’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따라서 감정으로 포장하지 않은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윤석호 PD가 견지하는 감성적인 사랑이야기야말로 스토리텔링의 원단이 아닌가? 다만 문제는 사실이고, 사건이며, 행동과 우발적 사고가 아닐까? 따라서 이야기는 생각의 내용일 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이다. 그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통해 한류를 소비하는 세계인은 하나의 정신세계를 공유하게 되었다.

홍: 일본에서 상을 많이 타셨더라고요. 키네마준보상 등.

윤: 키네마준보상이랑 NHK 그리고 일본 방송 어워드에서 수상했어요. 세 개 받은 거 같은데요. 당시 일본 NHK 위성방송을 통해 처음 방송이 나가고 나서 관계자들이 팬레터가 많이 온대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생각했어요. 위성방송 끝나고 지상파 방송 할 때 최지우 씨랑 같이 일본에 갔는데 그때 공항과 기자회견장에 수백 명의 기자가 몰려 플래시가 막 터지는데 너무 놀랐죠. “이 정도야?” 하고 그 이후에 계속 놀랐죠. 택시운전사가 알아보고 식당가도 알아보고 재일동포 할아버지도 제 손을 잡기도 했어요. 자기 생전에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고맙다. 정말 숙연했죠. 그런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죠.

상 받은 것도 워낙 많은 사건들 중에 하나여서 그 흐름 속에서 이게 고마운 줄 모르고 시간이 흘렀어요. 정말 인터뷰는 물론이고 <겨울연가> 콘서트 행사 등도 굉장히 많았어요. 초기에 1~2년 동안 저도 정신없이 행복한 체험을 했어요. 그게 (지금에서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어요.

제가 그전엔 한국에서 한국시청자들만 생각하고 작품을 만들었다면 (<겨울연가> 히트로)일본이 너무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어쨌든 팬들이 그쪽에 많다보니 작품 기획할 때도 의식하는 거 같아요. 그게 <사랑비>까지 이어졌던 거 같고 일본에서는 계속 그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우리 트렌드가 워낙 진화하니깐 그 트렌드를 흡수하면서 일본까지 포함하는 것이 내가 가진 능력으로는 되게 벅찬 거죠. 그런 또 부정적인 측면이 있더라고요.

홍: 일본의 과열된 반응 때문에 거기에 고무됐고 그거를 무시할 순 없었다는 얘기인가요?

윤: 그쪽(일본)에 계속 유지하고 싶고 팬 관리 하고 싶고(웃음)

: 한국은 또 새로운 변화가…….

윤: 일본은 특성이 좀 있잖아요. 모든 면에서 좋아하면 꽤 오래 지속되죠. 그에 비해 한국은 굉장히 새로운 변화를 좋아하죠. 콘텐츠 만드는 입장에서 변덕이 심하다고나 할까요(웃음).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좀 더 이쪽에 신경을 나도 모르게 쓰는 측면이 있어요. 또 군대문제나 일본문제나 감정적으로 흐르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조심합니다. 어쨌든 이웃나라가 서로 윈윈(win-win)할 게 많은데 너무 안타까운 거죠. 어쨌든 <겨울연가>가 그런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약간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저도 그런 측면에서 계속 역할을 해 나가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에도 통하는 작품을 만들어서 계속 교류가 됐으면 하는 측면이 있는 거죠.

홍: 많은 정치인도 얘기했지만 <겨울연가>는 정말 어느 정치인이 하지 못한 한국에 대한 특히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바꿨지요

윤: 그래서 커밍아웃 한 사람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일본인인 것처럼 살다가 ‘나 재일동포다’라고 떳떳하게 말한 거죠.

홍: 그게 얼마나 큰 희망을 준건지.

윤: 그렇죠, 저도 뭐 복 받은 거죠.

홍: 그 큰일의 주인공이 되셨네요(웃음).

윤: (웃음) 그러니깐 인생이 어느 날 깨어보니깐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 것처럼 저도 뭐 일본 의식하지 않고 살았어요. 사실 우리는 일본이 드라마나 영화나 여러 가지 콘텐츠 면에서 우리보다 앞서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잖아요. 일본 측이 제 작품을 수입한다 했을 때도 창피당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작품을 만들 때 (그들을)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우리의 자긍심도 느끼게 해주고 자신감도 갖는 그런 계기가 된 거 같아요. 그래도 항간에 얘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겼다 만세다’ 뭐 이런 약간 유치한 도식적인 판단을 하는 언론이 있는데 그런 건 아니고 우리도 그 쪽을 좋아하고 그 쪽도 우리를 좋아할 수 있는 거죠. 교류니깐. 문화는 누가 먹고 먹히냐의 측면이 아닌 데 말이죠. 하여튼 그런 물꼬를 트기 처음 시작한 거에서는 의미가 있는 것 같고요. 약간 책임감도 있다고 생각해요

홍: 드라마 PD로서 기억하실 텐데 1990년대 초반까지 방송사에서 일본의 콘텐츠나 드라마를 많이 참조 했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본 것을 안 봐도 되는 시점이 생겼는데 아마 그 역할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웃음)

윤: 예전에 예능 파트에서 부산 내려가서 일본 방송을 본다든지 드라마국의 경우 일본유학 갔다 온 선배들이 아이템 같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오는 그런 풍토가 많이 있었죠. 근데 그게 줄어들긴 했는데 사실 그게 다 다양성인 것 같아요. 일본드라마는 일본문화 자체가 그런 것인데 솔직히 털어놓진 않잖아요. 자꾸 은유하고 대범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많이 한단 말이죠. 대신 디테일은 강한데, 우리는 풀어야만 살 수 있잖아요. 가슴앓이 하면 홧병 나서 충돌하고 풀고 오히려 우린 싸우면서 친해지는 문화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선 우리가 더 에너제틱하고 자기네들이 해소하지 못하는 것을 해소시켜주는 측면이 있어요. 시어머니한테도 할 말 다하고 일본 같은 경우엔 상상도 못하죠. 남편한테도 할 말 다하고 그런 측면이 문화적인 차이입니다.

일본 드라마를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나라 사람도 있겠지만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좋아하는 것 같고. 그게 비율이 어느 쪽이 더 많은 지는 데이터로 확인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일본 쪽이 한국 드라마를 더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요. 우리가 좀 굉장히 경쟁적이에요. 우리 사회도 그렇지만 드라마도 편성에서도 치열하죠. 치열한 경쟁을 거치고 점점 더 많이 그런 게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거 같아요. 일본은 기무라 다쿠야가 아직도 드라마 주인공을 하는 것처럼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으니깐 그렇게 하는 거 같고, 그런 점에서는 우리의 장점이 분명히 있는 거 같아요.

작품 연출 몰두 위해 회사 규모 줄여

▲ 인터뷰를 하고 있는 홍경수 교수(왼쪽)과 윤석호 PD. ⓒ강의정

홍: 여러 가지 얘기 많이 해주셨는데 김종학 PD님이 돌아가셨는데,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

윤: 그때 제가 사실 일본에 있었어요. 일본의 <사랑비> 찍은 장소에 고마움을 표하러 관계자들을 만나러 갔어요. 우리 직원이 며칠 지나서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하여튼 저는 개인적인 친분은 없어요. 그 분은 초반에 고생을 많이 했죠. 연출자로서 프로덕션 경영을 누구도 하지 못했던 고생을 맨 처음에 앞장서서 초반에 많이 했어요. 제가 한류 때문에 후배들한테 욕을 많이 먹는 측면이 있는 게 우스갯소리로 한류가 산업이 됐어요. 이게 파이가 커진 거예요 할리우드처럼. 외국에 비싼 값에 팔리니깐 돈이 되잖아요. 너도나도 펀드나 어디에서 돈들이 모이는 거죠. 제작비가 쌓이니깐 작가료 올라가고 출연료 올라가고 그런 거예요.

김종학 선배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감독이기 때문에 CG 제대로 넣어서 효과적으로 제작하고 많은 배우들과 엑스트라를 방송국 있을 때와 똑같이 투입했던 거죠. <태왕사신기>가 결정적이었다고 봐요. 그러니깐 경영자와 연출자의 밸런스가 깨져서 그걸 만회하기 위해 <신의> 할 때도 무리하게 했죠. 왜냐면 자존심이 있거든요. 프로그램으로써 사람들에게 대단한 파급 효과를 준 선배고, 후배들에게도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스타일이잖아요. 굉장히 저돌적이잖아요.

그게 돈이라는 시스템에 걸려서 배우들 많이 줬을 거고 이런저런 고소 건도 있었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그걸 들으며 굉장히 힘들 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결국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 같아요. 저는 그렇게 봐요. 김종학 씨도 검사를 만났을 때 모멸감 같은 걸 받지 않았을까 유서에 쓸 정도니깐 그런 게 굉장히 힘들지 않았을까. 제 판단이지만 결국 (한류)초창기 시스템과의 불협화음에 따른 희생양이랄까? 경영하랴 작품하랴. 저는 작품 하려고 회사를 개인 프로덕션으로 확 줄여버렸고 ‘작품이 행복이다’라고 생각하며 욕 안 내고 있어요. 경영은 그 언저리까지 가봤잖아요. <눈의 여왕>이라고 이형민 후배 PD 데리고 말이죠.

홍: 아 그거 제작하신 거예요?

윤: 네 윤스칼라에서, 그 때도 외부투자를 받았는데, 손해를 봤는데 (투자자들이)‘원금을 돌려 달라’ ‘고소한다’ 그랬어요. ‘내가 스트레스 받으며 왜 살지?’ 이런 생각 들면서 그 다음에 <사랑비> 할 때도 초반에 돈이 필요한데 돈대겠다는 쪽도 있었는데 하나도 안 받았어요. 제가 하나도 안 받고 제 통장에 있는 돈 써서 배우들 출연료 선지급 하기도 했어요. 다행히 일본에 잘 팔아서 회복을 했지만, 결국엔 비즈니스라는 게 남들은 돈을 더 달라하고 저는 덜 줬으면 좋겠고 대신 더 받았으면 좋겠고 거기선 줄 것도 안 주려하고 그런 돈에 얽힌 것들이 싸움을 불러일으키더라고요.

이게 그런데 신경 쓰는 거보다도 소설 읽고 이 장면을 어느 장소에서 찍을까 어떤 음악을 넣을까 이런 게 행복한 거거든요.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회사를 만드니깐 그런 게 줄어들더라고요. 그래서 ‘아! 그럼, 만석꾼보다 천석꾼이 되자’해서 작품 하나에 맞는 구조를 갖추려고 카페도 하고 전시장도 운영하고 뭐 그런 정도 하면서 수익구조를 유지하고 있어요. 저는 기획만 할 수 있게 그렇게 구조를 만든거죠.

그러니깐 뭐 여러 작가들 데리고 회사 운영해서 겉보기엔 번지르르 해 보일 수 있지만, 삶의 목표가 중요하니깐 저는 그런 거예요. 애초에 ‘윤스칼라’라는 이름도 제가 좋아하는 로맨틱한 드라마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로 하고 싶어서 만든 건데 아직은 다작은 못하니깐 어쨌든 그런 걸 꾸준히 하고 싶어요. 뭐 상황에 맞춰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게 좋을 수도 있는데 저는 방송국 PD출신이라 그런지 PD도 작가주의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 개성, 자기 브랜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지 이게 좀 뭔가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의 프라이드지. 우리가 ‘찍사’는 아니거든요. 써준 대로 찍고 A,B,C 팀까지 나눠서 요 토막 요 토막 공장에서 조립해서 납품하는 이런 게 자존심 상해서, 그래서 난 그런 거는 지켜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자주는 못 하더라도 그런 걸 지켜나가는 작가주의는 지켜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대중매체니깐 예술이라 얘기 할 순 없고 많은 대중들이 볼 수 있는 영국의 ‘워킹타이틀’이라는 영화사에서 만든 <러브 액추얼리> 같은 따뜻한 뭔가 있잖아요. 보고나면 기분이 좋은, 뭔가 위로받는 거 같고 ‘참 세상 살만 한 데, 나도 저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하는 긍정적인 느낌이 드는 게 참 좋은데 우린 사실 그런 거 별로 안 만들잖아요. 충돌해서 분노를 표출하고 스트레스를 표출하는 걸 보면서 같이 표출하는(웃음) 그런 게 많으니깐, 그렇지 않은 것도 하나 좀 있어야 되지 않나 생각해요.

▲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겨울연가> 대본. ⓒ강의정
작가주의 PD와 작가와의 충돌 불가피

홍: 한 드라마 PD는 작가가 써준 대로 찍는다는 ‘찍사’ 얘기를 하더라고요 . 아까 얘기하셨지만 드라마 PD로서 작가들의 힘이 요즘엔 워낙 커서 PD가 좋은 작가를 만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은데 그것에 대해 말씀을 해주세요.

윤: 어 그게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서 저도 사실은 드라마가 참 많이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까도 잠깐 얘기했지만 한류를 통해서 산업화가 되니 프로덕션을 차리고 돈이 들어와서 그 돈으로 방송사 편성을 받으려니까 유명작가 아니면 편성을 안 해주잖아요.

왜냐면 우리가 사전제작이 아니니깐 경험이 없는 작가는 안 돼요. 검증이 된 작가들만 방송사에서 편성을 해주거든요. 그 다음엔 배우, 연출은 뭐 많이 있으니깐 제작자로서는 딴 데 다 쓰고 방송사 피디 쓰면 외부 PD 쓰는 거 보다 비용절감이 되니깐 그러니깐 방송사 피디들도 자기가 기획한 게 아니라는 거죠. 프로덕션이 기획해놓고 작가도 거기서 같이하고 방송사PD들은 월급쟁이다 보니깐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하죠. 또 작가가 프로덕션을 통해 ‘PD 바꿔달라’ 하는 그런 구조이기도 하고, 저 같은 경우도 <겨울연가> 때 배용준 씨가 받은 돈의 세 배, 최지우 씨의 네 배, 작가의 네 배를 받았어요. 제 연출료로. 그런데 지금은 저는 거의 그 수준이고 배우나 작가는 지금 엄청나게 올랐죠. 특히 미니시리즈 작가는 회당 4000만원 까지나 올라갔으니깐. 자괴감과 대접받지 못한 억울함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있어서 제가 제작자로서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큰돈 주고 연출하고 싶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봄의 왈츠> 때 신인작가, 신인배우 썼죠.

비즈니스 이윤만 생각하면 이걸 줘도 그만큼 벌기 때문에 그럴 텐데, 방송사 드라마국에서 그 과정을 봤기 때문에 ‘작가들에게 뭐 이렇게 돈을 많이 줘야 되는 거야?’ 그러면서도 끌려가잖아요. 일본은 배우들과 계약하면 일주일에 몇 시간 촬영할 지 정해놓거든요. 우리는 배우들한테 정해놓자 하면 ‘안 해’ 그러고 말지. 왜냐면 그쪽이 더 갑이 되어있으니깐. 그런 디테일한 얘기를 안 하고 하니깐 스케줄 때문에 끌려 다니게 되고 짜증나고 그래요. 그래서 하여튼 드라마가 제가 한창 할 때보다 상황이 많이 악화되었어요. 돈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모든 게 돈이 원인인 거 같아요.

좋은 작가를 만난다는 건 더 어려워요. 근데 좋은 작가들이 저를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아요. 왜냐면 저도 작가주의거든요. 작가가 써준 대로 못 찍어요. 내가 느껴야지 찍는 거거든요. 감정이 이해가 안 되면 전 그렇게 못 찍어요. 제가 그렇게 이해되면 전 그렇게 찍을 거예요. 근데 잘 쓰는 작가는 충돌해요. 두 명이 그런 적이 있었어요. 초기단계에서 깨졌는데, 저는 그 부분에서 고집이 세요. 왜냐면 이 작품은 내 작품이란 말이죠. 저는 그냥 작가가 쓴 걸 찍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프라이드를 갖고 살았는데, 그 위상이 커졌다고 해서 내가 꼬리 내리고? 저도 <겨울연가> <가을동화> 한류의 어떤 그게 있는 입장이다 보니 쪽팔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돈 벌겠다고 비위 맞춰가며 할 생각이 없거든요. 신인작가는 오랫동안 봐야 되고, 제가 윤석호라 해도 대본이 다 나와야지 방송이 되지 신인 작가는 못 믿거든요.

그러니깐 그게 되게 어려운거 같아요. 이를테면 그런 방법은 있어요. 연출자로서의 욕심이 크기 때문에 협업관계, 저랑 <겨울연가> 같이했던 팬 프로덕션이 지금은 메이저가 됐잖아요. 회장이 매번 저한테 이번에 작가가 쓴 건데 하라며 <해를 품은 달>도 저한테 하라는 거 제가 안 한다고 했었는데 (웃음) 그런 식으로 중간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방법도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지금은 뭐 드라마보다는 영화 쪽이 새로 도전하는 장르죠. 신인감독으로서 영화 쪽에선 신인이니깐.

홍: 한국에서는 영화 쪽 제안이 없었습니까?

윤: 한국에선 없었어요. 만나긴 했는데 이런 거 저런 거 묻더니 그 뒤로 연락이 없어요. 아! 영화 제안이 <겨울연가>가 한 번 있었구나.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성공하고 있을 때 CJ에서 영화를 만들면 어떠냐고 했어요. 그거는 상업적인 측면이잖아요. 일본에서 했던 걸 또 하는 거는 굉장히 많아요. <꽃보다 남자> 드라마가 있으면 영화도 되고 일본에선 되게 정상적인 거거든요. 근데 우리나라는 ‘에이 저거 한 번 되니깐 본전을 뽑으려 기댄다’ 그런 게 좀 있잖아요. 지금도 그래요. 제가 만든 배용준 이미지 최지우 이미지가 강한데 누가 해도 그만큼 못 할 거 같거든요. 그리고 또 할 이유도 없고.

근데 우리 한국에선 방송과 영화 장르간 스와핑이 잘 안 되잖아요. 영화인들은 방송인들을 약간 비교육적이다 그렇게 보고 방송 쪽에선 영화 쪽에 갔다가 별로 그쪽에서 평가도 좋지 않고 넘나드는 게 좀 보수적인 거 같아요. 한국에서 하고 싶은 영화 아이템이 있긴 한데, 제가 하는 것들은 약간 환영받지 못하는 멜로 같아서……. 상업적인 측면보다는 작가주의적 측면으로 트렌드에 맞춰서 아웅다웅 살고 싶은 생각보다는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은 그런 걸로 하고 싶죠. 홍상수씨 같은 경우가 참 부럽죠. 자기가 생각한대로 영화 참 쉽게 찍는 거 같지만 재밌고 아이덴티티가 항상 유지되면서 골수 팬들 유지하면서 진짜 작가죠.

: 한류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나요?

윤: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어떤 소스랄까요 원액 DNA 그런 개념에서 가무를 즐기는 민족이었고 지나간 역사 속에서 한과 정과 어떤 그런 아픔 희로애락에 대한 스펙트럼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죠. 약간 무속적인, 논리적인 거보단 감정적이고 이런 어떤 뜨거운 것들이 있단 말이죠. 사전 제작을 안 하는 우리 콘텐츠가 힘이 있는 게 에너지가 있어서 그래요. 겁도 없이 방송 한 주 전에, 촬영하죠. 일본에서 중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전부 거의 죽기 살기로 모든 에너지가 쏟아지는 거거든요. 그 모든 에너지의 합산이 되는 거거든요. 그 에너지가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 기질이 뜨거운 기질이 있어요. 단 문제점으로 얘기하는 게 그런 뜨거운 콘텐츠는 만들 수 있는데 콘텐츠를 글로벌하게 마케팅하고 연결하는 에이전시가 아직도 우리는 촌스러워요.

홍: 유통이.

윤: 네 그래서 사람들이 약간 문화교류란 측면이라든지 이런 거에 대해서 되게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매니저들은 항상 바뀌니깐 자기가 하고 있을 때 한 몫 벌려는……. 그리고 배우들 자체도 뭐 ‘호텔 한 층을 다 빌려 달라’ 일본인들은 ‘무슨 할리우드냐?’ 이런 식으로 픽픽 웃어요. 저는 일본 왔다갔다 하니깐 일본의 소리를 듣거든요. ‘약간 세련되지 못하다’ 걔네들도 돈이 되니깐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노는 게 촌스럽다’ 이렇게 말해요 (웃음).

근데 어쨌든 원론적으로 콘텐츠를 잘 만들 수 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래서 나라에서는 매니저들을 자격시험을 보자,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이게 국가 망신적인 측면도 많으니깐. 근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콘텐츠를 만드는 실력은 여전히 좋으니깐. 저는 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좀 더 세련되어지지 않을까? 우리 경제가 갑자기 발전하는 바람에 다른 여러 가지 부분이 같이 못가다 보니깐 ‘국격이 떨어진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듣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우리의 문화에서 나타난 건데,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란 생각합니다. 잘 만드니깐.

▲ 홍경수 교수. ⓒ강의정

한류의 한 가운데서 한국의 콘텐츠가 유통되면서 생겨난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그는 촌스러움을 지적했다.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며, 한몫 잡으려고 하는 태도가 연기자와 매니지먼트 등 에이전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박한 태도가 한류를 국가 간의 교류가 아니라 수익창출의 수단으로 보게 만들고, 상대 국가에서는 경제 및 문화침탈로 받아들여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류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걸까? 모든 것을 이기고 지는 승자독식의 논리로 보는 일종의 집단도취는 아닐까? 그의 비판적인 시각은 한국의 속칭 막장 코드에까지 이어졌다.

“공영방송 드라마, 품격을 지켜야”

윤: 최근 일본 영화사에 갔더니 그쪽 관계자가 ‘일본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품을 부탁합니다’ 그러더라고요. 걔네는 ‘간바레(힘내라)’ 그런 게 있잖아요. 패전하고 나서 형성된 거 같은데 드라마도 보면 교훈적인 내용을 많이 이야기해요. ‘갑자기 이러면 안 되잖아!’ 하면 숙연해하고 그런 장면이 꽤 많이 나오는데 저는 그런 가치도 좋다고 보거든요. 우리처럼  막장이라는 측면이 너무 강해서 눈살 찌푸리게 하는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들은 ‘너무 거칠어서 한국드라마를 안 본다’고 말하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죠. 스트레를 받으면 김치찌개나 고추장과 같은 매운 음식을 먹잖아요. 그럼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우리 드라마가 그런 중독성이 있어 일본인들이 보는 것 같아요.

다양성 측면에서는 우리가 좀 많이 개선돼야 될 것 같아요. 시청률 위주로 하다 보니 전부 다 막장, 작가들도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지만 자꾸 막장으로 쓰면서 괴롭다고 하더라고요. 작가들도 그렇지 않으면 추락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고. 일본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은 드라마들이 있거든요. 정말 너무나 착한 드라마들도 있어요. 근데 재미는 없죠. 그런 측면에서 다양해졌으면 하는 그런 측면이 있어서, 저는 개인적으로 제 드라마는 순한 드라마인데 그런 영역 하나 좀 넣어주면 안 되나 생각해요(웃음).

일본에 구라모토 쇼라고 휴머니티를 그린 작가가 있는데 후지 TV에서는 그 작가 드라마를 항상 해줘요. 좋은 게 많거든요 정말 좋은. ‘저 민방에서 왜 저런 걸 하나?’ 볼 때 자존심이에요. 상업적인 것을 하지만 이런 것들을 할 때 ‘우리는 막 가지 않아, 이런 것도 해’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옛날부터 좋아했던 <TV문학관> KBS의 자존심을 지켰으면 좋겠어요. 그 워낙 KBS의 좋은 이미지였거든요. 그런데 돈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똑같이 상업방송처럼 그런 것들도 좀 아쉬운 거죠.

일본의 NHK가 대하드라마 항상 하면서 <료마 이야기>도 히트하고 그런 식으로 정신적인 측면을 의도적으로 하거든요. 대중매체 그런 것들이 물론 오락적인 측면도 하지만 계몽하고 고취시키는 알게 모르게 살짝 그러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 왠지 모르게 우리는 닭살스럽다고 말하죠. 쿨하다는 게 좋은데 약간은 가이드도 좀 해야 되지 않나? 방송의 역할이…….간혹 뭐 요새 <힐링캠프>나 <인간극장>이나 이런 방송 프로그램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 좋은데 드라마는 좀 부족해요 옛날에는 특집드라마 이런 게 있었잖아요, 두 시간짜리 2부작. 추석 때, 6.25때 전쟁과 휴머니티 그런 것들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다 없어졌죠. 일본에서는 아직도 특집 드라마를 해요, 좋은 드라마도 참 많이 나와요. 그런 측면들이 드라마가 완전히 오락적으로, 한류가 되면서 너무 상업적 측면으로 돼 버려서 그냥 방송사에서 돈 버는 게 드라마 파트가 돈 벌잖아요. 그쪽으로 다 몰려드는 거 같아요. 안타깝죠.

홍: 요즘 PPL 어떻게 보십니까?

윤: PPL, 아까 얘기했듯이 배우출연료나 작가료가 올라가니깐 어쨌든 프로덕션이 기획할 때 PPL을 골라서 작품에 녹이는데, 자본주의에서 그런 현상은 어쩔 수 없지만 저는 PPL을 안 받았어요. 뭐 카드에서 얼마 준다는데 카드 클로즈업 하는 게 두 번이 필요하다 이러면 저는 안 해요. 프랜차이즈 외식업체에서도 제안 오는데 드라마 내용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걍우가 있어요.(웃음) 제가 주인이기 때문에 고집을 피워도 되는데 다른 프로덕션에서는 연출자한테 돈을 주잖아요. 그럼 그 사람은 고용된 것이기 때문에 프로덕션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 된다는 거죠. 작가도 그렇고 그래서 그런 면을 비난 할 수는 없죠. 근데 저는 개인적으로 작품에 손상되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할 생각은 없어요. ‘배부르니깐 그렇지’ 라고 말할 텐데(웃음) 하여튼 그런 거죠.

홍: 사계절 시리즈(봄의 왈츠, 여름향기, 가을동화, 겨울연가)나 <사랑비>에는 PPL이 안 들어갔나요?

윤: 사계절에는 안 했어요. <겨울연가> <가을동화> 땐 KBS에서 한 건데 그때는 PPL이 아니고 그냥 차량에 원빈이가 부잣집 아들이니깐 BMW에서 신차가 나와서 차를 제공받았죠. 돈이 아니라.  <겨울연가>때는 미국 차였는데 에스케이프인가 그걸 했고 <여름향기> 때도 그랬죠. 차하고 핸드폰은 기본이니깐 그건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물건을 빌려주는 것이니깐 그 정도는 했어요. <사랑비>에선 주인공 윤아가 이니스프리 모델이거든요. 그래서 딴 화장품을 쓰면 안 돼요, 이니스프리랑 전속된 상태라. 그러니깐 자기 것만 써야 되요. 그래서 ‘너희가 돈을 내라 우리가 왜 그걸 쫒아가야 되느냐’ 작품에 딴 게 맞으면 딴 거 쓸 수 있는 거고 ‘너희 것 쓴다는 건 너희 것 홍보하는 거 아니냐?’ 그런 것들은 서로 타협을 봐서 받아야죠, 논리가 맞으니깐. 그래서 이니스프리 넣고 찍고 그랬죠. 클로즈업 잡은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최근 한국 드라마를 망치는 두 가지 요소가 막장과 PPL이라고 보인다. 외주 프로덕션을 활성화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PPL이 지상파 방송을 뒤덮고 있다. 도입취지가 무색해질 정도로 시청자들은 덕지덕지 붙은 광고상표와 흐름에 맞지 않는 상품광고에 주목해야 하고, 경제적 이득은 방송사와 프로덕션 그리고 광고하는 기업들이 얻고 있다. 시청자의 복지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PPL을 하지 않는다고 사시로 보기에 앞서 윤석호 피디의 작품에 대한 애틋한 집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정하기만 하면 왜 PPL을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없을까? 하지만 그는 PPL을 안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며, 이런 저런 조건 때문에 신경 쓰기보다는 영상미를 추구하는 데 골몰하기를 희망하는 순수파로 보였다.

설렘을 파는 순수한 오너쉐프

홍: 자 거의 다 끝났습니다. 많은 얘기를 해주셨는데요. 드라마 PD로서 사회적 역할 이런 걸 많이 생각하실 거 같아요. 워낙 큰 역할, 즉 한류를 여셨기 때문 아닌가요.

윤: 전체적인 드라마 PD의 역할을 제가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제가 드라마 PD로서 제 자신이 느끼는 것은 이래요. 우연히 감성적 커뮤니케이션을 말했는데 이게 결국 정서적 카타르시스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순화기능. 근데 세상이 결국 경쟁적이잖아요? 돈이라는 게 항상 끼어있고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충돌하게 되고, 거칠어지고, 목소리 큰 놈이 왕이 되는 이런 현실에서는 거친 부분을 인간이 겪어야한단 말이죠. 그래서 저는 <가을동화>도 그랬지만 동화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잖아요. 어렸을 때 동화책 읽으며 아름다운 상상을 많이 하잖아요? 뭐 신데렐라나 백성공주 얘기든 드라마를 통해서 그런 어떤 순화된다 그럴까? 위로된다 그럴까? 현실에서 고달프게 월급쟁이로서 살다가 드라마를 보면서 첫사랑 얘기 나오면 ‘아 맞아, 나 과거에 저렇게 두근두근 댄 적이 있었지’ ‘걔가 갑자기 생각나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게 굉장히 순화된다고 보거든요. 한쪽에선 풀어줘야 하는데 제 드라마는 좀 그런 측면이에요.

저도 대학원에서 신문방송 전공했잖아요. 그때도 어쨌든 TV는 공적 기능을 갖고 있으니까 영화처럼 돈 내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가족이 켜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긍정성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해요. 막장드라마도 그러니깐 마지막엔 결국 악인도 뉘우치죠. 그래도 눈살 찌푸려지고 그런 면이 있거든요.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제 드라마 경우는 순화기능이랄까, 사람들이 제 드라마를 보고 정서적으로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저도 좋고 남도 좋고 이랬으면 좋겠다 그런 거죠.

▲ 윤석호 PD ⓒ강의정
홍: 피스크라는 사람은 TV를 음유시인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예전에 여기저기 동네 돌아다니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들려주는 것이 TV의 역할이다라는 것이지요. 그럼 드라마 PD는 어떤 사람일까요?

윤: 자신의 시선을 타인의 시선으로 알게 되는거죠. 그러니깐 약간 이기적일 수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면 설레잖아요. 또 남을 통해서 남들이 설레는 걸 또 봐요. 그러면서 내가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는 사람. 그러니깐 나 자신도 성장한다는 거예요. ‘나 이 이야기 하고 싶어’ ‘이런 장치가 있어’ ‘캐릭터는 이래’ ‘아 안타까워 하지만 아름답다’ 이런 걸 내가 느끼잖아요. 그러면서 막 신나서 소통이 되는 거예요. 소통이 되면서 저 자신도 즐겁고 자기 존재확인적인 측면도 있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리액션을 통해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세상의 이치랄까 흐름이랄까 그런 것도 알게 되죠. 지금 굉장히 만연체로 풀어서 얘기했는데, 쉽게 말하면 ‘꿈을 파는 사람’ 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얘기를 하는데요.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들이 그거는 너무 진부한 표현 같지만 말이에요. 제 드라마의 특성이 리얼리티가 아닌 판타지적이고 로맨티시즘이 있고, 그리고 저는 망원렌즈와 근접렌즈 중에 망원렌즈 쪽이란 말이죠. 근접렌즈라는 건 맨 얼굴을 갖다가 바로 대는 거고 망원은 포커스오프를 시키고 밀도를 높이는 것이죠. 미술로 얘기하면 인상파들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볼 때 보이는 인상이라고 할까. 뭐 이런 얘기를 한 사람도 있는데 그거처럼 필터링을 하는 걸 좋아해요. 그건 뭐냐면 현실 그 자체보다는 현실처럼 가공해서 거기에 판타지를 끼워서 사람들에게 현실을 좀 잊으며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얘기거든요. 꿈을 준다는 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낭만적으로 그리는 것도 필요하죠. 그런 면에서 드라마 PD를 정의하긴 어렵지만, 저를 표현하면 ‘꿈을 판다’라고 할 수 있고, 그게 남이 많이 쓰인 말이라면 ‘설렘을 판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죠. 설렘이란 걸 되게 좋아해요. <겨울연가>가 일본 아줌마들한테 설렘을 가져다줬다고 하잖아요. 

홍: 도끼메끼(두근두근)?(웃음)

윤: (웃음)도끼메끼인가? 하여튼 드라마 보는 동안 되게 설렜대요. 그래서 또 다음에 보면 또 설레고 그게 너무 좋아서 배용준 사진을 사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서 또 설레고 쵤영 장소에 가서 다시 가서 설레고, 왜냐면 설렘이란 게 엔돌핀이잖아요. 되게 중요한 정서잖아요. 아깐 ‘꿈=설렘’이라고 했는데 ‘판타지=설렘’ 다 같은 건데 그런 거를 만들어서 나도 느끼고 상대방도 느끼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세상도 순화됐으면 좋겠고 그건 좀 거창할 수 있어서 얘기가 뭐한데 그런 사람들이 자꾸 많아지면 세상이 순화되는 측면도 있잖아요. 그런 측면이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고 콘텐츠의 목적이 될 수 있죠.

홍: 계속 나이 드신 후에 언제까지 연출을?

윤: 언제 정년을 할 것인지 거기에 대한 건 모색 중이에요. 결론이 아직도 안 났어요. 그러니깐 뭐 그런 생각도 해요. <가을동화> 촬영했던 그 폐교에 있던 아티스트가 떠나고 완전히 폐허가 됐어요. 그래서 전화를 했어요. 제가 살 수 있느냐 했더니 그 주민들 동네 초등학교 출신들이 자기네들이 하겠다고 했대요. 근데 돈을 못 모으는 거예요. 그 사람들 포기할 때까진 살 수 없는 거죠. 그 동네 주민들이기 때문에. 저는 그걸 사면 이를 테면 여기 있는 기념관을 그 쪽으로 옮기고 나무도 많이 심고 약간의 나의 낙원이랄까 로맨틱코드라는 것이 정원이라도 나무나 벤치나 원두막 같은 건 모든 게 다 그 사람의 그게 나오잖아요. 그 장소에 가면 약간 로맨틱하게 되고 연인들하고 같이 가기 좋은 장소, 속초나 설악산 이쪽에 많잖아요. 나이 들면서 나무 가꾸고 꽃 가꾸면서 가끔 그 동네에서 영상작업 했던 경험담 얘기해주고 (드라마) 스쿨도 좀 하고 뭐 그런 거도 잠깐 생각했었어요.

근데 그런 걸 하려면 사실 일찍 가야 해요. 힘 있을 때 먼저 가야되지. 70살 돼 가면 기력도 없고 그렇잖아요. 그 생각에 잠겨서 거길 알아볼까 했는데 그렇게 돼서 뭐 방법은? 나를 채찍질하는 거는 매우 중요해서 해외생활을 하기로……. 와이프도 오지 말라 그랬어요. 고독해지고 싶어서 싱글 때처럼. 싱글 때 고독했지만 그 맛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뭐 고독해보자는 생각을 했죠. 고독과 만나면 결정될 거 같아요. 미리는 결정 못 하겠어요. 버킷리스트 정해놓고 한다했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미래는 알 수 없어요.

홍: 어쨌든 설레시겠어요.

윤: 예 좋아요.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장소 가면 새로운 생각난다고 새로운 생각이 많이 나겠죠.

홍: 감사합니다(웃음).

▲ 드라마 <겨울연가> 포스터가 그의 작업실에 걸려있다. ⓒ강의정

두 시간에 걸쳐 긴 인터뷰가 끝이 났다. 이어진 뒤풀이에서도 그의 이야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광고회사에 있다가 정말로 방송사에 오고 싶어서 면접보기 전날 광고회사 사표를 냈고 면접 때 그 사실을 밝힌 이야기, 나긋나긋한 표민수 피디처럼 스태프들에게 애교를 부리지 못하는 대신, 작품의 성취만을 목표로 묵묵히 밀고 가는, 일에 대한 헌신을 최대 무기로 삼았다는 이야기, 배용준, 이병헌, 송승헌, 명세빈 등 함께 일한 스타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의 작품 활동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점은 그가 차분한 어조와는 달리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끌어가는 이야기꾼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듣다 보니, 그가 요리사처럼 느껴졌다. 요리를 배운 요리사 중 일부는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어 사업을 확장한다. 프랜차이즈에 투자가 몰리고,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재무, 인사, 영업, 관리 등 경영을 제대로 알지 않으며 안 된다. 그는 대형 프랜차이즈보다는 스스로 요리하고 스스로 경영하는 일종의 오너쉐프를 지향한다. 자신이 요리를 하고, 그것을 팔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을 운영하는.

홍대 앞에 자리 잡은 그의 사무실에는 자신의 드라마 연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겨울연가> 첫 회 방송 대본부터 각종 소품과 사진들, 그리고 <사랑비>를 찍은 세트까지.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할 널따란 카페에는 맛있는 샌드위치와 커피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 공간을 드라마를 위한 공간으로 꾸미고, 드라마 같은 삶을 소망하는 듯했다. 역사상 세 번째 한류를 연 거장의 꿈은 생각보다 소박했고, 그 소박함으로 한국과 일본을 잇는 또 다른 콘텐츠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황동규 시인이 <즐거운 편지>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듯이.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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