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돈 PD, 호기심과 열정으로 TV를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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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수 교수의 PD학개론] ⑤ 채널 A 이영돈 상무

“000,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2013년 상반기 방송계에 새 유행어가 탄생했다. 이영돈 PD가 채널 A <먹거리 X파일>에서 사용하는 멘트를 개그맨 신동엽이 따라하면서 금세 유행어로 등극했다. 2013년 스승의 날에 필자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교수들의 이름을 크게 써서 붙여놓고는 "000 교수님,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라는 유행어를 덧붙였다. 어떻게 보면 경쟁사인 tvN의 <SNL 코리아>에서 이영돈 PD를 섭외하려는 연락이 왔다는 사실이나, 프로야구 시구에 나서 떡 모양의 야구공을 우적우적 씹었다는 사실이나, 프로그램에 소개된 식당들이 장사진을 이룬다는 소식 모두 PD 이영돈의 인기를 방증한다.

언론학 박사이기도 한 그는 2013년 한국언론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에서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한 발제문을 발표했다. 마지막 회기였지만 젊은 대학원생들과 관심 있는 교수님들이 모여들었다. 인기는 사람을 모으는 기운에 다름 아니다. 많은 대중매체 종사자들이 바라고도 바라는 것이 바로 인기인이다. 인기인을 프로그램에 섭외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대중매체 종사자들은 자신이 인기인을 만드는데 일조하면서도 평생, 인기인을 섭외하는 데 진력을 다해야 한다. 따라서 연예인과 결혼한다면, 듬직한 출연자 한명은 확보한 셈이며, 학교 동창 선후배 중에 연예인이 있다면 급할 때는 학연을 들먹이며 섭외의 끈을 확보하게 된다. 시시포스의 운명과도 같은 스타의 인기를 쫓던 PD가 스스로 스타가 된다면…….

이영돈 PD는 2013년 가장 인기 있는 PD로 부상했다. 그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는 KBS와 SBS에서 두 번씩(?) 근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1981년 KBS에 입사해서 호주로 이민을 갔다가 그곳 이민자 방송인 SBS에서 근무하다가, SBS 개국과 함께 SBS에 입사했으며, 다시 KBS에 재입사한 뒤 지금은 종편 채널 A 상무로 근무 중이다. 그는 30년가량을 PD로 근무하며 수많은 인기작을 만들었다. <주병진 쇼>, <그것이 알고 싶다>, <바이블 루트>, <생로병사의 비밀>, <마음>, <술, 담배, 스트레스에 관한 첨단보고서>, <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 <먹거리 X파일>,<논리로 풀다> 등을 연출했으며 이중 상당수는 지금도 방송중이다. 지상파를 넘나들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그가 지금은 종합편성채널 책임자로 활약하고 있다. 교양 방송의 마이다스 손, 이영돈 PD, 그는 누구인가?

그와 함께 일했던 PD들은 하나같이 그가 매우 독하게 일한다고 혀를 내두른다. 그와 일했던 후배PD들은 자신의 체력이 이영돈 PD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나가떨어지고, 스태프들이 힘들어 중도 포기하는 것도 여러 차례라고 한다. PD에게 체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파이터 PD,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는 근성 있는 피디, 이영돈 PD를 11월 초 채널 A 사무실에서 만났다.

▲ 이영돈 상무. ⓒ강의정
홍: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 개국 2년이 지났어요. 지금 한창 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뛰고 있지만 광고수익이나 이런 게 좋지 않아서 좀 더 고생을 하고 있죠.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면 난항을 겪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아요. 그중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매체, 채널하고 경쟁을 해야 하니까요. 제일 큰 게 지상파인데, 우리 시청률이 올라간 만큼 지상파 시청률도 깎아내리게 되니까 사실 총체적인 전쟁터가 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힘들고 어려워요.

홍: 인터뷰를 잡는 게 어려울 만큼 연예인 스케줄이던데…….

이: 저는 콘텐츠 담당 상무이니깐 콘텐츠 전체를 책임지고 또 프로그램 <먹거리 X파일>이나 <논리로 풀다>를 진행하면서 콘텐츠를 봐주어야 하니 힘듭니다. 곧 조만간 12월 달에 <이영돈· 신동엽의 젠틀맨>이라는 프로그램을 새로 런칭합니다.

홍: 아 그렇습니까?

이: 그것도 준비하느라 지금 목 다 쉬었어요. 새로운 콘텐츠를 해 보려고요. 이영돈PD와 이엉돈PD가(웃음)...... 짝퉁 이영돈하고. 내용이 어떤 거냐 하면 우리 주변에 젠틀맨이 없어요. 사람들이 먹고 살만 해졌는데 더 각박해지고 개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매너나 이런 것들이 허물어지고 있어요. 우리 사회를 지켜나가는 에티켓이 상실되었죠, 그래서 이 시대의 진정한 젠틀맨을 찾아보자 이게 기획의도예요.

만나자마자,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안 이야기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목소리도 쉰듯하고 얼굴도 피곤한 듯 초췌하다. PD들은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안 이야기할 때 가장 활기를 띤다. 그는 새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며 반짝 빛을 발했다.

홍: 제일 궁금한 것 중 하나가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성장과정, 형제 관계인데요.

이: 제가 2남 2녀의 맏이에요. 두 살 네 살 아래 동생이 있고, 막내는 나하고 열두 살 띠 동갑. 차이가 많이 나죠. 어릴 때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잘 살았어요. 아버지고향은 이북이고 엄마는 밀양이시고,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충무동에 제재소도 있었고 연탄공장도 있었죠. 아버님이 화공약품상을 하셨는데,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님 형제간에 갈등이 생겨 사업이 파산 나 아버님은 월남으로 가셨어요. 기술자로. 그래서 그때부터 고생을 했죠, 특히 어머님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리고 5학년 때 인천으로 올라왔어요. 그때부터 아버님과 떨어져 있었어요. 제가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그러는 게 아마 그때부터 체질화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그게 나중에 PD생활 할 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실수도 많이 하지만 판단이 굉장히 빨라요. 이게 될 건가 안 될 건가, 그 다음에 이걸 할 건가 말 건가, 그리고 현장에 나가서도 판단이 빠릅니다. 그게 아마 이때 생긴 게 아닐까 싶어요. 집안일 포함해서 개인 일도 그래요. 대학을 진학하면서 가족이 전부 다 아버님이 있는 곳으로 이민 갔어요.

홍: 월남으로요?

이: 아뇨. 아버님이 월남 패망하기 전에 나오셔서 이란에 계셨죠. 이란 공군에 계시다가 그때 저만 빼고 가족들이 이란으로 갔다가 다시 호주로 이민을 갔어요.

홍: 아, 이란에서 호주로.

이: 1년 반인가 있다가 호주로 갔는데 그때 전 혼자 남아서 군대도 혼자 가고 혼자 계속 생활을 한 거죠.

홍: 성장 과정에서 아버님과의 유착관계가 조금….

이: 거의, 거의 없다고 봐야죠.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어떤 기억은 아버님이 약간 무서운 편이고 굉장히 성격이 급하세요. 아이디어도 많은데 그게 헛된 아이디어가 많으셨어요. 아미동 연탄 공장 뒤 쪽에 굉장히 큰 집이 있었는데 아버님이 화공약품을 하실 때 일인데, 빗을 파마 머릿결처럼 웨이브 지게 만들어서 그게 파마하는 빗이라고 만들어 오신 거예요. 근데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꼬불꼬불한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파마가 되는 게 아니죠. 파마는 머리에 약을 뿌려야 되는 건데 그냥 이것만하면 된다고 생각하시고 그거를 돈도 많이 들어 빗을 만들어서 판다고……. 그러니깐 사업이 망했죠. 그땐 돈이 있어서 실패해도 관계는 없었지만 그만큼 아버지가 되게 행동이 급하고 성격도 급했어요.

홍: 창의력도?

이: 제 기억에 아버님한테 이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버님 살아계시니깐. 헛된 그 창의력이 굉장히 뛰어나신 거예요. 제가 물려받은 측면도 있어요, 그런데 떨어져서 사니까, 그리고 가끔가다 한번 씩 (한국에)들어오시고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살가운 기억은 별로 없어요. 기억이 나는 건 딱 그거는 있죠. 제가 인천에서 중학교 때 하교하면 화투를 했어요. 돈 내고 난 옆에 친구들 하는 거 구경했는데 가끔 돈도 대긴 댔어요. 방과 후에 구경하는데 지나가던 선생님한테 걸려서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했는데 그때 마침 아버지가 들어오셨을 때에요. 그래서 첫날은 가출했어요. 가출해서 친구네서 자고 둘째 날은 그 집에서도 가라고 해서 집에 들어갔죠. 자는데 아버지가 깨우시더라고요. 밖에 가서 자라고 ‘너 같은 애 필요 없다’고. 그래서 문밖에서 잤거든요. 근데 엄마가 들어와서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는데 새벽 4시쯤에 아버지가 다시 저를 깨우는 거예요. 인천 송도 뒷산인가 끌고 가서 면도칼로 손을 좀 잘랐어요. 붕대도 가져오셨더라고요. 정말 손을 잘랐었다니까요. 전 완전히 어린데 정말 충격, 그래서 이런 거 안 하잖아요. 고스톱, 도박 이런 거를……. 그만큼 무서우셨어요.

아버지와의 유착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철환 PD와 공통점을 띤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팀을 이끌고 스태프들을 조정해야 하는 PD의 일은 어떻게 보면 가장의 일과 흡사하다. 아버지와의 유착관계가 충분하지 않은 PD들이 창의적인 PD로서 이름을 날리는 사실과의 상관관계는 연구해볼 만한 사실이기도 하다. 다만, 아버지와의 유착관계의 부족이 끝없는 성취욕망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심리학에서도 설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워커홀릭이라고 부를 만한 그의 일에 대한 중독과 몇 차례의 전적의 행보를 이해할 수 있을까?

홍: 그러면 신방과를 졸업하고 취업은 곧바로 KBS에 하신 건가요?

이: 네 4학년 2학기 때 입사를 했죠.

홍: 그 당시에는 PD라는 직업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텐데…….

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죠. PD가 뭐하는 지도 찾아도 특별히 나오는 것도 없고 개념도 없고 그런데 하여튼 공부를 막 할 때 집에서는 경영학과 가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저는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어요. 인천고 반에서 10등 정도 했는데 저보다 성적 좋은 친구들이 고려대 신방과를 응시하고 선생님이 저는 안 된다고 가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저는 밑져야 본전이라 써 달라고 계속 사정을 했어요. '뭐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하면서 선생님이 써줬어요. 저만 붙고 두 사람이 다 떨어졌어요(웃음). 어떻게 신방과를 선택하게 되었냐?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이런 대답을 해요. 어릴 때부터 보는 거를 되게 좋아했어요. 영화나 서커스 이런 거를 정말 많이 보러 간 거 같아요. 5살 6살 이럴 때 혼자 못 가잖아요. 동네에 있는 영화관 앞에 가서 서 있어요. 그러면 누구 혼자 들어가는 사람 있잖아요. 가서 손을 이렇게 잡아요. 나중엔 노하우가 생겨가지고 커플이랑 가면 더 잘 들여보내주는 거예요. 그리고 처음엔 ‘같이 좀 들여보내주세요’ 말하고 그 다음엔 말도 안 하고 남의 손 잡고 그냥 ‘같이 갈게요’ 그러면 그땐 확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두 편을 보고 어떨 땐 세편을 보고 나오고 그랬으니깐 그때 신방과와 연관을 찾자면, 영화를 무지 봤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와서도 극장을 많이 다녔는데, 외로움을 달래는 수단이었을 수도 있지만.

홍: 대학 졸업하고 KBS PD를 지망해서 들어온 거잖아요. 그때는 PD란 직업을 잘 아셨나요?

이: 대학 들어갈 때까지 잘 몰랐어요. KBS 시험 볼 때는 학교 방송국에도 있었고 2학년 때는 극예술연구회에도 있었고, 표현하는 거에 대한 아이디어도 좀 있고 그래서 아마 글로 쓰는 거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체질에 맞는다는 생각을 해서 PD를 지원을 한 거죠.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한테 성문각에서 나온 세계추리문학 전집을 사달라고 했어요. 거의 웬만한 추리소설은 다 들어있는 25권짜리. 아가사 크리스티, 셜록 홈즈, 괴도 루팡이라든가 일본 그 다음에 미국 추리소설을 무지 많이 봤어요. 지금 제가 프로그램을 만들 때 약간 호기심을 더해서 추리같이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마 다 그게 배경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입사 면접할 때 면접관이 ‘어떤 프로그램하고 싶으세요?’ 그래서 추리드라마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었죠. 추리를 하고 싶었고 그게 기회가 안 되고 이상한 방향으로 드라마가 아니고 탐사보도로 풀려가지고…….

홍: 연관성이 있을 듯한데……. KBS 입사해서 어떤 프로그램들을 하셨나요?

이: 입사하자마자 교육1국인가 가서 <상쾌한 아침입니다>라고 황인용 씨하고 문지현 씨가 진행하는 세 시간짜리 프로그램을 했어요. 아침프로그램인데 거기는 중계차 타는 거, 스튜디오 메이킹, 퀴즈, 어린이프로그램도 그 땐 <TV유치원>이 지금은 독립했는데 그때 따로 우리가 만들어서 그 안에 하는 버라이어티 매거진 프로그램인데, 그거를 일 년 반 정도 했어요.

홍: 여러 장르를 섭렵하셨네요.

이: 네, 선배가 직접 편집을 안했어요. 두 선배가 테이프를 그냥 던져주는 거예요 편집을 하라면서. 제가 한 건 본 영화나 TV 이런 거에 대한 상식적인 그런 거죠. 거기서 짧은 거 긴 거 브리지 편집을 하면서 진짜 많이 시행착오 거쳐서 많이 배운 것 같아요 그 선배들 덕분에.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고 하는 약간 창의적인 그런 것이 그때 되게 많이 생겼어요. 그게 고생은 했지만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거예요. 신입사원 둘이서 이틀에 한 번씩 밤을 샜으니깐.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긴 하죠. 그게 여러 가지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서.

홍: 그리곤 어떤 프로그램을?

이: 그리고 <생방송 오늘>이라는 프로그램. 신완수, 왕영은 진행으로 저녁에 여덟시 반부터 아홉시까지 2TV에서 방송했는데, 그때 1TV는 9시에 뉴스를 하니깐 그땐 ‘땡전 뉴스’할 때예요.

홍: 저도 본 기억이 나는데요.

이: 조금은 가벼운 교양 가벼운 시사 이게 시청률이 많이 나와서 ‘땡전뉴스’를 사람들이 안 보고 이걸 본다고 위로부터 재미없게 만들라고 지시를 받았어요.

▲ 이영돈 채널A 상무. ⓒ강의정
홍: 시청률이 많이 나오면 안 되니깐.

이: 그렇죠. 재미없게 만드는 것도 쉽진 않더라고요. <상쾌한 아침입니다>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한 경험으로 10분, 15분짜리를 이것저것 많이 해봤어요. 그 중에 하나가 ‘심형래의 돋보기 졸보기’인데 ‘심형래의 돋보기 졸보기’가 사회풍자의 코너로 시골 총각 장가 못가고 뭐 그런 소재를 잡아서 시골 가서 심형래가 시골 총각으로 분해가지고 장가가는 이런저런 것도 해보고. 그 다음에 아시안게임 앞두고 인기 없는 레슬링이나 그런 거 있잖아요.

명동에다 매트 깔아놓고 룰 가르쳐 주고, 돈이면 다된다는 거를 풍자하려고 압구정동인가에서 가수 이선희가 J에게로 히트칠 때 이선희를 데리고 가서 심형래가 가난한 집 아들인데 이선희는 재벌집 딸이고 둘이 사랑하는 사이인데 그 집에서 불러다가 돈 가방에 돈을 왕창 주면서 자기 딸이랑 헤어지라고,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우리 딸이랑 결혼하냐고.

심형래가 그 집에서 나와서 압구정동 길을 걸어가면 빌딩 위에서 그 돈을 밑으로 다 뿌리는 거에요. 그래서 그 돈 사이를 심형래가 쓸쓸히 걸어가는 게 엔딩샷. 이 부분은 방송 못했어요. 그때 생방송이었는데 프로그램을 재밌게 만들고 하니깐 제 것은 미리 보고 그러지 않는데, 방송이 나가는데 테이프를 걸었어요, 담당차장이 디렉팅하다가 돈 가방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니깐 ‘너 뭐하는 거야! 돈 뿌리는 거야?’ 그래서 ‘예’ 그러니깐 ‘정신 있어?’ 방송 못했어요.

하여튼 그런 거를 했죠. 예능하고 교양이 결합된. 또 방송 못한 게 뭐였냐면 심형래가 하다가 그만 두고 임하룡이 했어요. 임하룡을 데리고 여자로 분장을 시키는 거예요. 스트레이트 파마도 하고 다리에 있는 털 다 면도기로 밀고 여자 옷 입혀가지고 명동거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사람들 반응 보는 걸 했는데, 지금이야 게이가 일반화 됐는데 당시엔 방송 못했어요. 하여간 이런 거를 하다가 호주로 이민간 거예요.

홍: 몇 년도였죠?

이: 1985년 하반기에 갔다가 좀 있다가 다시 왔어요.

홍: 입사는 몇 년도에?

이: 1981년도 11월에.

홍: 4년 정도 계시다가.

이: 4년 반 정도. 기본적으로 역마살이 있어요 사주에. 4년, 5년 이렇게 다니면 지겨워지면 능률도 안 오르고 기회가 주어지면 옮기고 이런 것들이 재미없으니깐 새로운 걸 해볼까 이런.

홍: 그 때는 4년 정도면 방송을 많이 한 건 아닐 거 같은데.

이: 저는 이념편향성이 없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건 사회나 국민들이 보기에 자기들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거를 제공하고 그러는 건데, 당시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았잖아요. 그땐 노조 생기기 전이니깐요. 이런저런 걸로 시끄럽고, 일부 선배들이 그러는 거도 보기 싫은 것도 있었고 집사람도 입사 동기니깐 똑같이 입사해서 같이 다녔는데, 그러다가 뭐 ‘에이 그냥 가볼까?’

홍: 부모님도 호주 계셨으니까요?

이: 그땐 호주에 가신지 10년이 훨씬 넘으셨죠. 동생들도 다 있고.

홍: 호주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이: 처음 가서 놀다가 노는 것도 지겹고 그러다가 거기 SBS(Special Broadcasting Service)라고 연방정부 이민자 방송에 들어갔죠. PD로 들어간 건 아니고 거기 들어가기 전에 민방 등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했는데, 언어적인 장벽이 있는데다가 한국에서 연출한 게 크게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찾던 게 연방정부 공무원 시험을 보면 거기서 SBS를 지원할 수 있어요. 그래서 들어가서 행정직으로 일을 했죠.

홍: 공무원으로 일하신거네요?

이: 그렇죠.

홍: 그러다가 대학원 공부도.

이: 거기는 복지 이런 게 잘 돼 있잖아요. 일하는 시간도 얼마 안 되고 끝나고 편집을 도와주고 한다 해도 시간이 무지 많아요. 영주권자는 등록금이 없어요. 그래서 유니버시티 오브 테크놀로지 시드니(UTS) 대학원에 들어갔죠. 600불인가 학생회비만 내면 되요. 2년 다니고 끝날 무렵에 한국으로 왔으니깐 5월 24일부터 한국 SBS 출근하기 시작했으니깐 마지막 학기 남겨놓고 왔죠. 그때도 4년 반 정도.

홍: SBS 가신 건 어떤 분이 도움을 주신 건지요?

이: 신완수 선배가 있었어요. 후일담이 많더라고요. 거기 경력직 뽑는다고 해서 원서를 냈는데, 신완수 선배가 저를 데려오고 싶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특채로 들어갔죠.

연출 스타일은 던져주고 풀고, 반전, 그리고 결론

홍: SBS에서 만드셨던 게.

이: <그것이 알고 싶다>랑 <주병진 쇼>하고 아침프로그램 주말 판 비슷한 것도 했고, 그 두 개가 제일 큰 거죠.

홍: 괴도 루팡 읽으셨던 게 <그것이 알고 싶다> 스타일의 방송으로 만드신 계기가 된 거네요.

이: 처음 기획은 제가 한 건 아니고요. 홍순철, 박정훈 이런 친구들이 한 거고 그 담에 들어가서 만들 때 <그것이 알고 싶다> 스타일 자체가 그런 거잖아요. 제가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다 그렇게 만든 거 같아요.

홍: 추리 형식에.

이: 네, 뭔가 던져주고 풀고 하면서 반전이 있고 막판에 결론이 나고 이런 스타일이 추리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언젠간 이런 거도 했는데 옛날에 <생방송 오늘> 할 때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는데 카메라를 끊지 않고 한 신으로 그냥 밖에서부터 집안으로 들어와서 침대에 누가 죽어있고, 범인이 누구일까? 커트를 많이 쓰지 않고 찾는 거를 여러 번 시도했는데 머리가 안 좋아서 그런지 잘 안 되었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런 식이 기본적으로 제 프로그램을 만드는 스타일인거 같아요, 실체가 무엇일까를 파악하는 것 있잖아요.

지금 <먹거리 X파일>이니 <소비자 고발>이나 특화된 스타일이지만 파고 나면 남는 실체가 무엇일까? 그거를 추리식으로 그렇게 찾는 거죠. 추리물의 특징이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데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범인이 누군가 그런 게 정말 짜릿짜릿하거든요. 마지막에 범인일 거 같다고 했는데 그게 범인이 아니다 누가 범인일까? 반전이 한 번 나오고. 영화도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게 로맨틱 코미디예요. 그냥 편한 정말 사람의 감정을 편하게 사랑주고 받고 이런 거는 별로예요. 그런 사랑을 하더라고 살인사건 현장에서 진행을 하든지......(웃음).

그래서 저는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공포영화예요. 그 다음에 추리물, 스릴러. 그런 영화는 아무리 쓰레기 같은 영화라도 영화관에 걸리면 새벽 1시 심야영화라도 봐요. 술 먹고 나서도 가고 집에 3시 4시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혼자 술 취해서 들어가서도 보죠. 짜릿짜릿한 공포 스릴러 이런 거는 결국 프로그램 만드는 게 템포의 차이고 포맷이 달라진다 뿐이지 주로 그런 거를 좋아해요. <주병진 쇼>를 기획할 때도 토크를 하는데 대본 쓸 때도 그래요. 박찬종 씨를 데려와 바바리코트를 입히고, 이 사람이 누굴까, 나와서 뭔가를 밝혀야할 것 아닌가. 뭔가 하나를 밝혀내는 게 추리 스타일인 거죠. 추리 스타일의 핵심은 반전이에요. 기획할 때도 그거죠. 반전을 어떻게 할 건가? 반전이 제대로 되면 성공한 거고 잘 안되면 잘 안 되고 그때 연예인들 나오는 토크쇼가 많으니깐 연예인 나오는 토크쇼 말고 다른 게 뭐가 있나 해서 유명인사 포함해서 일반인들을 출연시키는 거예요. 에이즈환자도 출연시키고 성형수술 해가지고 실패한 사람도 출연시키고, 고엽제 환자도 출연시켰어요.

<주병진 쇼>에서도 스턴트맨하고 특수효과를 가지고 하는데 시작하면서 일단 방청객하고 이런 데는 사전에 얘기를 안 해요. 주병진 씨 앉아 있으면 어떻게 나온다는 거를 주병진 씨에게는 했죠. 방청객들에게는 얘기 안 하고. 불이 꺼지고 총을 쏘면서 사람이 막 들어오는 거죠. 사람들 깜짝 놀라잖아요. 꺼진 불에 총소리 나면서 들어오니깐 막 놀라고. 특수효과를 중간 중간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주병진 씨한테 가짜 총 가지고 총알 한방 남은 거를 쏘라고 했어요. 이거는 마지막 끝나는 신이다. 이거는 주병진 씨한테 얘기를 안했어요. 총을 맞은 듯 천장에 매달린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사람들도 깜짝 놀라게 하려 했는데, 주병진 씨도 너무 깜짝 놀라고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서 줄이 늘어져서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구급차에 실려 갔잖아요. 주병진 씨는 자기한테 얘기 안 했다고 생난리를 쳤죠.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다는 추리소설들이 그가 만드는 프로그램의 원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를 바탕으로 숨겨진 것, 반전을 가져오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그는 장난스런 악동처럼 느껴졌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유발하는 장치를 만들고 시청자들이 따라오게 만드는 기상천외의 아이디어의 소유자. 어쩌면 피디는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는 시청자와 술래잡기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홍: KBS로 재입사를 하셨죠?

이: 1991년 5월 24일에 SBS 갔다가 1995년 2월에 KBS로 왔어요.

홍: KBS 역사상 재입사는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은데요(웃음).

이: 사실은 재입사 비하인드 스토리가 그때 <TV저널>에 기사로 났었어요. 뭐냐면 SBS가 개국하면서 KBS와 MBC PD를 많이 데려갔잖아요. 사실은 KBS, MBC가 타격을 입었죠. 잘하는 사람도 건너가니깐 협정을 맺었어요, 더 이상 데려오지 말자고. 근데 1년 가까이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갔어요. 근데 성준기(현, 동아방송예술대 교수)라고 <옥이 이모> 연출한 친구가 있는데 SBS에서 데려간 거예요. 그래서 KBS가 열 받았죠. 그래서 당시 KBS 안국정 본부장이 홍두표 사장에게 이야기해서 오라고 해서 KBS로 간 거죠. 그래서 가기로 하고, KBS에서 유럽으로 기획 출장을 가라고 해서 출장비를 받았어요. 비행기 타는 날에 SBS에서 알아서 윤세영 회장이 올라오라고 하더라고요. KBS의 조건이 뭐냐고 해서 집사람(김영실, 현, 호서대벤처대학원 교수)과 함께 복직시켜주는 거라고 했더니 윤 회장이 집사람과 같이 와서 일하라고 했어요. 그렇게 할 걸 그랬나 봐요(웃음). 결국 KBS에서 2000달러인가 3000달러인가 돈을 쓰라고 준 돈을 출장비로 써서 한 달 반인가 두 달 호주로 유럽으로 돌아다니다가 돌아왔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SBS 다시 다니는 건 그렇잖아요.

홍: 그리고 KBS에서 하셨던 프로그램들이?

이: 맨 처음에 와서 한 게 <민스크노보르시스크, 북북서로 돌려라>. 구 소련 항공모함인데, 소련이 무너지면서 항공모함이 기름이 없어서 움직이질 못했어요. 한국 영 유통에서 구입했어요. 노하우가 엄청난 거든요. 한 번 해체하면 항공모함을 만드는데 15년에서 20년 걸리는 것을 10년을 단축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일본하고 중국에서 엄청난 반대를 한 거죠. 외교전에 관련된 거를 취재하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갔다가, 항공모함 정박한 곳이 두 시간 떨어진 곳인데, 근데 그거를 제 성격에 안 찍고 넘어가면 프로그램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영 유통회장에게는 다른 거 한다고 속이고서 가가지고 다른 거 취재할 거 있다고 해놓고 비행기 타고 카메라맨, 저, 코디 셋만 갔죠. 그리고 그때 AD를 한 이강택 PD한테는 제가 만일 못 들어오면 테이프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영 유통 회장한테 내가 어디 갔다고 얘기하라고 말했죠.

언덕에 두 대가 정박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찍었는데, 그때 왔으면 됐는데 가까이 찍고 싶어서 갔어요. 그런데 초소가 있잖아요. 어디서 들은 것처럼 돈 200달러 줄 테니깐 촬영하게 해달라고 하니깐 경비가 막 호의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됐구나! 역시 돈이면 다 된다’ 했는데 한 20분 기다리는데 KGB가 와서 잡혀갔어요. 3일인가 끌려 다니는데 고문은 안 당했는데 밥을 한 끼도 못 먹었어요 물만 먹고. 한국에서는 안 들어오니깐 외교부 통해가지고 찾는데 못 찾더라고요. 결국엔 영 유통 회장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해체업체 사장이 소련제독 해군 출신이니까 사장을 시켜 전화해가지고 돈 주고 풀려났어요. 그래서 와 가지고 그냥 들어오면 되는데 PD들은 요새 젊은 친구들은 이런 거 좀 배워야 돼요. 안 들어오고 (테이프를 뺏겼으니)프로그램이 반쪽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거기 있는 통신사의 특파원을 찾아가서 주머니에 있는 돈 5000달러 다 주고 베팅을 했죠. ‘찍어줘라 너는 특파원이니 찍어줄 수 있지 않느냐?’ 그래가지고 찍어서 테이프를 가져왔어요. 그래서 방송을 나름대로 멋지게 했죠. 그리고 그때 잡혀갈 때도 잡혀가는 걸 뒤에서 찍어라 그랬더니 이 테이프는 외교경로를 통해 왔는데, 이 방송은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하는 거지 다른 게 아니다라며 테이프를 돌려 달라 해서 테이프가 방송 나가는 전날인가 와서 제가 잡혀가는 거 찍은 거는 방송 맨 뒤에 에필로그로 ‘이런 외교적인 노력 끝에 호의를 생각해서 돌려줬다’ 자막 넣어서 방송을 했죠. 카메라맨은 저랑 촬영 안 가려고 해요. 방송이 나가는데 KBS 나갔다 들어오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야 다시 재입사 했다는데’ 하며 관심 있게 보는 거예요.

근데 방송 시작을 어떻게 했냐면 이게 욕도 먹고 칭찬도 먹었었는데 드라마 식으로 한 거예요. 처음에 등장인물들이 나와요. 해군제독 나오고 영 유통 사장 나오고 저도 나오고, NHK특파원도 나오고 드라마처럼 등장인물 나오듯 했죠. 안국정 본부장은 ‘뭔가 다르다 이영돈 PD는’ 그러고, ‘저게 뭐냐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저렇게 만드나’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고. 젊은 친구들은 ‘아 저런 피디도 있구나’ 했죠. 그 다음에 그때 일반화 된 게 저는 무조건 시작할 때 드라마처럼 연출 작가 카메라를 무조건 앞쪽에다가 넣었죠. 나중엔 저를 많이 따라했었죠. 방송 시작할 때 제목 넣고 제가 책임자 됐을 땐 다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동안 만들었던 필모그래피를 확인하려고 해서 던졌던 질문인데, 답변이 다소 길어졌다. 그는 평범한 PD와는 달리 프로그램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으며, 후배피디들에게도 이러한 점은 배웠으면 하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제작 경험담이 길어졌지만,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한국 방송 역사의 중요한 대목들이어서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했다.

홍: 그 후에 했던 프로그램을 말씀해 주세요.

이: 그때 그게 10월 1일 국군의 날 특집으로 방송된 뒤, 대한항공 협찬으로 이스라엘 수도에 첫 취항하는 것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누구 할 사람 없나 찾는데 ‘10월 중순이 지났는데 어떻게 하냐?’ 다 그러더라고요. 또 호기심이 동해서 내가 하겠다고 해서 4부작을 11월 초순인가에 가서 33일 촬영하고 이스라엘 예루살렘 관련 성지 다 가고 터키 갔다고 로마에 오는 거 해서 33일 동안 7개국을 돌고 편집을 이틀에 한 번씩 해서 4부작을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방송했다니까요. 아마 그거는 기존 시스템에서 충격적이었어요. 이틀에 한번 편집할 때 신앙심 깊은 김덕기 PD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전 사실 크리스천이 아니니깐 PD로서 인류학적으로 접근을 했고, 김덕기 PD가 공동연출 하면서 현지에 가서 의미나 이런 걸 얘기해 주고 찍어왔어요. 갔다 오는 건 좋은데 방송이 10일 인가밖에 안 남았어요. 이틀에 한 번씩은 편집을 해야 하는데 근데 한 편 편집하고 뻗었을 거예요. 김덕기 PD가 간호사인 부인을 끌고 집으로 온 거예요. 그래서 집에 가서 링거를 맞고 다시 편집을 했고, 4부작을 방송했죠.

어느 PD든 자신의 화려한 과거가 없을까마는 이영돈 PD의 왕년은 보통의 것을 넘어선다. 이건 PD가 아니라, 첩보원 수준이기도 하고, 슈퍼맨 같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2년 이상의 제작기간이 소요되는 4부작 다큐멘터리를 두 달 만에 뚝딱 만들어 낸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바이블루트>에 대한 평가도 폭발적이었다고 기억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그의 대단한 체력이다. 작지만 다부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만만치 않다. 흡사 파이터를 연상시키는 강단 있는 몸과 단단한 인상은 내부의 힘이 겉으로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영돈 PD를 말할 때, 몸과 체력을 빼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남이 다 안 된다고 할 때 꼭 한 번 해본다

홍: 체력, 몸에 대한 남다른 게 있으신 거 같아요.

이: 몰라요. 몸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지금까지 하고 싶다 가고 싶다는 거는 거의 다 그냥 언제든지 했어요. 그러니깐 피디들이 가져야 되는 덕목 중에 창의성과 열정을 이야기하면 창의성은 있는데 열정이 없으면 현실화시키기 어려워요. 열정은 많은데 창의성이 없으면 프로가 안 돼요. 조직에 해가 될 수 있고 두 개가 적절히 조화가 됐을 때 뛰어난 PD가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필이 꽂히면 성격상 이걸 막 오랜 시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남이 다 ‘안 됩니다’ 그럼 내가 한번 해보겠다 딱 그거 밖에 없어요. 뭐 다른 것은.

홍: 남들이 안 된다고 했을 때…….

이: 네, <마음>도 그거예요. 마음 가지고 다큐멘터리 한다고 하니깐 사람들이 ‘야 마음가지고 어떻게 다큐멘터리를 하지?’ 할 때 저는 된다고 생각한거죠. <바이블루트>도 갔다 와서 이야기가 많았어요. 아무도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없죠 그런 상황에서, 시청률도 나오고. 그 해에 KBS 사업단은 그거 때문에 적자보다 흑자를 봤어요. 비디오테이프 팔아가지고 회사에도 도움이 됐고,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그만한 게 없죠.

홍: 교회나 이런 데에서는 거의 하나씩 다 사가지고. (웃음)

이: (웃음) 다 거의 다 바이블로 가지고 있으니깐 지금에야 인터넷으로 보지만 그때는 비디오테이프를 엄청나게 팔았어요. 33일 촬영 계획……. 지금 하라면 할 수 있을까? 남들이 다 안 한다 하면 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웃음). 그런 의미에서는 정확하게 진짜 뭔가를 보여줬죠. 그거는 정확히 33일 동안에 그것도 처음으로 스테디카메라 가지고, 사진작가 데리고 나가서 크루 7, 8명 데리고 나가서 그 기둥 사이를 스테디카메라로 촬영한 것을 생각하면……. 체력이 되니깐 하죠.

▲ ⓒ강의정
홍: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을 잘 따라오게 하는 본인만의 비결은? 스태프들이 되게 힘들어하던데(웃음)
이: 뭐랄까, 일단 같이하면 프로가 어느 정도 성공을 하고 그게 몸담았던 경력이 커리어에 도움이 되니깐 힘들어도 따라오는 게 있을 거고, 일단 제가 몸으로 때우니까요. 제가 몸으로 때우고 회의하고 아이디어 내고 그렇게 하니깐 밑에 사람이 배우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혼자 농땡이치기 곤란한 상황을 제가 만들어요. 일부로 만들어서 지금 여기도 그렇잖아요. 채널 A도 상무를 하면서 프로그램을 하고 이게 처음에 다른 방송사에서 욕 많이 했어요, 같은 임원들이. ‘니 혼자 잘나 가지고…….’

근데 저는 잘났다는 게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거고, 프로를 같이 하면 성과가 나니까요. 그런데 다른 데서는 그러죠 ‘야 저 사람은 저런데 너는 뭐냐?’ 새로운 형태의 임원스타일을 보여줬다는데,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앉아서 사인하고 이런 거 가지곤 성에 차지가 않고, 뭔가 현장에서 몸으로 때우고 부딪치는 게 그게 체질에 더 맞는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도태된 사람이 있어요. 도태된 사람이 씹는 거 다 알거든요. 안에서 같이 몸담고 고생하고 힘들여서 같이 성공시키고 하는 그런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동지가 되는 거고, 저의 맨 파워가 되는 거죠.

홍: 프로그램 품질관리(QC) 기준이 높잖아요, QC는 어떻게 하시는지?

이: 기본적으로 프로그램을 잘 만든다고 하는 건 기획을 잘하는 것도 있지만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 프로그램 잘 만들거든요. 대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볼 때 전 스토리텔링하고 디테일을 봐요. 그런데, 대체적으로 스태프들이 디테일에 강하진 않아요. 그냥 모든 영역을 떠나서 드라마건 예능이건, 그리고 핑계는 무지 많아요. 시간이 없어서, 뭐 이런저런……. 그리고 제가 한다고 해서 그대로 다 되지도 않더라고요. 근데 되도록이면 디테일한 면을 보려고 하니깐 그래서 디테일한 거를 스토리하고 연결해서 지적을 하니깐 듣는 사람이 이해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해를 하는 사람은 급격히 발전하는 거 같고 프로그램도 좋아지고 그 와중에 이제 격차를 나름대로 줄여보려고 합니다. 디테일을 자꾸 얘기하니깐 잔소리가 되고 제가 힘드니깐 어느 선까지만 하는데 그게 잘되면 품질관리가 되는 거죠. 또 프로그램 수준이 높아지는데, 외주사나 PD 중 이런 게 빨리 발전하는 사람이 있고 도태되는 사람이 있고 그런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어느 정도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최저수준 정도라고 생각하는 거기까지 끌어올리는 것도.

홍: 예전에 한번 후배가 이식한 간을 촬영하고 왔는데 맛을 안 봤다고 호통 쳤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웃음).

이: (웃음) 그게 제 프로그램 스타일인데 이게 그 뭐라 그래야 되나?

홍: 시청자가 느끼게 해주기 위해 그런…….?

이: 전 프로그램에 얼굴이 자주 나오잖아요. JTBC <썰전>에서 이영돈 PD가 누구인가를 이야기 했었거든요. 그 내용에 씹는 것도 있고 칭찬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이영돈 PD는 왜 자꾸 카메라에 얼굴을 내미냐?’ 김구라가 그러니깐 강용석은 ‘야 지금까지 봐라, 카메라에 얼굴을 자꾸 내미는데 종착지가 뭐냐? 국회다’ (웃음) ‘분명히 봐라 국회 간다’ 그러더니 ‘지금 그래도 상무인데 임원인데 가려고 하겠냐?’ 그러니깐 ‘봐라 그 사람, 조만간 사장되고 뭐 그담에 언제까지 간다’ 구체적인 날짜도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 임원회의 갔는데 사장이 표정이 안 좋아요. 그 프로그램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더라구요. 기획은 굉장히 좋고, 아이디어 좋고, 시청률 나중에 올라갈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사장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제가 화면에 얼굴을 내미는 목적은 시청자들을 대신해서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게 스타일이고, 프로포폴이 대체 뭐기에 나도 한번 맞아보자 해서 프로포플 맞았어요. 맞고는 ‘기분이 좋군요’ 그랬다가 방송에서 경고 먹었어요. 이게 그냥 제 스타일이라니까요.

아까 <바이블루트> 할 때 화제가 됐던 게 요단강을 제가 수영해서 건넜어요. 건너 가지고 저쪽 편에서 ‘야 요단강 건넜다’ 하고 소리 질렀어요. 그게 방송에 나갔어요. 그게 그냥 무슨 뭐 ‘화면에 얼굴을 내밀고 내밀고 싶어서다?’ 그건 아마추어들이 하는 얘기고, 요단강 건너간 의미가 여긴 삭막한 땅이고 요단강을 건너면 진짜 푸른 초원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이 살 것 같다는 배경으로, 요단강 건너는 게 죽음의 의미지만 요단강을 건넜다는 게 크리스천들에게는 무지무지 감동스러운 장면이에요. 제가 수영해서 건너간 게 다 표현 방법인데 시청자들이 방송에 관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건데……. 옛날에 대구에 있었을 때도 대구 날씨가 더운데 이 더운 걸 가지고 <일요스페셜>을 한 거예요. 더워서 라이터 터지고 진짜 길바닥에다가 계란을 깨면 계란이 후라이가 되잖아요. 후라이가 진짜 되요. 그럼 후라이 되는 건 그림이죠. 후라이 된 걸 제가 이렇게 먹어보면? 훨씬 더 감동스럽게 볼 수 있고, 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 좀 더 이렇게.

홍: 와 닿게?

이: 와 닿고 사람들이 ‘야’ 감탄하고, 구성하고 찍는 목적이 뭐죠? 결국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는 피디마다 다른 거고, 어떤 사람은 정말 감동적인 그림으로 만들 수 있고, 저는 시청자들을 대표해서 먹어보고 맛을 보고 그렇게 하는 거죠. 그게 제일 극단적인 형태였어요. <생로병사의 비밀> 말고 <술 담배 스트레스에 관한 첨단 보고서> 할 때 일본 가서 담배를 피우면 실제로 발기부전에 걸려요. 왜? 피가 안 가는 거예요 고혈압이 생기고. 근데 스태프이고 의사고 성기에 피가 안 가는 거를 찍어야 되잖아요. 보여줘야 되잖아요. 그거 어떻게 보여줘요? 누군가가 성기를 노출하고 담배를 피우고 열 카메라로 파랗게 변하는 거를 보여줘야 될 거 아네요? 근데 다 안 한다고 하니깐 저는 저를 희생해서 실제로 바지를 내렸다니까요? 부인에게는 보지 말고 놀러가라고 하고. 근데 그게 제가 노출증환자예요? 아니거든,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싶은 것뿐이에요.

2007년 필자가 KBS에서 김영선 PD를 진행자로 <단박인터뷰>를 연출할 때, 함께 시작된 프로그램이 <다큐멘터리 3일>과 <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세 프로그램은 조대현 당시 기획제작국장의 작품이었다. 조대현 국장은 PD들이 힘들어하고 기피하는 시사 및 탐사 프로그램을 띄우기 위해서 스타 PD가 나와야 한다고 믿었다. PD들이 스타가 되는 과정을 지켜본다면, 후배들도 마냥 기피하지 않고, 프로그램 제작을 지원할 것이라는 관리자의 PD수급용 방편이라는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국장의 생각과 부합하게도 <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은 피디의 이름이 프로그램에 들어간 첫 번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편성 쪽에서도 왜 PD의 이름을 프로그램에 넣느냐는 지적이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이영돈 PD의 강력한 퍼스낼리티 때문에 편성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이영돈 PD가 오랫동안 KBS에서 해왔던 일련의 작업들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홍: 채널A로 가신 후의 말씀을 들어볼게요. 종편 개국할 때 PD들 사이에서 ‘채널 A가 잘될까?’ 라는 의문이 있었는데요.

이: 조중동 보수 신문의 방송사에 무슨 충성을 하느냐? 전 그런 거보다 이게 호기심 작동이고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을 해요. 여기 와서 제가 하는 몫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이념성향을 떠나서 콘텐츠만 놓고 보면 어떤 측면에서든지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할 수 있고, 지금 여기도 기자·PD해서 200명, 전체 기술까지 600 여명 가까이 고용하고 있어요. 그러니깐 그런 거를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죠. 고생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하고 있는데, 물론 후회할 때도 있고…….

그런 측면에서는 콘텐츠 산업에 없는 거보단 있는 게 도움이 돼요. 그리고 이제는 종편이냐 케이블이냐 지상파냐 이런 게 의미가 하나도 없어요. 콘텐츠만 의미가 있죠. 어디에 방송하고 이거는 점점 더 쌍팔년대로 가는 거 아니에요? 어떤 교수가 세미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신문 망한다. 페이퍼신문 니네들이 살기 위해서 만든 조선닷컴이나 동아닷컴이나 이게 뉴미디어냐?’ 아니 이건 베낀 거예요. 뉴미디어는 아니죠. 그냥 종이신문을 옮겨놓은 거죠. 허핑톤이나 이런 건 새로운 미디어죠. 오마이뉴스도 새로운 미디어죠. 그러면 방송은 뉴미디어냐? 사실 방송도 올드미디어잖아요. 올드미디어가 올드미디어에 투자한 건 잘한 거냐? 글쎄.

인터넷이나 새로운 뭔가를 해야지 결국 방송이 채널이라는 의미가 크게 없다고 보고 새로운 콘텐츠를 시도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경쟁력 있게 만드는 데 종합편성채널이 일익을 할 거라고 보고, 지상파에 굉장히 큰 자극이 돼요.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데에 자극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결국은 서로가 경쟁하면서 새로운 콘텐츠를 많이 만들어내고 다양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게 과제인 거지 보수 신문이 방송을 하나 만들었다 이거는 큰 의미는 없다고 보고. 채널A 여기 왜왔냐? 스카우트 비 많이 받고 그런 거보다는 새로운 거를 도전해보자. 이거는 SBS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고 KBS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이고 KBS에서 시도했던 여러 가지 프로그램, <바이블루트>나 그 전에 했던 거, 그 다음에 다큐멘터리들 뉴욕 특파원 가고 9·11 현장에 가서 그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그 환경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고 그런 자체를 사랑하고 도전하는 거죠. 너무 나이브한 표현일 수 있는데 일단 뭐 제 생각은 그래요.

홍: 채널A가 저번에…….

이: 망할 것인가?

홍: 아뇨 그게 아니라(웃음), 말씀해주세요.

이: 처음에 뭐 두 개는 망한다? 망할 거 같진 않아요. 광고 수익이 적으니깐 치열한 경쟁을 하고, 지금은 드라마를 하진 않는데 지금보다는 다양한 예능이 열리고 드라마를 해서 대박 드라마가 나오면, 그 때는 진짜 지상파하고 전면전이에요. 그래서 지금 지상파에서 새로운 콘텐츠가 나오나? 별로 안 나오고 있거든요. 지금 들어와 있는 젊은 친구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다양한 콘텐츠 장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던지고 그렇게 했을 때 경쟁하는 거죠. 어느 하나가 망한다? 실수는 한다 하더라도 망할 그 정도까진 절대 아니에요. 점점 더 경쟁이 치열해질 거 같아요.

홍: 저번에 채널A에서는 물론 담당은 아니시지만 보도 쪽에서 몇몇 물의도 있었잖아요.

이: 물의 있었죠. 그게 뭐 비행기 사고나, 5 18이나 관련이 아니지만, 보도 쪽이 난 진짜 죽을 때까지 보수라서, 거기에 문제가 있어서 내 신념대로 이야기하고 뭐 그런 건 아니고, 시스템 상의 실수이고 그런 게 다시 반복되면 안 되죠. 그게 실수라고 보지 그게 채널 전체가 그렇고 그건 절대 아니에요. 분명히 회사 쪽에서 진심어린 사과도 한 거 같고…….

홍: 보도 쪽에는 어떻게 관련되어 있어요?

이: 보도는 담당임원이 있고, 저는 그걸 제외한 다른 콘텐츠를 담당하고 있고, 하지만 임원회의에서 이야기는 되니까요.

홍: 종편 편성에서 두 가지 문제, 보도 비율이 너무 높다는 거 하고 재방비율이 높다는 거에 대해서는.

이: 재방비율이 높은 거는 이런 측면도 있는 거예요. 광고 시장이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고, 그럼 처음부터 두 개만 허가를 해 주든지. 광고시장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비를 무작정 투입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광고시장이 좋아지면 재방 비율은 점점 줄어들 거예요. 안에서 또 준비를 하고 있고. 그러면 낮에 하는 시사프로그램 있잖아요. 일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시사토크는 뭐냐? 이것도 똑같은 건데 사실 그 시간대는 지상파는 재방송하는 때이고 근데 거기에 어떻게 보면 새로운 형태의 시사프로가 생긴 거 아니에요? 그게 사람들한테 어필을 할 수 있고 낮 시간대이지만 굉장히 많은 시청 층을 확보하고 있는 거 같고, 이게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으니깐 이거를 확대하기 위한 새로운 프로를 위한 편성인 거지, 재방율을 무조건 줄이기 위해서 이거를 무작정 편성한다? 이런 거는 아니에요. 비슷할 순 있겠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거라.

이게 사람들한테 어필을 하니깐, 예전 같으면 YTN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보는 이 시간대가 지금 종편으로 많이 넘어왔잖아요. 지상파는 재방을 하고 이거는 어떻게 보면 편성 상으로 보면 종편이 개발한 시간대인 거고 지상파도 이제 경쟁을 하겠죠. 그런 경쟁 시장에서 서로가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인 것이고 그리고 재방비율은 시청률이 나오고 광고가 어느 정도 들어오기 시작하면 점점 낮아져요. 왜냐하면 재방에다 광고 붙이는 것보다 본방에다 광고 붙이는 게 더 효율이 있으니깐. 예능, 교양프로 같은 게 많이 생기고 그러면 당연히 광고 같은 게 붙을 거 아니에요. 지금 낮 시간대에 하는 그런 거는 광고가 드라마 예능에 들어가는 거보다는 광고가 적겠죠. 적으니깐 어차피 민간회사가 경영하는 걸 보면 이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거예요. 어디 세미나 갔을 때도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색안경 끼고 볼 그건 아닌 거죠. 당연히 편성은 변하고 재방율도 변하고, 광고가 들어오면. 그 과정의 하나일 거라고, 무슨 뭐 큰 의도를 가지고 이런 건 아니에요.

▲ 인터뷰 중인 이영돈 상무. ⓒ강의정
홍: 재방 비율은 얼마나 됩니까?

이: 절반 정도 되는 거 같아요.

홍: 50% 절반정도는 재방이 되는 프로그램을 방송한다는 뜻인가요?

이: 50%는 본방하고. 나머지 50%는 뭐 재방을 하는데 광고가 들어오고 시장이 열리면 이렇게 하겠어요? 본방 하죠.

홍: 지상파하고 비교할 때 채널A의 제작에서 가장 큰 특징 예를 들면 지상파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프로를 만든다든지 아니면 제작하는 순서라든지 과정 등 뭐 다른 뭔가가 있나요?

이: 일단 편성 상에 보면 광고가 프로그램 단위로 잘 안 붙어요. 광고가 프로그램 단위로 붙어야지 광고주가 자기 프로를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게 많지 않아요. 많지 않으니깐 편성을 굉장히 탄력 있게 해요. 방송 나가다가 중간에 끊고 기자회견하는 걸 연결하고, 시사적인 것을 연결할 때 굉장히 탄력 있게 하는 거예요. 시간대 변화 이런 것도 다 마찬가지고. 광고가 붙기 시작하면 지상파 스타일이나 이렇게 갈 수 밖에 없을 거예요. 마음대로 시간 바꾸고 하겠어요?

홍: 그럼 그 당일 갑자기 편성이 바뀌기도 한다는 거네요?

이: 많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 있고. 여기도 고정되는 시간대가 생기잖아요. 뉴스 시간대가 고정되고 11시 시간대는 지상파 시간대를 많이 빼앗아서, 이런 건 움직이지 못하죠. 나머지 광고가 많이 안 들어오고, 이런 거는 탄력 있게 움직이죠. 그게 전 종편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그 시간대가 달라지면 광고 단가도 달라지니깐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많이 시정될 거라고 보고, 지금은 탄력 있게 운영하고 있죠.

이영돈 PD는 종편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곧 해결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도비율이 높은 거나, 재방비율이 높은 것, 편성이 고정되지 않은 것조차 광고부족으로 귀인 시키는 듯했다. 종합편성채널을 주시하는 시선이 많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지, 또한 종합편성채널이 충분한 투자를 하고 있는 지에 대한 약속을 검토해 본다면 광고 부족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방통위의 2012년도 종편채널 사업계획 이행실적 점검결과를 보면 채널A를 포함한 종편 4사는 콘텐츠 투자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며,‘방송의 공적책임·공정성·공익성’부문에서 스스로 제시한 계획을 대부분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경향신문, 2013년 11월17일).

홍: 제작 매커니즘은 어떻게 다른가요?

이: 제작 메커니즘은 지상파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외주사 같은 경우에는 지상파 방송사랑 비슷하게 주거나 아니면 더 주거나 해가지고 외주 들어오고, 제작메커니즘은 장기물 만드는 건 사실상 어렵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장기물은 하긴 하지만 많지 않고 제작하는 환경이나 이런 거는 지금 단지 이건 있어요. 제작메커니즘이 지상파랑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게 파일럿 프로그램 런칭하고 프로그램 생겼다 없어지고 그거 있잖아요. 그거는 지금 많이 하는데 저도 이걸 고치려고 하는데 파일럿을 4편을 해요. 사실 4편은 파일럿이라 하기는 어려운 거잖아요.

홍: 4회를 파일럿으로?

이: 4회를 파일럿해요. 보통 한편을 하잖아요. 근데 4편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걸 쓰려면 우리 스튜디오도 없는데 스튜디오 빌리고 제작하고 그 다음에 섭외가 잘 안되고 그러니깐 그 다음에 이게 성공을 할 건지 안 할 건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하는 의미에서 3편에서 4편으로 하는데 이건 좀 줄여야 되지 않을까……. 그 다음에 파일럿 하다가 없어진 게 잦지 않냐고 이야기를 하는데 근데 그거는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는데 4편을 해서 시청률이 잘 안 나오고 뭔가 그렇게 되면 4편으로 내리죠. 그리고 파일럿이 지상파보다 훨씬 많아요. 왜냐면 아직도 정착이 안 되어있으니깐. 하다가 내리고 파일럿을 많이 시도하는 건 여러 외주사들한테 기회를 주는 거예요. 사실 지상파 방송사 뚫기는 어렵잖아요. 근데 여기는 지상파보다는 탄력적이어서 정말 아이디어가 좋은데 작은 프로덕션이라도 시도할 수 있고, 생겼다 없어진 프로가 많으니깐 지금은 외주사가 훨씬 더 좋아졌어요. 프로그램 거의 다 외주니까.

홍: 채널 A 콘텐츠를 비평적으로 분석해주신다면?

이: 다양하지 않다 그것도 수용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근데 지금은 다양하지 않고 드라마가 없고 뉴스가 많고 뉴스는 아까 말한 낮 시간대가 버려지는 시간이니깐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다양성이 없다. 종편 전체에도 그렇고 채널A에도 그렇고 다양성이 없다 인정해요. 다양하게 만들고 싶어요 근데 잘 안 돼요. 여러 외주사들 아이디어도 해보고 이런저런 걸 하는데 잘 안 돼요. 안에서도 하고 밖에서도 하고 지금 시행착오 중이에요. 그 과정에서 정말 다양한 거를 해보고 싶어요.

그중에 하나가 <이영돈·신동엽의 젠틀맨> 이런 거는 좀 다른 형태인데 집단토크 이런 거를 많이 하는데 우리가 하는 건 시청률 잘 안 나오더라고요. 다양한 아이디어의 장에서 다양한 프로를 하고 싶은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아요. 그래도 많이 시도할 거예요. 그래가지고 어느 시간대가 정착이 되면 그 담에 드라마도 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무작정 돈을 투입해가지고 시청률은 안 나오는데 JTBC처럼 드라마에 계속 물 붓기 할 건가? 우리는 그렇게는 안할 거 같아요. 오너가 주머니를 열거 같지 않아요. 정비를 해서 다시 드라마를 할 거에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해서 그게 대박치면 탄탄하게 가는 거죠. 이게 지금 완결된 상태가 아니잖아요. 또 시청 층이 나이든 사람들이다. 50, 60대를 위주로 하는 거 아니냐? 그렇지 않아요.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하고 싶어요, 근데 아이디어가 잘 안보여요. 대신에 50, 60 대 기반으로 40대 내려오고 중간 중간에 시간대에 맞는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해서 정말 다양하게 만들어야죠.

당연히 채널이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맞고. 근데 약간 시행착오를 하고 있는 거죠. <먹거리 X파일>, <논리로 풀다> 그 다음에 <관찰 카메라 24시간> 이거는 제가 품질 관리 직접 하고 있으니까 어느 선까지는 나오고, 예능프로그램은 약간 헤매고 있어요. 올해 말 내년 초 조금씩 나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지금보단 행태가 달라질 것이라고 보고, 그렇게 해서 히트치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보도는 줄어들어요. 안 줄어들 수가 없죠. 지상파 같으면 안정적인 콘텐츠가 많으니까 몇 개나 시행착오해도 문제가 없는데 우리는 메인예능 그런 게 시행착오를 거치니깐 저도 면목이 없고.

홍: 예능은 어느 분이 책임자세요?

이: 예능은 제가 책임자죠. 예능이라고 다를 거라 생각하지 않는데, 디테일 있게 할 수 있는 그런 거를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데 조만간 나올 거예요.

홍: 손석희의 JTBC 아홉시 뉴스 어떻게 보시는지? 경쟁사긴 하지만.

이: 경쟁사는……. 동업자죠. 되게 잘 데려왔다고 생각하고요. 그렇게 종편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계속 와야죠. 프로그램 성공한 사람들이 오고 그래서 같이 경쟁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시장구조가 되어야지 다양한 콘텐츠가 나올 수 있죠. 제가 메시지 보냈어요. 잘 오셨다고 환영한다고. 근데 고생을 많이 할 거에요. 고생을 왜 많이 하냐? 이게 신문사가 방송사를 운영할 때 약간의 딜레마들이 있어요.

홍: 조직 문화나 경영방침의 차인가요?

이: 방송은 사람하고 돈이 만들어요. 진짜 잘되는 프로그램 한 두 개가 먹여 살리니까요. 지상파는 돈이 많으니깐 좀 더 많죠. 몇 개가 이미지를 만들고 먹여 살리니깐 <먹거리 X파일> 그걸 하려면 돈이 있어야 돼요. 사람 뽑아놓으면 출장비 주면 기사 쓰고 똑똑한 사람이 신문사에 당연히 있어야 되지만. 방송은 그게 훨씬 더 심해요. 그거보다 더 중요한 건 뭐냐면 신문사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지만 방송이 갖고 있는 불확실성을 이해를 하지 않으면 투자고 뭐고 아무 것도 안 돼요. 방송프로그램이 논문 쓰듯이 분석해가지고 ‘야 지금 성공하는 프로를 전부다 분석했더니 MC는 누가 하고 연출은 얘가 해야 되고’ 전부 다 조합하면 성공할까? 글쎄, 불확실성이 가장 큰 드라마 열 개 실패해 가지고 돈 몇 백억 날리고 하나 성공해서 그 몇 백억 다 만회하고 이걸로 회사가 먹고 살았다? 그러면 10개 실패하고 하나 성공했으니깐 다음엔 10개 실패하고 하나 성공한다, 이게 함수가 나와야 되잖아요. 10개 실패하고 하나 성공했는데 그 다음엔 3개 실패하고 하나가 대박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아 10개, 3개 이렇게 되는구나, 그럼 다음엔 3개 한 다음에 하나 성공할까? 아니란 거죠.

이거를 어떻게 못 만든다니까요. 예능프로도 마찬가지예요. 강호동, 유재석을 데리고 성공할 가능성? 성공할까? 성공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지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죠.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그걸 깬 게 김수현 작가죠. 김수현 작가가 하면 기본은 해요. 종편에서도 보여줬잖아요. 나머지 사람은 대박친 연출가한테 맡겼더니 안 돼. 대박친 작가들한테 맡겼더니 안 돼. 예능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고 시사프로그램은 불확실성은 조금 줄어들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럴 거 아니에요. 그럼 신문사는 분석을 한다니깐, 분석을 해서 돼요? 결국 사람이 만들어야 되는데 피디하고 작가가 만드는데 자기 마음에 드는 애들 데려다가 만드는데, 이거는 임원회의나 간부들한테도 이야기를 했어요.

근데 이 말을 이해를 못 해요. 어떤 사람도 드라마 막 성공한 친구도 JTBC에 데려왔더니 0.4% 0.5% 해가지고 죽 쑤잖아요. 다음에 또 죽 쑤나요? 성공할 확률은 어차피 그런 친구들이 많은 거죠. 등식 만들기는 어렵죠. 근데 이 부분을 이해를 안 하고는 신문사에서 방송사에 투자해서 피디랑 일하기가 정말 곤란해요. JTBC는 그나마 방송하던 사람이 가서 의사결정을 하지만, 나머지는 의사결정이 왜곡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조선은 이미 보도 위주로 하는 거기 때문에 이쪽에서 이렇게 하는 거가 불확실성을 인정받기가 어렵고, 우리는 이영돈 피디가 와서 방패막이가 되어 열심히 하고 있고, 그래도 다른 데에 비해서는 간섭이 별로 없어요. 누가 나한테 뭘 어떻게 하라 그런 잔소리를 한마디도 안 해요. 왜냐하면 회장이 얘기하는 그게 프로그램에 반영될 거 아녜요. ‘MBN은 사람도 없는데 대박 나는데, 우리는 왜 대박 나는 거 없느냐 왜 그러냐?’ 며칠 전에는 깨졌지만, 결국 나오긴 나올 거예요 대박나는 게. 시행착오 중인거지. 이런 것도 도대체 얼마를 투자를 하면 대박이 나오나? 아니면 뭐를 어떻게 하면 대박이 나느냐? 인센티브만 주면 대박 나는 게 나올까? 예스 노를 제가 못한다는 거예요, 공식이 없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을 믿고 시행착오를 거쳐서 ‘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안됩니다’하면 책임지고 나오면 되는 거죠. 그때까진 믿는 수밖엔 나머지는 뭐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는 거는 원하던 게 안 나오니까 스스로 자가 발전돼서 하는 거예요 책임자로서. 진짜 지랄발광을 하는 거죠. 무슨 회장이 그래라 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피디 자존심을 걸고……. 근데 잘 안돼요. 연말이나 가면 되겠죠.

홍: 마지막으로 PD로서 어떤 사회적인 책임을 갖고 계신지?

이: 그러니깐 그게 사회적 책임이라는 게, 지금은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고 봐요. 그리고 진보 보수가 어느 하나가 맞고 틀린 개념도 아니구요. 좋은 사회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상의 문제죠. 그렇게 따지면 저도 가끔은 그런 고민을 하죠. 정말로 핫한 이슈, 통진당이나 4대강이나 핫한 이슈 ‘너 정도 위치에 너 정도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 왜 건들이지 않냐?’ 그런 질문을 받고 고민을 하지만 전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은 지금 혁명으로 바꿀 수 없는 이 시기에는 사회문제라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고쳐야 하는 부분들에 대한 것을 프로그램을 통해서 굉장히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라고 봐요.

핫이슈가 되는 사회문제는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봐요. 피해가는 거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4대강 같은 거를 진짜 전권을 주고 제가 하는 거에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고 하면 정말로 몇 부작을 현장에 가면서 양심이 느끼는 대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지금도 가지고 있고 그 상황이 주어지고 그거는 정말 이제까지 이영돈 PD가 쌓아온 신뢰를 가지고 아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그만 거지만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민주화하고 선진화하는데 의식을 바꾸고 그런 거에 일익을 할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일이라 생각하고 하는 거죠. 착한 식당 이런 것도 정확하게 그런 거죠.

착한식당을 하는 착한 주인은 방송 나가기 전까지 완전 하층생활을 해요. 자기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걸 만들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요. 왜?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들이 와서 먹지도 않아요. 그 다음에 이웃이나 다른 식당들이 알아줘요? 아니 그 다음에 그렇게 하면 무슨 뭐 진보단체나 진보신문에서 와 가지고 그거를 알려줘요? 아니 그냥 평생 그렇게 사는 거예요. 방송이 나가면 돈을 무지무지 벌어요. 착한 사람이 돈 버는 사회 그게 제대로 된 사회잖아요.

그거를 지금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젊은 부부가 창원에서 착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는데 하루 버는 게 2만원에서 3만원도 안 돼, 한 달에 200만원 벌기도 어려워요. 시간 있으면 나가서 노가다 뛰어요 돈 벌려고. 착한식당으로 선정됐어요. 판교로 옮겨 하루에 300만원 400만원 벌어요. 백배를 넘게 벌잖아 지금은 아르바이트생을 12명 고용해요. 이 친구들은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한테 국가가 정한 시급보다 돈을 더 줘요. 젊은 친구들한테 소문이 난거예요. 아르바이트는 저 집 가서 해야 된다고. 사고가 착하고 행동도 착해요. 이념적으로 해서 막 싸우고 이런 거보다 전 이게 훨씬 더 임팩트 있고 우리 사회를 좋은 사회로 만드는 데 더 큰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전 이것에 굉장히 큰 자부심을 가져요.

▲ 홍경수 교수(왼쪽)와 이영돈 상무 ⓒ강의정
홍: 에 KBS에 있으셨을 때 <나와 주세요>라는 프로그램도 하셨잖아요?

이: <박중훈 쇼>는 실패했었다고 생각해요. 깨끗이 인정해요. <나와 주세요>는 잠시 접은 거예요. 민원 제기하고 해결사가 나와 가지고 근데 그때는 그나마 진보정부가 있을 때인데도 힘들었어요. 섭외도 안 되고 협조가 안 돼요. 그래서 힘들어서 접었죠. 그거는 다시 하면 되게 좋은 틀이라고 생각해요.

홍: 자, PD는 결국 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지금같이 채널이 많아진 사회에서는 길게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디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고 하는 거에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기자의 역할은 인터넷이 다 가져갔어요. 기자는 스토리텔링 하는데 스스로 개발도 잘 안하고 그게 자기 본업이 아니잖아요. 스트레이트 뉴스를 지향하는 역할은 인터넷이 가져가고 그런 점에서 긴 거를 만들 수 있는 피디의 사회적 역할은 훨씬 커졌다고 볼 수 있죠. 할 일이 더 많아진 거예요 어떻게 보면. 그런 면에서 PD의 사회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회가 변하지만 자기가 발굴한 팩트를 가지고 스토리텔링을 해서 하는 역할은 훨씬 더 많아진 거죠. 그런 면에서 책임이 조금 더 막중해졌다고 보죠.

홍: PD는 뭐하는 사람이다?

이: PD는 노가다 하는 사람이죠. 아, 피디 힘들어요. 힘든 데 나오는 거를 보고 피드백 받고 이런 거는 기자들하고 다르죠. 기자는 네트워크로 하잖아요. 우리는 프로그램으로 승부하잖아요. 자기가 만든 거 힘들더라도 이게 자기 재산이고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이고 피디는 노가다고, 피디는 뭐한다? 뺑뺑이 한다. PD는 체력이 정말로 있어야 되고 그 체력을 바탕으로 열정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자기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어야 해요. 휴……. PD는 운동을 무조건 해야 돼요. 여기 와서부터 붙여놨어요. ‘ 화목 점심은 죽어도 운동이다 건강해야 큰일 한다(웃음).’ 정말로 이게 미국같이 하부조직이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으면 지시하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내고 아이디어가 돈이잖아요. 그거 내면서도 역할을 충분히 다 할 수 있고 내가 낸 아이디어가 체계적으로 실물이 되어서 나타나니까. 우리는 그게 안돼요. 그러니깐 우리는 아이디어 내면 마지막 될 때까지 끝까지 뛰어야 되니깐 체력이 안 되면 뭘 하겠어요? 하다가 코피 터져 죽는다니까요.

인터뷰 도중 코피 이야기를 하다가 실제로 코피가 흘렀다. 인터뷰가 잠시 중단됐다. 이른 바 북치고 장구치는 스타일의 1인 다역의 직무가 얼마나 큰 일인지 웅변하는 듯했다.

홍: 요즘 인기 많이 느끼시죠? 어떠세요?

이: 인기를 느끼죠. 요새는 길거리 어디가면 알고 아는 체하는 사람하고 아는데 모르는 체 하는 사람하고 두 종류가 있어요. 대부분 알고 그래서 모자 쓰고 다니는데 모자 써도 알아보더라고요. 엄청 많이 알아보죠. 피곤해요.

홍: 좋은 점도 있죠? (웃음)

이: 좋은 점은 뭐 그렇게 알아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요. 제가 할 수 있는 프로도 <이영돈·신동엽의 젠틀맨>도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고, 저는 피디가 프로그램만 만드는 시대는 지났다고 봐요. 새 시대의 피디는 프리젠터도 되고 엔터테이너도 되고 예능은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서수민이나 이런 친구들이 개그 판에서 그 사람도 거의 개그맨이거든요. 나와서 개그맨같이 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탐사는 기자가 하는 거를 가져온 거잖아요. 그리고 미국가면 기자 저널리즘 PD저널리즘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그거는 비뚤어진 시대가 만들어 낸 말이죠. 저널리즘 하나밖에 없죠. 누구나 다 우리도 저널리스트예요. 저널리스트로서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그런 탐사보도 역할을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거도 했으면 예능도 가고 드라마도 가고 피디가 할 수 있는 국회도 가고 청와대도 가고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져야죠. 우물 안을 벗어나서 해야죠. 국회엔 무슨 기자는 바글바글하잖아요. 아나운서들도 얼굴 알려졌다고 가요. 제가 가겠단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아무튼 피디들도 그렇게 가서 자기들 역할도 하고 PD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우리가 하는 거를 알려주고,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이야기하는 시대는 그것도 사실 쌍팔년도 시대죠. 이미 지났어요. PD출신들이 학교도 가고 훨씬 더 가서 지금 학자 중심 체계에 새바람도 일으키고 그런데도 가고 피디출신 대통령도, 장관도, 국회의원도 나오고…….

홍: 더 하고 싶으신 말씀?

이: 없습니다.

홍: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시간에 걸친 이야기는 어느덧 PD출신 대통령에까지 이르렀다. 이영돈 PD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한 전설의 주인공을 만난 것 같았다. 그가 앞으로도 체력이 닿는 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마샬 매클루언 따르면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 텔레비전은 인간의 눈을 확장한 것이고, 바퀴는 발을 확장한 것이며, 컴퓨터는 두뇌를 확장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미디어가 인간의 감각기관을 늘린 것이라는 뜻이다. 방송을 연출하며 출연하는 그는 단순한 프리젠터가 아니라, 시청자를 대신해서 맛보고, 뛰어다니고, 생각하고, 느끼는 미디어인 셈이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몸은 이미 자신의 몸이 아니고, 대중들이 세상을 지각하는 공적인 감각기관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공적인 신체를 갖게 되었고, 그것이 미디어로서의 이영돈의 탄생에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끝으로 자신의 브랜드 파워로 채널 브랜드를 견인하는 그의 놀라운 성취가 더 빛을 발하려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고민의 폭이 좀 더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착한 시민 개개인을 구제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착한 시민들의 삶을 힘겹게 하는 제도를 바꾸는 사회적인 역학에 대해 조명해주었으면 하는 희망이 그것이다. JTBC의 손석희가 뉴스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이영돈 피디가 시청자의 인식을 넓혀줄 교양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해본다.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했을 때, 손을 들고 어려운 프로그램을 척척 만들었듯이, 이영돈 PD가 분명히 손을 들어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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