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국보법 방송심의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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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심의규정 ‘개악’ 논란…“방심위 해체에 나설 때”

“가히 국가보안법의 방송심의 버전이라 할 만하다.” 15일부터 시행되는 개정 방송심의규정이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제29조의 2)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두고 언론계 안팎의 우려가 높다.

자의적 잣대의 정치심의 공간이 더욱 커졌다는 지적으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소식을 다룬 손석희 앵커의 JTBC <뉴스9>에 대해 여권 추천 방심위원들이 공정성과 객관성 위반을 주장하며 중징계 결정을 한 것과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정권서 정한 ‘기본질서’ 따르라?= 방심위는 지난 9일 전체회의를 열어 방송심의 관련 6개 규정과 정보통신심의규정 개정을 의결했다. 방송심의규정 개정안이 공개되고 가장 문제 조항으로 지목됐던 ‘민족의 존엄성’ 조항은 빠졌지만,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방송심의의 새로운 기준으로 추가하는 조항인 제29조의 2는 살아남았다.

이 조항은 ‘방송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방송해선 안 된다’, ‘방송은 남북한 간의 평화적 통일과 적법한 교류를 저해하는 내용을 방송해선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견 문제될 게 없어 보이지만, 언론계 안팎에선 현재도 논란인 방심위의 자의적 기준의 정치심의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현 정권에서 반대 목소리에 부딪칠 때마다 ‘법과 질서’를 앞세우는 것처럼, 정권이 정해준 기본질서를 따르라는 식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일 전체회의 과정에서 야권 추천 방심위원들이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 신설에 대해 반대하며, 대안으로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한 내용도 포함하자는 수정 제안을 한 이유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기도 한 야권 추천의 박경신 위원은 “국민의 기본권 관련 내용은 제외한 채 기본질서에 대한 부분만을 방송 제재의 기준으로 삼는 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박 위원은 “(정권이) 시민 집회에서 법과 질서를 앞세우며 공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했음에도 방송 보도가 시민의 침해된 기본권의 문제를 짚지 않는다면 그 또한 (방심위에서) 제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과 제안의 배경엔 그간 방심위, 구체적으로 여권 추천 위원들이 주도한 심의를 놓고 나오는 ‘이중 잣대’ 논란이 있다. 지난해 12월 JTBC <뉴스9>에 대해 ‘관계자 징계 및 경고’(벌점 4점)의 법정제재를 결정한 게 대표 사례로, 당시 여권 추천 방심위원들은 JTBC 뉴스가 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소식을 전하며 김재연 통합진보당 대변인 등을 인터뷰한 것을 두고 방송심의규정의 공정성과 객관성 위반을 주장했다.

여권 추천 방심위원들은 지난 3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논란을 빚은 박창신 천주교 전주교구 원로신부를 인터뷰한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대해 “제작진이 박 신부의 발언에 동의하냐”(엄광석 위원) 등의 추궁을 한 뒤 공정성·객관성 위반을 이유로 중징계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오는 23일 전체회의에서 최종 제재 수위를 결정할 전망이다.

반면,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를 출연시켜 박원순 서울시장 등 3인의 야권 지방자치단체장을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고 ‘종북’ 성향이라고 매도한 TV조선 <뉴스쇼 판>에 대해선 ‘문제없음’(명예훼손 관련)과 ‘의견제시’(공정성·객관성 관련) 등 경징계를 하는 데 그쳤다.

공정성 등의 조항만으로도 이처럼 ‘이중 잣대’의 ‘정치심의’ 논란이 불거지는 결정을 하는 상황에서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자의적 해석의 우려가 있는 조항을 신설했으니 ‘개악’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게 언론계 안팎의 지적이다. 박건식 MBC PD(MBC PD협회장)는 “지방선거(6월 4일)를 앞두고 방송심의규정을 ‘개악’했다는 것은, 방심위원들이 공안통치의 하수인을 자처하고 나선 것에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불씨 남은 ‘민족의 존엄성’ 조항=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 등에 대한 우려를 낳았던 ‘민족의 존엄성’ 조항 신설은 이번 개정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불씨는 남았다. 지난 9일 전체회의 당시 방통위는 ‘민족의 존엄성’ 조항의 신설을 제외한 이유로 “현행 제25조의 3항(방송은 민족의 존엄성과 긍지를 손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과 중복되며, 객관성·명예훼손 등 타 조항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자체 규제심사위원회의 심사와 입안예고·공청회 등에서 나와 이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엄광석 위원은 “‘민족의 존엄성’ 조항을 살려도(신설해도) 문제될 게 없지 않냐”며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박만 위원장은 “하도 반대의견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라고 답하며 “그 조항이 없어도 다른 조항을 적용해 제재가 가능해 이번엔 한 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박 위원장은 이어 “올해에도 심의규정 정비 자문단을 운영할 테니 (다시) 자문단 의안으로 상정을 할 것”이라며 “심의규정 개정이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고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여론을 수렴해 볼 테니, (이번엔) 이 정도 선에서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당장은 반대 여론이 높아 개정을 강행하진 않지만, 언제든 재논의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이다.

반면 방심위원들은 그간 언론계 안팎에서 계속해서 축소와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방송심의규정 제9조(공정성)와 제11조(재판이 계속 중인 사건) 등에 대한 개정은 배제했다.

방송심의규정 제9조는 지난 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방심위의 징계 결정을 취소하라고 판결한 CBS <김미화의 여러분>과, 최근 손석희 앵커의 JTBC <뉴스9>에 중징계를 내리는 등 정치심의에 악용돼 온 대표적 독소 조항으로 꼽힌다. 제11조 또한 국정원의 무리한 간첩 수사를 지적한 KBS <추적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무죄 판결의 전말’ 편에 대해 방심위가 중징계를 의결한 근거로 활용돼 논란이 일고 있다.

박만 위원장은 제11조와 관련해 “개정안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신중하자는 의견이 있었다”며 “향후 자문단에 의안을 올려 충분히 검토하고 의견 수렴을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공정성 조항(제9조)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었다.

방심위의 이 같은 방송심의규정 개정에 대해 한국PD연합회와 언론노조, 참여연대 등 9개 언론·시민단체는 “여야 추천 6대 3이라는 위원 구성 하에서 독소 조항들을 그대로 둘 경우, 그간 방심위가 보인 이중 잣대에 의한 정치심의 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강성남 언론노조 위원장은 “개선 대신 개악을 택한 방심위 해체 투쟁에 나설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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