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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음악 프로그램의 계보를 만들다

[홍경수 교수의 PD학개론 ⑥] 박해선 박스미디어 대표 홍경수 순천향대l승인2014.01.16 10: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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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좋을까? 이번 글을 쓰는 내내 망설였다. 무엇보다 그와의 인연이 망설임의 원인이 되었다. 먼저 그 망설임의 원인을 털어놓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자. <노영심의 작은음악회>, <열린음악회>, <이문세 쇼>, <이소라의 프로포즈>, <도전 주부가요스타>, <도올의 논어이야기>,<윤도현의 러브레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프로그램을 처음 만든 박해선 피디가 이번 인터뷰의 대상이다. 박해선 PD의 필모그래피는 필자의 그것과 많이 겹친다.

1995년 예능 PD로 KBS에 입사한 필자가 처음 맡았던 프로그램은 <열린음악회>였으며, <가요무대> 조연출을 하던 도중 자막으로 만든 예고 프로그램으로 화제가 되자, 박해선 PD가 찾아왔다. 그 후 필자는 <이소라의 프로포즈> 조연출을 하게 되었으며, <도전 주부가요스타> 조연출을 거쳐 <도올의 논어이야기> 연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양에서 시작해서 예능으로 건너온 그와, 예능에서 출발해 <낭독의 발견>, <단박 인터뷰> 등 교양으로 넘어간 필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되었다. 그는 KBS 예능국장을 거쳐 현재는 외주제작사인 박스미디어 대표로 있고, 필자는 학생을 가르치는 연구자가 되어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디시절 필자가 방송 연출에 대해 제대로 배우게 된 것은 그를 만나고부터였다. 그리고 방송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었다.

이런 인연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박해선 PD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약 20여 년간 한국의 대표적인 쇼 PD로 활약했고, 음악 토크쇼라는 장르를 만들어 낸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활약 덕분에 KBS는 정통 음악프로그램을 이어나가는 채널로 자리매김했고, 괜찮은 음악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에 가수들을 투입할 수 있는 훌륭한 당근 역할을 해냈다. 그 후 KBS 예능국장으로 KBS의 대표적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1박 2일>, <해피투게더>, <미녀들의 수다>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다. KBS를 떠난 뒤에는 외주제작사 및 공연기획사인 <박스미디어>를 설립하여, 각종 음악공연 기획은 물론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JTBC의 <히든 싱어>의 외주제작을 맡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쇼 PD인 박해선 PD를 12월 초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만나자마자, 새로 음반을 만들 가수의 신곡을 들려주며, 곡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무거운 인터뷰가 부담이 된 듯, 다소 긴장이 엿보였다.

  ▲ 박해선 박스미디어 대표 ⓒ강의정  
▲ 박해선 박스미디어 대표 ⓒ강의정
: 우선 먼저 최근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어떤 일 하고 계신지?
: 요즘 하는 일은 JTBC <히든싱어>와 그 뒷이야기를 담은<히든 스토리>, KBS <1대 100>을 외주제작하고 있습니다. KBS에서 방송하는 <불후의 명곡>의 포맷이 상해미디어그룹에 팔려서 중국판 <불후의 명곡>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서울 가요 대상’ ‘가온 차트 대상’ 같은 시상식 프로그램을 하고 ‘지산월드 락 페스티벌’ ‘아시아 송 페스티벌’을 제작했습니다. 돈 버는 걸로는(웃음) 주로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지역 아이돌 공연을 하고 있지요.

: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은 어떠했는지요?
박: 시골에서 소 돼지 꼴 베고 소 몰고 뒷산 올라가서 소 풀 먹이고 그런 게 어린 시절이죠. 학교 갔다오면은 대개는 소를 몰고 대룡산이라고 하는 산에 올라가서 소를 먹이고, 그때는 온 동네 아이들이 전부 다 학교 갔다 오면 소를 몰고 뒷산에 올라가요. 뒷산에 다 올라가서 해가 질 때 까지 놀아요. 어둑어둑해질 때 소 고삐를 잡으면 소가 집에까지 끌고 가죠, 자기 집을 아니깐. 거기서 제가 어린 시절에 특징적으로 봤던 거 하나가 제 고향은 그 뒷산에서 보면 멀리 바다가 보였어요.

: 고향이 보성이죠?
박: 예, 보성군 미력면이죠. 거기서 보면 회천바다가 보이는데 그 바다가 리아스식 해안이잖아요, 해안선이 구불구불한데 그 해안선에 수평으로 기차가 쭉 지나가는 게 보여요. 그런데 수평선이니깐 기차가 산 위에서 보면 저 아래로 보여야하는데 멀리 있잖아요. 그럼 제 눈높이로 정확하게 보여요. 그러니깐 바다도 떠있는 거 같고 기차도 위로 이렇게 보여요. 이게 그 시각의 편차가 줄어드니깐 수평선이 이렇게 보이는 거죠 눈높이하고 똑같이. 그것을 보면서 자랐던 게 얼마나 행운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다음에 산 위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면 굉장히 큰 너른 농지가 펼쳐진 개활지가 보이는데 소나기가 오면 이런 주렴같이 소나기가 쫙 오는 게 보여요. 그게 제 어린 시절에 봤던 기억 중에 너무 특별하고 좋은 기억이예요. 산꼭대기에는 너른 평지가 있었는데 가을이면 보라색 들국화가 온 산을 뒤덮어 그런 풍경들이 제가 어린 시절에 봤던 특징적인 커트예요.

홍: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셨어요?
박: 형이 다섯 명이나 되어서인지 집안사람이나 동네사람들이나 그냥 육째라고 불렀어요. 아버님은 군청에 다니시다가 나중에 면장을 오래 하셨는데 그 면 소재지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면 아버님이 시상하시던 게 기억이 납니다. 달리기 잘하는 애들 상주고 그런 거. 그때 가슴 설레던 기억 하나는 새로 부임한 지서장 딸이 이사를 왔는데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어요. 얼굴이 아주 하얀 애가. 어느 읍내나 도시에서나 온 거겠죠. 가지런하게 단발머리를 한 애가 전학 첫 날에 교단에서 자기소개를 한 다음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어요. 촌놈들 야단이 났죠. 운동장에서 오래된 벚나무의 벚꽃이 떨어질 때 운동장 청소 중에 교장선생님이 지나가다 시키시면 바로 두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요. 근데 그 아이의 이름은 이제 기억이 안나요. 그게 도회적인 얼굴 흰 소녀를 처음 봤던 기억인데, 지금 생각하면 황순원의 <소나기> 한 장면 같아요.

홍: 어린 시절은 자연과 함께…….
: 이를 테면 수업하다 보면 주머니에서 개구리 꺼내고 그런 애도 있었고, 도시락 같은 데에 뱀을 넣어 가지고 와 가지고 위협하기도 하고, 한없이 좋은 시절이었죠. 학교 가거나 학교 끝나고 올 때 멀리서 도랑물이 이렇게 내려오잖아요. 그럼 그 물을 마셨어요. 물이 깨끗했기 때문에 괜찮았어요. 달팽이가 이렇게 기어가고 올챙이가 막 이렇게 가는 걸 보면서 물을 마시는 거예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그 옆에 삼밭 대마 밭이 있었는데 거기를 지나가면 그 한센병 환자가 애들 잡아서 간 꺼내간다고 막 도망갔던 기억이 나요. 그곳을 지나갈 때 공포스러웠던 기억이 나요.

: 어릴 적 형제가 많아서, 굉장히 귀여움 많이 받고 자라셨을 거 같아요.
박: 시골에서 형제가 많다는 건 부모님보다 형들하고의 생활이 더 많다는 것을 뜻하죠. 인간은 숫자가 많아지면 위계질서를 필요로 하잖아요. 특히 여섯이 줄줄이 아들이라 집안에서 사회생활을 배웠죠. 그리고 새 옷을 못 입었어요. 이미 모든 것이 낡았으되 버리기는 아까운 상태로 다 구비되어 있으니까요. 전 대학 다닐 때 큰 형님 대학 시절 입었던 양복을 꺼내 입었어요. 그걸 입었을 때 애들이 ‘오~세련된 옷’이라고 칭찬을 하는 거예요. 큰형하고 저랑 열아홉 살 차이거든요, 그러니깐 유행이 돌고 돌아 다시 온 거예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시골에 다니러 오셨던 서울 당숙이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한다.’는 철학을 설파하시며 제 손을 붙잡고 허리까지 발이 빠지는 눈 쌓인 신작로를 지나 서울에 올라와 형들하고 살았죠.

홍: 5학년 때 서울 어디로?
박: 서대문구 갈현동 큰형님 댁에 살았죠. 시골에서 누가, 비가, 오다마 이런 과자를 먹다가 서울에 오니까 제일 유명한 게 신앙촌 밀크 캐러멜이었어요. 비닐로 싸서 실로 묶은 가로 세 개 세로 세 개짜리 육면체였는데 촌놈 입맛에 충격적이었죠. 입속에서 씹히고 녹는 과정의 부드러움이 시골 과자와는 완전히 달랐어요. 또 서울 애들이 달리 느껴졌던 점은 비행기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거였어요. 미그기가 어떻고 비행기 모형 그림 보면 재미있어 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몰라 아주 기가 죽는 일이었어요.

  ▲ 홍경수 교수와 인터뷰 중인 박해선 대표 ⓒ강의정  
▲ 홍경수 교수와 인터뷰 중인 박해선 대표 ⓒ강의정
자연 속에서 감수성 키우며 성장

홍: 그래서 이제 대학을 홍대 도시계획과를 졸업하시고 KBS에 입사하신 건 언제죠?
박: 1983년도. 방송을 하면 뭘 하고 싶냐 해서 <동물의 왕국> 하고 싶다고 했어요. 사실 방송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예요. 고등학교 때는 방송반 했거든요. 대학에선 대학신문사에 있었고, 그 다음에 직장은 방송국에 들어온 거고.

홍: 어떤 모델이나 그런 것도 없었죠?
박: 롤 모델보다 오디오적으로 어릴 적 저한테 기쁨을 주던 게 하나 있었어요. 시골에서는 낮 12시가 되면 오포라는 것이 울려요. 일종의 사이렌 소리죠. 시계가 귀할 때니까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 점심 먹고 하라고 정오를 알려주는 일종의 시보였는데 그 소리가 들리면 왠지 반갑고 행복했어요. 그래서 길을 갈 때라면 멈춰 서서 그 오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 듣고 나서 움직였어요. 전시라면 공습경보 같은 것이었을 텐데…….

: 소리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준 거네요?
: 그리고 라디오를 시골에서 확성기로 틀어줬어요. 시골에서 우리 집만 TV가 있었는데 왜냐면 형이 일찍 취직을 해서 시골에 텔레비전을 보내줬어요. 텔레비전을 보내 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멍석 깔고 텔레비전 끝날 때까지 보는 거죠. ‘이제 가라!’ 할 때까지 그때까지 봤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래서 어렸을 때는 텔레비전이 들어왔고 텔레비전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극장영화가 죽었어요. 리얼리티가 떨어지니깐 더빙하고 그래서 극장 쇼도 하고 가수들 오고 쇼도 하다가 그것마저 그만두고 극장이 문을 닫는 경우에 처했어요.

중학교 겨울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니까 친구들이 밤에 비밀 모임을 갖자고 해요. 실직한 읍내 극장의 상영 기사가 어디서 구했는지 소리도 없이 비 내리는 포르노를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보여주고 청소년들한테 돈을 받아가는 거였어요. 손바닥만 한 화면이 공부방 벽에 배달된 거죠. 텔레비전이 등장하며 극장을 죽였고 그 때문에 서양 여자가 벌거벗고 시골마을에 숨어든 거였어요. 길이가 10여분이나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상영이 끝나 기사가 엉거주춤 돈 받아 가고 나면 서로 얼굴보기 머쓱한 형들이 “야, 토끼 서리나 한 마리 해 묵자” 그러면 밖에서 애들끼리 물 끓이고 그 사이에 낮에 봐둔 토끼 한 마리 잡아와서 껍질 벗기고 그럴 때에요. 시골은 묘한 게 있어요. 완전 시골은.

: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낸 것이 시인으로서 PD로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건가요?
박: 제 느낌의 원천이고 상상력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 시골에서 느끼고 산 자연처럼 좋은 건 없죠. 몸에도 마음에도. 결국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존재하는 감수성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싶어요.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총량도 안 변해요. 전 그렇게 봐요. 외로움의 총량도 안 변할 거고 그리움의 총량도 변치 않고 그대로 모든 시간 속을 관통한다고 봐요. 지금보다 더 발달하지 못했으니까 옛날 사람들이 덜 행복했다거나 물질문명에 너무 물들여졌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덜 행복하다거나 그런 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세상에 존재하는 질량불변의 법칙이 행복이나 불행이나 기쁨이나 슬픔에게도 다 적용된다고나 할까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한편의 수채화가 그려지는 듯했다. 어린 시절을 자연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이야기에서 시인이며, 쇼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피디로서의 경력이 겹쳐져 보였다. 박해선 PD는 이십대 중반에 월간 <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고, 시집 <늑대와 삐비꽃>(1999), <그리움에게 안부를 묻지 마라> (2010) 등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냥 시인이 아니라, 브라운관의 시인이었던 셈이다. 윤석호 PD가 농대 교수로 근무한 부친 덕분에 자연 속에서 자란 것이 그의 드라마에 영향을 주었듯이, 박해선 PD의 감수성도 자연에 힘입은 바 큰 것 같다.

홍: 입사하셔서 처음 맡았던 프로그램 기억나세요?
: 현정주 선배를 따라다니며 <TV미술관>조연출을 했어요. 그 다음에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5년 가까이 했지요.

: 제목이?
: <TV유치원>이었어요. 당시 어린이 팀을 이끌던 탁월한 PD 이청용 선배를 그 프로그램에서 만나 방송이라는 것을 왜 해야 하는 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배웠죠. 그 선배를 만난 것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봐요. 제 눈에는 모든 것에 완벽하셨으니까. 연출뿐만 아니라 출연자 대하는 법, 술 마시는 법, 선후배간의 관계, 여자관계까지 PD로서 가져야 할 모든 기초 소양을 그분에게 배웠다 하면 딱 맞는 말이에요.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어느 출연자나 네가 출연시키고 바우처(출연료 지급문서)를 끊어 주지만 너에게 무시당해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 였어요. 그 말씀을 그 후 그 말이 필요하다 싶은 후배들에게는 해 줘요. 그분 대신에……. 교양 프로덕션 중에서 최고인 허브넷의 이미애 대표가 그분의 친동생인데 지금 저와 같은 건물 위아래 층 사무실에서 서로 의지하며 일하고 있죠. 인연이란 건 신비로워요.

홍: 그분한테 많이 배우셨네요?
: 다 배웠죠. 그 양반한테 다 배웠다고 생각하는 거죠. 많은 분들께 배우고 사랑을 받았지만 그 다음에 스승이라고 생각한다면 안국정 본부장님이예요.
: 당시 부장이셨어요?
: 제가 입사하고 나서 거의 바로 마흔 살에 국장이 되신 걸로 기억돼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진 다음이라 KBS가 어수선했어요. TBC를 비롯한 여러 매체 식구들이 한 살림을 살아야했던 힘든 시기였고 비행기로 치면 강한 엔진음과 많은 연료소모가 필수적인 이륙 전 단계였어요. 당시 이원홍 사장의 신임과 교감으로 선봉장에 섰던 분이 안국정이라는 장군이죠. 제가 어린이 프로를 하고 있을 때 ‘희망사항’이라는 노영심 씨 노래가 장안에 최고 화제이던 시절이 있었어요. 전 국민이 그것만 부르고 들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죠. 그때 제가 노영심 씨랑 가깝게 지냈는데 안국정 본부장님이 어느 날 부르셔서 “너 영심이 데리고 프로그램 하나 해봐라” 이렇게 지시하셨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에요.

홍: 안국정 본부장이 그럼 제안을 먼저 하신 건가요?
박: 그렇죠. 그 한마디 지시가 프로그램이 된 거죠. 이런 콘텐츠를 만들면 신선한 결과가 있을 거라는 것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분인 거죠. 학전 소극장에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의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어요. 스무 세 살짜리 처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당신이 내 삶의 유일한 위안이다. 이 시간이 기다려진다’며 60대 70대 남성들까지 남녀노소 팬레터를 보내오는 진기한 풍경이 연출되었어요. 방송 끝나고 나가는 자막을 보고 박해선이라는 이름이 여자 이름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느 여고생이 ‘언니 어떻게 하면 PD가 될 수 있나요?’ 하는 편지를 저에게 보내오기도 했지요.

그 전엔 음악토크쇼 장르가 없었잖아요. 근데 나중에 <이소라의 프로포즈> 끝낼 때 쯤 되어서 사람들 입에 음악토크쇼란 말이 일반명사가 되었어요. 토크쇼, 음악쇼, 오락쇼 이랬지 음악토크쇼라고 안했거든요. 심야 음악과 토크를 곁들이 프로그램은 음악토크쇼다 하는 방송 장르명이 생겨난 거죠.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매직으로 까만 부분을 다 칠하고 <노영심의 작은음악회>라고 쓰인 글씨만 남겨 카메라나 객석에 보이게 큐카드를 만들어 썼어요. 딱 들고 있으면 객석이나 카메라에 보이게. 자기 프로그램 로고가 뒷면에 박힌 큐카드 들고 방송한 게 그게 처음이죠 아마. 그리고 방청객 사연을 우편으로 신청 받아 사연을 길게 써 보낸 사람이나 의미 있는 사연이 있는 사람에게 프로그램에서 초대장을 보냈어요. 그 초대장을 가져온 사람들을 객석으로 하고 공연을 했어요. 그런 선례가 없었다고 알아요. 공연이 시작되면 NG 라는 것을 안냈고 틀린 것도 다 찍어서 편집을 했기 때문에 객석의 사람들이 현장에서 방송인 줄 모르게 했어요. 공연인 줄 알게 했어요. 야외에서 일부러 노을 무렵 색깔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경우 외에는 녹화를 낮에 안 했어요.

스태프들과 많이도 싸웠죠. 근무시간 놔두고 왜 밤에 하냐고. 낮에 올 수 있는 방청객은 낮에 열심히 일할 시간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일반 공연장의 공연시간 하고 맞춰서 하면 보러오는 사람들의 정서도 그렇고 하루를 열심히 산 양질의 객석이 와요. 그게 제 마음에 좋았어요. 그때부터 음악 방송프로그램 녹화가 밤에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그냥 오후나절에 시작해서 끝나면 저녁 먹으러들 갔거든요. 객석이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리허설 할 때에는 없던 긴장감이 그 무대에 생겨요. 그런데 그냥 동원된 객석이 앉아있으면 무대까지 헐렁해지고 맥이 빠지죠. 공연 중에 눈이 초롱초롱한 객석을 클로즈업으로 많이 찍었어요. 나중에 방송으로 본 사람들이 자기 나왔다고 확실히 알고 좋아하게 하고 객석으로 참여할 때도 행여 자기 얼굴이 찍힐지 모른다는 긴장감 같은 것도 분위기에 도움이 되었죠.

그래서 객석과 같이 호흡한다는 거. 앞에서 MC나 가수가 침을 튀기고 말을 하고 노래를 하면 맨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침이 맞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로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스튜디오에서 할 때도 소극장 때처럼 일부러 작고 불편하게 딱딱한 등받이 없는 좌석에 앉히기도 했어요. 그래야 몸이 뒤로 젖혀지지 않고 얼굴이 앞쪽으로 기울며 더 집중한다고…….그렇게 가까이에서 공연을 하는데 카메라맨이 커다란 카메라를 몰고 이리저리 움직이면 연주자 객석 진행자 모두의 신경이 빼앗기기 때문에 몰입에 방해가 되어서 카메라를 다 뒤로 빼고 앞에 객석을 두기 시작한 거예요. 카메라 팀과 무진 다퉜지요. 객석 너머에서 카메라 워크를 하려면 뷰파인더 쳐다보느라고 고개 아프다고. 네가 카메라 하라고. 내가 PD하겠다고.

무대 앞에 객석, 그 뒤에 카메라 왔다 갔다 하는 길, 그 다음에 방청석 이렇게 해서 앞에 있는 사람과 가수가 눈을 맞출 수 있게 했어요. 눈이 마주치지 않으면 멀리 허공을 보거나 기계에다 이야기해야 하잖아요. 허공에 대고 노래를 하는 거하고 실제로 앞에 있는 사람의 눈을 보고 노래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그것의 차이점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 굉장히 많은 기회를 안본에게서 받았어요.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를 한지 1년 쯤 되었을 때라 기억되는데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를 불렀던 서울대 트리오와 가나미술관에서 녹화를 하고 있었어요. 그곳으로 안국정 본부장님 전화가 온 거예요. “너 녹화 끝나면 영심이 팀 데리고 다 들어와” 그래서 겁이 났죠 ‘뭘 잘못했나?’ 그런데 회사로 갔더니 영 생각지 못했던 지시를 내리셨어요. 제목도 없고 스튜디오도 없고 MC도 없고 세트도 없고 “4일 후에 방송 나가야 하는 쇼프로그램 하나 만들어! 전 국민이 좋아하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쇼여야 해.” 하셨어요. “네” 하고 돌아섰지요. 그때는 또 뭐든 지시가 내려지면 군대처럼 일이 착착 진행되는 시기였어요. 안본 지시라고 하면 모든 스태프가 그 지시에 맞추려 의심 없이 노력하는 카리스마와 장악력이 최고일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만들어 진 프로그램이 <열린 음악회>에요.

이전 박현태 사장 시절에 선배 조의진 PD가 <가요무대>를 만들어 공전의 히트가 났고 KBS 대표 프로그램이 되었듯이 TBC 사장 출신 신임 홍두표 사장도 뭔가 새로운 쇼 프로그램이 나와 주길 기대했던 것 같아요. 당시는 KBS가 조직 실험을 하느라 1TV는 TV1국장, 2TV는 TV2국장 체제로 하고 장르구분을 없앴던 시절이에요. 그 덕에 대한민국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부 김웅래 선배가 제 CP였지요. 스튜디오가 없어서 CP는 서울시내 체육관이나 강당 수배하느라 바쁘고 저는 세트 디자이너랑 각 스튜디오 돌며 떼어다 응용해 붙일 세트 없나 돌아다녔죠. 디자인할 시간도 제작할 시간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공개홀에 녹화 중인 프로그램 세트가 무정형이어서 “저걸 늘어뜨리고 붙이고 해서 갑시다” 하고 계원예술전문대학 강당을 빌려 노영심 제작진이 만든 게 첫<열린 음악회>에요. 내용에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었어요. 이 쇼에서는 자기노래를 부르더라도 지금 홍보 중인 노래는 못 부른다, 자기의 오래된 히트곡은 부를 수 있다. 남의 노래 즉 가수 자신이 자기노래 말고 좋아하는 이른 바 18번 부르는 걸 선호한다. TV에는 들을 수 없는 매니지먼트와 상관없는 좋은 노래, 외국 민요나 학창시절 교과서에 나온 노래를 불러보자. 팝송은 ‘올디즈 벗 구디즈’를 넣어 웬만하면 따라 부를 정도의 곡을 한 곡 씩 넣는다. 음악은 다 라이브로 하고 댄스가수와 트롯가수의 출연을 금한다. 이런 것들이 전제되어야만 다른 쇼프로와 차별화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녹화를 떴어요. 방송은 나가야 되는 데 제목이 없잖아요. 방송 나가는 날 오전에 편집하면서 온가족이 모두 볼 수 있게 하자는 의미에서 <열린음악회>라고 정했지요. 지금도 입에 붙는 이름이잖아요?

홍: 그럼 <열린음악회> 기획자이시네요?
박: 제게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지시한 안국정 본부장님이 실제 기획자인 셈이고 그 나머지는 시대가 만들었죠. <열린음악회> 10년사에 보면 거기에 제가 직접 쓴 1회 큐시트가 들어있어요. 그거 보니깐 정말 기분이 신기하대요. 저는 큐시트를 다 손으로 썼거든요. 기계를 빌려서 쓰면 느낌이 달라지니깐 제 글씨로 쓰고 제가 계산해서 썼어요. 저는 시작하고 2회까지만 했고, 지금까지 20여년 가까이 해오고 있으니 수많은 연출자들이 꽃을 피운 프로그램이고요.

1990년대에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로 시작해, <이문세 쇼>,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현재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이르는 음악토크쇼는 독특한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객석이 아름다운 무대, 가수들이 출연하고 싶어 하는 무대, 독특한 진행자가 프로그램을 이끄는 힘이 있는 무대, 꽉 차 있기보다는 여백이 있는 무대는 박해선 피디가 설계한 것이다. 설계도의 시방서에는 라이브 연주를 고집할 것과 방송 나가는 시간과 비슷한 시간에 녹화를 할 것이 적혀있다. 이는 출연자와 시청자를 같은 시공간에 머물도록 하는 기제인 셈이다. 녹화의 시간을 방송의 시간에 맞추는 현장성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을지는 모르나, 실행하고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 박해선 대표 ⓒ강의정  
▲ 박해선 대표 ⓒ강의정
: <열린 음악회> 하시고 <이문세 쇼>는 언제하신 거예요?
박: 이제 1992년에 노영심 쇼 시작해서 2년을 했거든요, 그 다음에 93년에 <열린음악회> 시작해서 런칭을 했고, 근데 TV 프로그램은 그게 참 묘한 게, 영화는 한 편으로도 주연, 배우, 제목, 감독을 기억해요. 근데 TV 프로는 2년을 해야 기억합니다. 1년으로는 부족해요. 그만큼 그게 밀도가 달라요. 노영심은 2년 했어요. 그 다음에 <기쁜 우리 젊은날>은 1년 반했어요.

홍: 그건 몇 년도에?
: 1994년부터 했어요. 노영심 끝나고 노영심 끝난 건 뭐냐면, 노영심이 2년쯤 되서는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너무 오래했어요. 그렇잖아요, 우리나라에 토크쇼의 아티스트라 그러면 6개월이면 동이 나요. 그게 정해져있어요. 할 만한 사람을 골라서 두세 명을 무대에 세우면 6개월이면 동이나요. 딱 동이 나요. 그거를 교집합하거나 다시 세우면 세 학기 내지 네 학기가 최대입니다.

하여튼 1년이 52주잖아요, 가령 26편을 하면 ‘어? 누구하지 다 떨어졌는데’ 억지로 찾으면 52주까지 갑니다. 그러니깐 장르에 상관없이 전채 있고 메인 디쉬 있고 디저트 있는 거를 프로그램으로 생각한다면 식사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죠. 콘텐츠도 소비자가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면 26주면 딱 동이 납니다. 할 만한 사람 다 했어, 26주 곱하기 세 명 하면 78명이 되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토론하는 자리가 아닌 자리에 앉혀서 말을 듣거나 음악을 듣거나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78명이 넘어가면 끝나요. 그러니깐 6개월이면 끝나죠. 그 다음부턴 재탕이나 교집합이죠. 그래서 2년을 했어요.

방송론에 있지 않은 엉터리 같은 제 논리예요. 그러고 끝났는데 제가 아이디어 공모에 제안을 했는데 <기쁜 우리 젊은 날> 이란 걸 했어요. 그랬더니 그땐 TV 1국, 2국 시절이었고, 전 교양 쪽인 TV 1국에 소속되어 있는데 어느 날 TV 2국 조의진 부장이 계속 찾는 거예요.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는 이 프로그램을 쇼에서 하라고 안본이 그러는데 무슨 소리냐? 아이디어 낸 사람이 해야지, 당신이 아이디어 냈잖아?” 이렇게 하는 거야, 그래서 제가 이 일 때문에 쇼 파트로 넘어갔죠.

: 예능 쪽에 와서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연출하신 거네요?
: 유찬욱 PD와 격주로 했어요. 첫 회를 뜨는데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가서 떴어요. 점심을 먹은 뒤 먹구름이 점점 몰려오는 거예요. 7시 공연인데, 야 구름이 피해가야 되는데 피해가야 되는데(웃음)……. 오후에 먹장구름이 딱 지더니 녹화를 할 때는 아예 물을 쏟아 부어요. 그런데 녹화 떠야 되고, 근데 다행히 삼성 전자에 무슨 비닐 옷 같은 게 있었어요. 그래서 우의를 나눠주고 노래를 하는데 가수가 노래를 하다가 소리가 안 나요. 마이크가 물먹어가지고 그래서 마이크 바꿔가지고 부르고 해 가지고 그래서 첫방을 낸 거예요. 1년 반인가 했어요. 이제 아 이거 수명을 다한 거 같다 이거 그만 해야겠다 하는데 그때 안본이 “야 MBC <주부가요 열창> 저렇게 잘되는데 보고만 있을 거야?” <도전주부가요스타> 라는 걸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목이 안 좋다고 도전스타가요열창, 도전주부가요스타, 주부스타도전가요 “이게 뭐냐? 도대체 누가 그 이름을 외우겠냐?” 제가 그랬어요. 그래도 하라는 거야 그래서 시작을 했죠. 6개월을 했어요, 그러고 물려줬죠.

<도전주부가요스타>는 한 10년을 했을 거예요. 다른 포맷은 없나 해서 밀어내는 방식을 택했어요. A라는 사람이 부르고, B라는 사람이 부른 뒤, 더 좋으면 밀어내기로. 그걸 6개월 하고 있으니깐 안본이 와서 그러는 거예요 “야, 박해선이 다 죽었다, 히트작을 내던 놈이 아줌마들하고 놀아?” 그래서 “그럼 뭐 이문세랑 프로그램하기로 했는데 도와주실래요?” 하니깐 “이문세? 어 좋아, 들어와 봐” “돈 많이 달라고 하는데요” “얼마나 달라고 해?” 그때 출연료가 250만원이었어요. 지금은 아마 1500만원이나 2000만 원쯤 될 거예요. “이거 해주실 수 있어요?” 하니깐 “그것만 해주면 되냐?” “네” 해서 하게 된 거예요.

홍: 출연료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박: 경영본부에서 항의 들어오고 그 일 때문에 안본도 난처하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후배와의 약속을 지켜주셨어요. 다른 결제부서 가니깐 “이걸 이문세가 다 가져가?” 이럴 때예요. 근데 그거를 이문세랑 하기로 해놓고 다르게 하는 방법이 뭐있겠나 해 가지고 생방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 한 20 퍼센트까지 나온 거 같은데, 맨 처음에 시작하는 거를 1회가 아니고 0회로 하자 그랬어요. 고은경 작가, 이문세, 나 셋이 만나서 다 또라이들이죠. 그래서 이거는 1회가 아니고 0회다 프롤로그니깐 0회다 그러니깐 행정반에서 0회라 그러면 회계처리가 안 된다(웃음).

그러니깐 행정에서 난리가 난거야. 이 세상에 0회가 어딨냐고, 회계처리를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우겨가지고 하게 됐는데, 첫방송을 하는데 맨 끝에 박상원하고 윤석화가 뮤지컬 ‘미스 사이공’ 주제가를 듀엣으로 부르는 게 맨 엔딩곡이예요. 그래서 엔딩 곡을 시작했어요, 시작을 하고 쭉 가는데 1절쯤 가는데 전화가 왔어요. 누구냐니깐 본부장이라는 거예요. 카메라 천천히 보이지 않게 줌인하고 무슨 일이냐니깐 “이 노래 끊지 마라, 이 노래 끝까지 들어라” 소름이 돋았죠. 본부장이 생방을 하는데 이 노래 끊지 말고 끝까지 내보내라는 거예요. 안국정 본부장이 대단한 미적인 감성을 가진, 뭐라고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주조에서 지랄하는데요” “내가 책임질게 전화 끊어” 난리가 났어요. 주조에서 “야 이놈아 끊어, 시간 오버하면 니가 책임질 거야? 보도국 24시 시작시간 맞춰야 되는데” 그래도 전화 내려놓고 끝까지 다 했어요. 방송 스크롤까지 다 내고 털퍽 주저앉았는데 전화가 또 왔어요. “너희 어디서 뒤풀이 하냐?” 그래서 “네? 홍대 뒤에 문세네 까페요.” 우리가 끝나고 문세네 갔는데 전화가 왔어요. “어디냐? 나 지금 홍대 앞에 차 대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 알려줘라” 그래서 새벽 5시까지 우리 뒤풀이에 끼고 아침에 가면서 “잘했다” 딱 한마디만 하셨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분한테 지연 혈연 학연과 상관없는 더 강한 연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그때 배웠어요.

  ▲ 박해선 대표 ⓒ강의정  
▲ 박해선 대표 ⓒ강의정
1990년대의 쇼 이야기를 듣던 중 끊임없이 등장하는 안국정 본부장(일명, 안본)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필자가 1995년 KBS 입사할 당시 본부장을 맡고 있던 안국정 본부장은 예능 PD를 지망해서 들어온 필자에게 “얼굴은 교양 프로그램 하게 생겼는데 왜 예능 하겠다고 하느냐?” 물었고, 필자는 “겉보기와 달리 끼가 많다”고 대답한 뒤 <열린음악회>에서 일하게 된 기억이 있다. 연말 종무식에서 후배들의 술을 다 받아먹고, 술을 돌려준 폭탄주의 거인. 안본은 PD들에게 호오가 확실히 갈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총애하는 PD들과 그렇지 않은 PD들의 평가도 상반되었다. 박해선 PD의 인터뷰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그는 프로그램 기획에서 뛰어난 감식안을 가지고 PD들을 움직이고 관리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후 SBS로 건너가 민영방송 SBS를 부흥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방송 역사에서 안국정 본부장이 한 역할에 대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 <이문세 쇼>는 얼마나 하셨죠?
: 1년. 1년 했는데 문세가 안한다고 한 거예요. 죽어도 안 한다, 굉장한 쇠고집이거든요. 한편으로는 달래면서 KBS IBC 현관 앞에서 강승원 음악감독이랑 있는데 가수 이소라가 지나가는 거예요(웃음). “어? 소라 어디 가냐?” 했더니 라디오 간대요. 그래서 “라디오 잘 해라” 그래 놓고서 소속사 사장한테 얘기한 거예요. 이소라 데리고 프로그램하면 어떻겠냐고. 좋다고 해서 라디오 끝난 뒤 이소라를 동아기획으로 데리고 가서 설득했죠. “너는 나와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제가 무슨 MC를 해요”, “네가 나오기만 해도 된다니까” “할 줄 모르는데요” “그럼 앉아서 웃기만이라도 해라. 너는 처녀이니 기본 칼라는 보라색으로 간다. 초승달 이미지와 별의 이미지 같은 것이 프로그램 이미지가 될 것이다. 첫 회는 네 단독 콘서트로 간다. 네 팬클럽으로만 구성된 특별 공연으로 하자” 다른 게스트 섭외할 시간이 없어서 단독콘서트로 간 거고 객석도 급해서 팬클럽으로만 한 거고 다급했어요, 모든 것이. 연출도 개발새발 했을 거예요. 했는데 방송이 나가자 대박이 난 거예요. "야 <이문세 쇼>보다 더 좋다" 이렇게 된 거죠(웃음).

: 1995년인가요, 1996년인가요?
박: 1996년 일거예요. 그때부터 이소라가 4년 7개월을 했어요. 박권상 사장이 4주년 기념방송 때 상을 주러 분장실까지 내려와 가지고 상을 주시면서 하시는 얘기가 “박 PD, 외국에도 이런 프로가 있습니까?” 물어보시더라고. IMF 기간 내내 광고가 완판된 건 KBS에서<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유일했죠. 6개월이면 동이 난다던 출연자 군에 대한 우려도 아홉 번이나 넘긴 셈이고 이때에 이르러서 ‘심야 음악 토크쇼가 문화가 되었구나’ 라는 자부심도 생겼었어요. 물론 <이문세 쇼> 때부터 인터넷이 조금씩 발달되기 시작해 객석 신청자 사연들이 매주 전화번호부만한 두께로 책이 되어 배달되었지만요.

: 그 다음에 이제 윤도현으로 갔나요?
: 윤도현은 제가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이기원 PD한테 연출을 물려주고 CP를 했죠.
홍: 윤도현도 실은 박 피디님이 섭외하신 거죠?
: 오래도록 함께 해온 팀과 함께 정했죠. 제목도 <이소라의 프로포즈>였으니까 이번에는 러브레터로 하자 해서.

홍: 강승원 음악감독하고는 언제 처음 시작하신 거예요?
: 강승원 씨하고는 <노영심의 작은음악회> 한 두 편 하고 만났나? 아무튼 노영심 씨가 어린이 프로에 자주 출연할 때였는데 강승원 씨가 노영심 연습하러 다니던 녹음실 겸 연습실 주인이었어요. 찾아가서 그냥 우리 프로그램에 정식 음악감독을 해달라고 했죠. 어떤 음악프로에도 음악감독이 없던 시절이에요. 그래서 행정반에 음악감독이라는 지급항목 자체가 없어서 작가로 등재해 감독료를 지급하고 자막에는 음악감독으로 올렸죠. PD가 왕이던 시절이라 연출 파트에 PD 외에 감독이란 칭호로 쇼프로그램 자막에 올라간 최초의 인물이에요.

박해선 PD와 함께 한국 음악프로그램의 계보를 만드는 데 기여한 스태프 중 기억할 만한 사람이 바로 음악감독 강승원이다. 대학시절부터 음악을 해온 그는 김광석이 불렀던 ‘서른 즈음에’의 작사 작곡자이다. 그는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부터 현재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이르기까지 20년가량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PD와 작가들은 계속 바뀌었지만, 음악감독으로서 묵묵히 활동하고 있는 그 덕분에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일정 정도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만들었던 '뮤지션 특집'의 경우, 강승원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보인다.

  ▲ KBS <열린음악회> ⓒKBS  
▲ KBS <열린음악회> ⓒKBS
채널=밥상, MC=그릇, 출연자=음식

홍: 그리고 윤도현, 다음에 이하나로 이어지죠?
박: 그렇죠. 시대가 모호해 윤도현이 하차를 하고 제가 회사를 떠난 다음에 팀이 이하나를 MC로 했고 몇 달 하다가 유희열로 바뀌죠. 그래서 제가 전화를 해서 걱정을 전했어요.프로그램에서 MC라는 건 음식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보다 음식이 크면 탁자에 음식이 닿아 먹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그릇에 음식이 너무 작게 담기면 담긴 음식이 초라해보여서 모양을 망친다. 그래서 담기에도 좋아야 되고 크기도 알맞아야 되고 또한 합당해야 된다. 그게 MC와 출연자의 관계다. 음악 토크쇼의 MC라는 건 일단 음악을 깊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음악 하는 사람들이 나왔을 때 음악이라는 음식을 담을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이 담으면 좋은 대바구니에다가 스테이크를 올려두고 음식을 담았다고 하는 거와 같다. 여우와 두루미 우화 바로 그거다. 음악인을 데리고 하는 음악토크쇼에서는 진행자가 기타로 날리는 사람, 피아노로 끝내주는 사람, 노래로 깊이를 보여 주는 사람, 그런 대표성이 없으면 결정적일 때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출연자는 음식이고 MC는 그릇이고, 채널은 밥상이고 그런 거다 했지요. 좋은 옷이라고 아무에게나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잖아요.  

홍: 그리고 <도올의 논어이야기>를 프로듀싱 하셨죠?
: 도올 선생님 얘기가 나온 것은 <이소라의 프로포즈> 신년특집 회의를 하던 중에 신년 덕담도 들을 겸 모시면 어떠냐는 의견이 일을 키운 거죠. EBS에서 노자인가 장자인가 특강 프로그램을 하실 때 그쪽에 전화했더니 녹화장으로 찾아오라 해서 이소라 씨와 함께 갔어요.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나와 주십시오.” “이소라? 무슨 소라야? 고동이야?” 이러실 때예요. 그래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가수입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하는 걸 한 번도 안 와보고 하자 말자 하는 건 결례지” 뭐 이런 식이 된 거예요. 선생님이 강의하시다가 “여러분 이소라라고 알아요? 하니깐 “네!” 하고 객석이 난리가 났죠. “그래? 난 모르는데 나와 봐” 해서 객석에 인사를 시키시고 강의가 끝난 후 분장실에 가서 섭외를 하게 된 거죠. 방송에 나와서는 비틀즈 노래도 하시고 신년 덕담도 잘 해주시고 조영남 형과 함께 프로그램 녹화를 잘 끝냈어요.

그리고 뒷풀이를 홍대 앞으로 모시고 갔어요. 가서 술이 몇 순배 돈 다음 “선생님 왜 변두리나 뒷골목에서 강의를 하십니까?” 이렇게 긁었죠. 그때 EBS프로그램이 너무 좋아서 만날 제가 찾아보고 있었거든요. “큰 공중파에 와서 훌륭한 말씀을 해주셔야지 거기서 암만 소리쳐 봐야 누가 듣습니까?” “그래?” 그러면서 조건이 있으시대, 무슨 조건이냐 물으니깐 “KBS 1TV에서 두 시간을 주면 하지” 하셔서 좀 걱정은 되었지만 “최고의 시간대에 일주일 두 시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선생님 얼마 받으십니까? 그 다섯 배의 강연료를 드리겠습니다. 오십시오” 했죠. 생각하면 작가료 안 나가지 다른 게스트 필요 없지 훌륭한 콘텐츠 스스로 공부해 오시지 그래도 충분하다 싶었어요. 그 다음에 윗분들을 차례로 만나 설득해나가기 시작했죠. 돈은 문제가 아니었는데 공영방송에서 개인 이름을 붙인 프로그램을 프라임 타임에 일주일에 두 시간씩 소화해내야 하는 것이 제 생각에도 무리다 싶었지만 물러날 곳이 없었어요. 복잡한 관계들 속에 좌충우돌 하다가 ‘인문학에 대한 윈도우로는 도올만한 사람이 없다’로 임원회의 결론이 나서 두 시간 연속방송이 결정된 거예요. 사내에서는 ‘왜 예능국에서 교양을 하냐?’는 반론도 있었죠. ‘인문학은 예능이 될 때가 되었다.’ ‘사고의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뮤직뱅크>나 <개그콘서트>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등 무리수 주장을 늘어놓으며 반론을 펼쳤죠. 일주에 두 시간씩 100강! 잘 갔어요.

그러던 중 64강 째 성균관대학교에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명강의를 하셨어요. 혼신의 힘을 다 하시는 것이 보였어요. 성균관 유생들이 꽉 찼고 강당은 젊음으로 넘쳤어요. 박수가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였어요. 그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일찍 도올 선생의 집사가 종종 걸음으로 오는 것이 보였어요. “아침 일찍 왜 왔지? 저 친구가.”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한지 봉투에 담긴 편지 한 장을 선생님께서 보냈노라고 내밀었어요. ‘박 선생이 이 편지를 받아볼 때 나는 외국행 비행기에 있을 거다. 난 지난 주 강의로 내가 할 강의 내용을 완성했다. 뒷일을 부탁한다. 고맙고 미안하다.’ 그런 내용이었어요. 100강을 하기로 해놓고 사라지신 거예요. 그때부터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보다 더 큰 난리가 났죠. 인사위원회 회부되기까지 했지만 그런 도올 선생님의 행보가 이해가 되었고 우리가 함부로 금 긋는 것이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나는 네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어요. 노영심이 그랬고, 이문세가 그랬고 이소라가 그랬고 도올이 그랬어요. “당신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면 나는 안한다.”

홍: 그분들의 공통점은 굉장히 대하기 어려운, 기가 센 분들인데 그분들과 어떻게 잘 지냈는지요?
박: 저는 모두 편하고 좋았어요, 그 사람들의 까다로움에는 한 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어요. 일단 당신들의 판단이 순수해요, 바른 방향이에요. 근데 세상과 피디가 타협하느라고 세상적인 잣대로 마름질하려다 보면 그건 아니라고 정색하는 거예요. 근데 그걸 잘 못 받아들이면 ‘뭐야? 알 만한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거죠. 근데 그 네 분이 다 저하고 지금도 친해요. 나빠질 이유가 없는 분들이에요. 제가 그 분들을 방송에 쓰는 MC나 수단으로만 대했다면 그 분들과 프로그램을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카메라에 비춰지는 피사체가 나의 밥벌이 수단이라고 파악하고 대하면 프로그램이 궁벽해지고 성공하기 어려워요. 내 목적이 되어야 해요.

당신을 찍는 게 내 목적이고 즐거움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해요. 앞에서 PD가 보고 있는 걸 알고 멘트 하는 것과, 허공에 대고 멘트 하는 것과는 완전 다르잖아요. 카메라를 통해서지만 연출자와 공감하는 거죠. ‘내가 눈 찔끔하면 무슨 소린지 다 알아듣지?’ 이 정도의 교감이 있으면 그때는 편안하죠. 그리고 그들이 말은 않지만 뭔가 못마땅해 하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너무 착하고 훌륭한 이유가 꼭 있어요. 그걸 찾아 들어주면 돼요. 너무 순수하고 사람 사는 맛이 나게 하는 향기를 지닌 분들이에요. 피사체가 카메라 앞에 서면 그 전 단계나 과정은 PD나 작가의 준비하는 몫이 크지만 피사체가 무대에 딱 서서 조명을 받으면 그때부터 최종결재자는 그 사람이잖아요. 데뷔하는 신인가수건 엉터리 개그맨이건 그 사람이 최종결재자죠. 그 사람이 안 하면 피디가 담을 수 없잖아요. <왕룽일가>의 작가 박영한 선생을 초대하고 얘기를 들으려고 했더니 자기는 술을 먹지 않으면 노래가 안 나온대요. 그래서 무대 뒤에서 “선생님 드십시오.” 하고 소주를 준비해 권해 드렸었죠. 베스트를 다 하시라고.

홍: 그리고 국장 하실 때 기획했던 것으로 <1박2일>과…….
박: <1박2일>하고 <미녀들의 수다>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강호동 씨가 SBS로 간지 2년 반 3년 됐을 때 다시 오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왔어요. 이유가 KBS에 친한 PD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피디 층도 두터워서 자기역량을 발휘하기 좋은 채널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오고 싶다는 거예요. 호동이 다시 왔다 하니까 피디들이 안 맡으려고 해요. 이미 나이도 많은 버거운 MC지, 새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 하지 이런 거예요. 당시 이명한 PD가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불러서 “너 들어가!” 하니깐 “저 한 시즌만 더 윤도현 할게요. 다음엔 뭐든지 시키시면 할게요.” “너는 호동이랑 동갑이다. 호동이보다 나이 어린 피디를 넣어주면 강호동의 기를 당해 낼 재간이 없다. 네가 들어가서 친구 먹고 해라” “한번만 봐 주세요” “봐주는 게 이거다. 들어가!” 방에 밀어 넣었더니 하루만에 “1박 2일 할게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근데 그걸 갖다놓고 야단을 쳤어요. “아무 데나 가서 자고 오고 그런 게 프로그램이 되겠냐? 뭐 한계 상황을 설정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 같은 거를 집어넣어야 프로그램이 되지” 하니깐 또 회의하고 나와서 “야생을 집어넣겠습니다.” 해서 야생버라이어티가 탄생하게 된 거예요. 저는 지금도 이명한, 나영석 등 참여 PD와 이우정 작가 팀이 고생해서 함께 이룬 금자탑 같은 프로그램 <1박 2일>을 무어라 더 칭찬할 말을 찾지 못할 것 같아요.

<미녀들의 수다>는 백전노장 오경석 작가를 복도에서 지나치며 “새 아이디어 없으세요?” 했더니 “외국 애들 말이야, 걔네들이 한국 체험 한 거를 여자들끼리만 모아서 떠들게 하고 편집해서 방송하면 좋을 거 같은데…….” “아. 재미있겠는데요.”하고 3분 만에 방송 결정한 프로그램이에요. 같은 아이디어를 오작가가 다른 여러 채널에 이미 이야기를 했었으나 임자 못 만난 상태였어요. 이기원 PD를 불러서 처음에는 백인 위주로 가고 미혼으로 한정짓고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떠듬거리는 애들 모아놓고 MC는 남희석으로 하는 모든 결정이 10분도 채 안된 사이에 다 이루어졌어요. 프로그램 시작하거나 할 땐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서 머리 써서 나오는 게 아니고 복도에서 스쳐가는 한마디의 팁이 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유용한 키에요. 예능프로그램에 화두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절이 된 거지요.

프로그램은 시청자와 소나기처럼 만나야

홍: 본인의 연출력의 특징을 뭐라고 생각을 하는지?
: 연출은 설득이라는 생각을 늘 해요. 그래서 연출은 마음 장사다. 프로그램은 PD와 연애하는 사이다. 조금만 소홀해도 얼굴이 상하고 토라져 늘 보살펴야하는 까다롭지만 소중하고 황홀한 애인이다. 하여튼 쇼의 경우에는 그게 이제 은유적으로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프로그램과 시청자와 제작연출자가 눈처럼 만나면 안 돼요. 소나기나 뭘 뒤집어쓰듯이 만나야 되요. 직접적이고 젖어들어야만 된다.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감상하고 그러면은 프로그램이 몸에 와 안 붙는다. 그럼 시청자한테도 안 붙는다. 앞에 있는 객석이 진심으로 환호하지 않았는데 케이블 타고 집에 있는 수 백 킬로미터 있는 사람이 그거를 전파로 전해 받고 그걸로 무슨 감흥을 받겠어요. 눈앞에 있는 사람을 감동시켜야죠.

: 조대현 교수가 본부장이실 때 예능국의 조직문화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하셨어요. 교양국 같은 경우엔 분위기가 자유롭고 그렇지만 실은 창의적 콘텐츠가 많이 나오는 건 예능국의 수직적 구조라고.
박: 그거는 실제로 예능 콘텐츠라는 건 행간처럼 문맥과 문맥 사이 그 다음에 함의 이런 게 중요합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조직원들 간에도 사무적으로 만나면 예능 프로는 되지 않아요. 아까 얘기했듯이 소나기를 뒤집어쓰듯이 그 팀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프로그램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다큐멘터리하고 달라서 태생적으로 집단작업을 해야 되는데, 그 멤버가 단위 집단으로 끈끈한 유대를 갖지 않으면 프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거 때문에 예능은 성공적인 상황이라면 그거는 다른 장르의 연출 팀보다는 팀 간의 유대나 선후배간의 유대가 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홍: 약간 이런 느낌이었는데요. 예능국 같은 경우엔 선배가 후배를 쪼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근데 교양 쪽은 너나 나나 자유롭게 좀 자기 발언도 하고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면이 훨씬 많은 거 같아요.
박: 교양국 PD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콘텐츠를 대하는 자세는 수직적 사고 속에 잠재적인 가치를 두고 있고, 예능국의 수직적으로 보이는 현실 구조가 콘텐츠를 대할 때는 더 자유로울 수도 있죠. 두 조직 구성원이 다루는 콘텐츠의 성격이 그들의 무의식을 규정하거나 통제할 수도 있고요. 언제부턴지 예능은 인문학적 기본을 프로그램 속에 녹여서 가져가지 않으면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되 교양의 길목을 빌려라. 그런 식이죠. <1박2일>과 <런닝맨>을 비교하면 <런닝맨>은 단순 예능이어서 <1박2일>이나 <무한도전>과 같은 고점을 찍기가 힘든 거죠. 애쓴 걸로 생각하면 절대 뒤지지 않는 데 말이죠. 성공한 다큐멘터리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잖아요? 교양프로그램이 더 진화하려면 결국 드라마적이거나 예능적인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많은 예능이 교양 쪽으로 발을 디밀듯이.

또 생산해 내야하는 콘텐츠의 양과 거기에 투입되는 제작 인원의 적정성 같은 것이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요? 일단 예능 버라이어티 하는 친구들의 삶은 프로그램 회의 외에 토론이나 자기 발언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거나 지치거나 쫓겨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새 프로그램에 대한 강박관념이 타 장르보다 지속적이에요. 생태적으로 광고를 팔아야하는 절박한 2TV 프로그램의 비율이 큰 것도 이유가 될까요? 훨씬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다뤄지는 기본소스 콘텐츠들이 피디로 인해서 변화될 수 있는 여지의 폭이 장르 특성상 더 큰 게 예능인 것도 같고요.

: 최근 몇 년 사이에 예능 프로그램의 사회적 비중이나 확 커졌잖아요. 그건 어떻게 보시는지?
박: 그건 예능 프로그램에 교양이 다루던 소재나 이슈를 많이 편입시켰기 때문이죠. 또한 단순 예능을 하면 허전함이 남는데 그런 허전함이 못 들어오도록 삽입시킨 교양 아닌 교양이 ‘보고나니 남는 게 있다.’ ‘배울 점이 있다.’ ‘괜히 봤다 싶진 않다.’ 그렇게 점점 사회적인 영향이 커진 거라고 보죠.

2000년대 초반, 인포테인먼트 예능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2000년대 중반 들어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확산되면서 예능 프로그램이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무척 커졌다. 특히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서 시사 교양 프로그램이 위축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예능국과 교양국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필자는 두 조직 간의 다른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새롭고 창의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가이다.

KBS의 경우, 시청률 압박이라는 어찌 보면 다소 공영방송에 해를 끼칠 것 같은 키워드가 예능국 조직원들을 긴장하게 했고, 그 결과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닌지, 반면 교양국의 경우, 시청률 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대신, 프로그램에 대한 치열함이 더 떨어지는 것 때문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따라서 시청률 압박을 무작정 폄하하기보다는 건전한 긴장으로 재인식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하겠다. 물론 요즘 교양 다큐멘터리도 시청률에 대한 조바심이 이만저만 아니다. 낮은 완성도의 다큐멘터리도 높은 시청률이 나오면 용서되는 경우도 흔하다. 시청률 압박의 양면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 JTBC <히든싱어> ⓒJTBC  
▲ JTBC <히든싱어> ⓒJTBC
홍:
지금 JTBC <히든싱어> 외주 제작을 하시잖아요. 기획은 어떤 식으로 하셨는지?
박: 유성찬이라는 작가가 모창 가수하고 진짜 가수하고 대결하면 어떨까? 하는 화두를 가지고 여러 채널을 두드렸어요. JTBC에서 김석윤 PD를 만나서 설명을 했고 김석윤 피디가 “그거 되겠는데?” 하며 저를 만나러 왔어요. “형 이거 공동 제작해 봅시다.” 하고.

홍: 김석윤 PD가 본 거네요.
박: 김석윤 PD가 그걸 본거죠. 그래서 조승욱 피디한테 이거 어떠냐 해가지고 조승욱 PD가 맡게 된 거죠.

: 외주제작하면 어디까지 하시는 거예요?
: 처음에는 가수들이 종편에 출연하는 것을 조금 꺼리는 면이 있어서 큰 가수는 직접 섭외도 해야 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대성공이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화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한 것도 사실이에요. <히든 싱어>의 메이킹 프로 <히든스토리>도 피디 5명이 하니 결국 박스미디어 피디 10명이 지금 JTBC 프로그램에 투입되고 있지요. 조승욱 PD가 키를 잡고 제 회사의 PD들과 노력해서 종편 최초로 7.5%를 넘었어요.

: KBS예능국에 국장까지 하셨고, 지금은 외주에서 제작을 하고 계신데 PD로서 제작자로서 어떤 차이 같은 거는?

: 내부에 있는 PD들은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셈이고, 다 그렇지는 않지만 외부는 외주에서 배우고 단련된 사람들이어서 일을 대하는 마인드가 좀 달라요. 능력 편차도 심하고 이직률도 심하고 소속감이 부족한 면이 있죠. 케이블 방송 출신과 공중파 FD 생활을 한 친구들이 그나마 조직생활을 알죠. 프로그램은 팀을 이끄는 소대장이 제일 중요한데 채널과의 공동제작 형태 같은 것이 외주는 제일 바람직해요. 지상파에서 PD들이 비싼 값에 스카우트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홍: 그 뭐 미디어가 중요하기보단 콘텐츠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는……. KBS라는 미디어에 계시다가 좀 더 작은 미디어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제작자로서 그런 것들을 얼마나 실감을 하시는지?
: 실제 누가 더 중요하냐를 따지는 거보다는 우리나라 방송 산업의 후진성은 드라마는 좀 벗어나고 있어요. 왜냐면 저작권이 제작사에 공유되니깐. 예능의 경우 외주제작사에 저작권이 공유되지 않으니까 억울하다 그런 게 아니고, 억울해도 괜찮으니깐 많은 프로만 받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이 제작사들한테 있단 말이죠. 근데 그게 선도적으로 방송계나 학계나 전부 다 이런 데서 상징적인 의미의 저작권을 교양이나 예능에도 부여하게끔 법제화하거나 그거를 시행해 본다면 시장의 황폐화를 막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는 거죠.

그래서 그런 저작권이나 다시 PD들의 근무요건이나 이런 걸 얘기하면 복잡해지고 제일 중요한 건 상징적으로 그 프로그램의 포맷이 해외에 팔리잖아요. 해외에 팔리는 데도 원래 아이디어를 냈던 작가한테 아무런 포맷판매에 대한 저작권이 가지 않는 게 외주라면, 그 작가는 너무 방전될 거란 말이죠. 그러니깐 그거를 보호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드라마 작가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나 좋은 작품을 쓰면 부자가 되잖아요. 그렇게 되어야 해요. 그러니깐 많은 사람이 들어와야만 그 분야가 발전하죠. 우리가 듣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전부 다 좋은 것들이 들어가 있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돈이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재능이 거기로 모이는 거죠.

그런 의미로 본다면 새로운 포맷을 만들거나 하는 특히 작가, 외주제작사가 있다면 그런 재능에 대한 거는 합당한 값을 사회에서 쳐 줘야 됩니다. 채널한테 번 걸 내 놓으라는 게 아니고, 시장이 육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요. 그냥 정말 점잖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으면 이 시장은 사막화되죠.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일을 하겠지만 저임금에 막노동에 시달리는 시장이 된다면 외주에서 고급콘텐츠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그거 아니라면 잘한 사람들한텐 보상해 주고 이름을 불러줘라, 그게 총체적으로 보면 채널한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선순환 구조를 가지면 좋겠다는 것이죠.

: 최근에 나영석, 김태호 PD 등 예능 PD들이 스타가 되고 있잖아요.
: 그거는 너무 좋은 일이예요. 너무 좋은 일이고 축하할 일이죠. 영화감독은 자기가 젊은 시절에 연출한 작품으로 평생을 팔아먹고 사는데, 피디는 아무리 많은 작품을 해도 월급쟁이였기 때문에 잊히잖아요. 그거 말고 자기 이름가지고 팔려가고 이를 테면 스카우트되고 좋은 작품을 내고 하는 거는 방송시장 육성으로 생각할 때 신방과 다니는 모든 학생들한테 꿈이 되지 않을까요? 샘플이 있어야죠. 삼성전자가 있으니 라디오 조립하는 중소기업도 생겨나는 것이죠. 시장을 육성한다는 차원에서는 견인차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 의미로 좋다는 거죠. 개인이 돈을 많이 벌고 그런 건 두 번째 문제고, 그런 직종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한테 직접적이진 않으나 꿈이 될 수 있잖아요. 콘텐츠를 생산하면 저렇게 좋은 영광을 누릴 수 있구나 하고 굉장히 순기능 하지 않겠냐는 거죠.

: KBS에서도 많은 후배들을 이끄셨고 지금도 직원들이 꽤 많으시잖아요. 본인이 직접연출 할 때와 달리 이제는 후배나 같이 일하는 스텝들한테 본인이 원하는 걸 만들어내게 하는 역할을 하시는데 품질 관리하는 비결 있으신가요?
: 실제로 혼자 다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좋은 인재는 적재적소에 써야죠.
홍: 좋은 인재를 골라서 그 다음에?
: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는 데에 써야죠. 국수를 잘 만드는 사람한테 된장국을 끓일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국수를 만들게 해야죠. 누군가가 평소에 간을 보는 거나 먹는 걸 보니까 그걸 잘할 수 있겠다고 미리 선험적으로 판단을 해주는 게 리더라고 생각해요. 잘 할 수 있는 PD와 좋은 스태프를 조합하는 것도 연출이죠. 그리고 단위프로그램을 연출하는 것도 연출이지만, 하루도 한 프로그램이거든요, 일주일도 한 프로그램이고, 1년도 한 프로그램이죠. 프로그램 단위를 어떻게 잡고, 전체 콘텐츠에 접근할 거냐에 따라서 연출의 형태는 여러 가지인 거죠. 편성본부장도 엄청난 연출가일 수 있는 거고 제작본부장도 그렇고 연출이 단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죠. 최고로 힘센 피디는 국가 최고 지도자에요.

  ▲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한 박해선 대표와 홍경수 교수 ⓒ강의정  
▲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한 박해선 대표와 홍경수 교수 ⓒ강의정
: PD생활 하시면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 여름 휴일 저녁 슬리퍼를 끌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열린 이 집 저 집의 거실 TV에서 지난 밤 내가 애써 편집했던 프로그램의 오디오가 창문 너머 들려왔을 때. 첫 아이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보며 TV 앞에서 춤을 췄을 때. 오랜만에 만난 동창 모임에서 “네가 그거 하냐? 언제 나도 한번 보러가자.” 했을 때. 내가 마련한 무대에서 감격한 출연자가 울고 그 눈물이 카메라에 선명하게 찍혔을 때. 추석날 새벽 밤을 새워 특집 편집을 마치고 바로 차례 상에 절할 때. 어머니가 녹화 때문에 늦은 새벽 귀가를 걱정해주셨을 때. 뭐 그런……. 방송이 진짜 문화가 될 때 행복한 거죠. 문화라는 건 목적으로 간 거고 방송을 수단으로 써 먹어버리면 저급한 환경 속에 머물러 있는 거고 그게 문화가 되어야죠.

: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박: 안타까웠던 순간은 없고, 연출하는 동안은 정말 후회 없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후회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있었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치광이처럼 살았던 시절이 많았던 거 같아요. 행복한 사람이죠.

홍: PD란 결국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 제가 어린이 프로를 끝내고 노영심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다른 사람이 한 프로는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남이 만든 프로는 한 번도 안 만들어 봤어요. <가요무대>, <가요 톱10>, <가족오락관>, <전국노래자랑> 이런 거 한 회도 안 해 봤어요. 기존에 있는 것은 하루도, 대리연출도 안 해 봤어요.

: PD로서 자랑이시고(웃음), 피디는 어떤 사람이다?
: PD는 몽상가다. 자기 생각이 시청자와 합일될 수 있다고 무모한 꿈을 꾸는 몽상가다. 자기의 눈을 통해 본 아름다움을 시청자가 똑같이 느낄 수 있다고 믿는 무모한 몽상가다.
제가 노래를 못하잖아요, 개그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누가 제일 노래를 잘 할까? 누가 제일 재밌을까? 누가 제일 예쁠까? 그것만 생각하는 게 쇼 PD예요. 세상에 제일 행복한 게 쇼 피디라고 생각해요. 쇼가 진행되는 동안 만큼만이라도 세상은 아무도 아프지 않을 것 같고 아무도 죽지 않을 것 같고 그렇잖아요.

: 개인적으로 정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고 PD로서 내가 사회에 어떤 역할을 이바지한다?
박: 모두가 사회에 맡은 바 역할을 하잖아요. 그 속에 피디란 역할이 있을 뿐이에요. 그걸 너무 힘주면 본령에서 벗어난다고 봐요. 핸드폰 만든 사람은 월급 받지만 핸드폰을 만들어서 전 세계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바꾸는 예술가들이잖아요. 그 사람에게 국방이나 교육에 등한시했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피디라고 해서 특권의식이나 세상을 바꿔야 된다거나 교육시켜야 된다거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그런 역할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냥 피디라는 사회적 역할이 하나 있을 뿐이라고 소박하게 생각해요.

홍: 그 역할이 무엇일까요?
: 아름다움을 교감하는 것.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고자 서로 위로하는 것. 못 다한 생각과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것. 미래의 희망을 함께 꿈꾸는 것. 그런 것 아닐까요?
: 개인적인 최종목표, 혹시 앞으로 남은 꿈?
박: 개인적인 목표는 저 뿐만 아니라 자식 때까지도 콘텐츠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남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깐 이야기 속에 살게 하면 되잖아요. 이야기와 노래 속에서, 목표는 그냥 콘텐츠 세상에서 살아 남아있는 겁니다.
: 시인이시잖아요.
박: 옛날에 그랬죠?
: 시는 안 쓰세요?
: 메모하죠. 써보면 시를 써보면 시를 쓴다고 좋은 게 아니고 안 쓴다고 나쁜 게 아니고 시는 써져요. 나를 통해서 시가 나와야 되잖아요. 작업처럼 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나와 줘야 되는 거고, 기다리면 됩니다.
홍: 더 하고 싶은 말씀은
박: 연출자들이 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해가게 끔 선배들이 노력을 해줘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콘텐츠에 제작에 좋은 사람들이 유입되는 환경이 되게끔 방송 제작 생태계 조성을 해줘야 한다고 봐요. “어쩔 수 없이 이거 하거든요. 다른 곳 취직이 안 되서 이걸 하거든요.” 하면서 좋은 콘텐츠가 생산되기 바라는 것은 무리지 않겠어요? 히잡을 쓴 아랍처녀가 한국드라마를 좋아한 나머지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서 한국어 학원에 다니는 세상이잖아요. 일본 NHK에서 방송하는 한국어 강좌를 재일동포 2세 3세들이 들을 거 같지만, 수강생 90%는 일본인이예요. 왜냐? 한류콘텐츠를 직접 한국어로 접하고 싶어서. ‘일주일에 닷새를 날 새도 까딱없는 체력이잖아.’ 이렇게 내몰지 말고 내주건 외주건 충분한 보상과 벌이가 되게 해줘야 양질의 인력이 부가가치가 큰 산업이라 믿고 들어오죠. 저는 다 살아온 세대이고 행복한 세대에요. 다음 세대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날을 새고 깃발을 날릴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이 어서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 수고하셨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가 끝이 났다. 아주 힘이 센 물고기와 씨름하다가 맥이 빠진 노인처럼 힘이 빠졌다. 박해선이라는 바다 속 깊은 곳까지 끌려 내려갔다가 비로소 돌아온 느낌. KBS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PD로 시작해서 음악토크쇼라는 장르를 만들었고, KBS를 떠난 뒤에는 KBS 바로 앞에 사무실을 차리고 와신상담하며 음악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그를 보며, 그는 어쩌면 시대가 만든 풍운아 PD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서 자라났고, 1980년대에 방송사에서 들어가 두 명의 멘토를 만나 방송에 대해 배우고, 음악프로그램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때때로 좋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고 KBS 예능 프로그램을 총지휘하다가 KBS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회사를 설립하고 음악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있다. 그는 복락을 다 누린 PD라며 스스로의 인생에 후회가 없다고 했다.

PD들을 인터뷰하며 시대와 재능의 상관관계를 떠올렸다. 시대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찾는다. 낭중지추처럼 호주머니 속의 뾰족한 송곳 같은 재능이 그 대상이겠다. 다만 그 시대는 때로 시대정신의 그것처럼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며, 반대로 피하고 싶은 불의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대는 흐른다. 그리고 흐르면서 끊임없이 탐색한다. 박해선 PD는 시인적 감수성과 장군의 카리스마를 동시에 가진 보기 드문 연출자다. 그가 여전히 계속 콘텐츠 세계에 머물고 싶다는 희망을 가진 것으로 보아, 그의 프로듀싱 행보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채널이 늘어났고, 예능 프로그램이 대중문화의 갑으로 두드러지는 시대, 이번에도 시대는 그를 외면하지 않을 듯하다.


 


홍경수 순천향대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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