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져보기] 400년의 순정을 간직한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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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별에서 온 그대>에서 김수현이 맡은 배역은 서기 1609년 조선 땅에 온 외계인 도민준이다. 도민준은 늙었다. 지구에서 400년을 넘게 살았으니 적어도 나이가 400살은 넘는다. 지구에 오기 전 나이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외모는 젊다 못해 새파랗다. 인간 남성이 젊음의 절정에 이른 상태, 그게 도민준의 한결같은 현재다.

그는 몸만 한결같은 게 아니라 마음도 한결같다. 지구에 떨어졌을 때 처음 본 그 조선의 소녀를 잊지 못한다. 소녀가 다시 환생하기까지의 시간을 홀로 견뎠다. 그에게는 400년 전 일도 때로 어제 같다.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 심지어 가까운 미래가 별 차이 없이 기억 속에 공존한다.

▲ SBS <별에서 온 그대> ⓒSBS

그렇게 400년을 이어온 마음, 400년을 간직한 사랑이 천송이(전지현)를 향한다. 대한민국 톱스타 천송이라는 화려하고 요정 같은 캐릭터를 전지현이 소화함으로써, 이 드라마는 묘한 극적 개연성을 갖추게 되었다. 시청자가 이 설정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현실성을 따지던 ‘머리’는 400년의 마음에 그만 넘어가고 만다.

1600년께로 추정되는 <햄릿>의 창작연대를 생각하면, 햄릿의 나이도 400년이 넘는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고뇌하는 현대인’의 전형으로 인정된 캐릭터다. <햄릿>이 여전히 끊임없이 공연되는 이유도, 햄릿의 마음이 2014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햄릿의 딜레마는 물론, “누가 내 마음을 알아줄까?”라는 오필리어의 혼잣말로 시작하는 이 희곡의 모든 요소가 그러하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이 석기시대 그대로라고 주장한다.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던 사바나 시절의 마음과 감수성을 고스란히 장착한 채, 현대 문명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고뇌는 이미 병적이라고도 한다. 영화 <아바타>같은 원시림을 그리워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가 ‘현대’에 적응 못해 힘겨워한다는 얘기다.

로버트 A. 존슨의 책‘We : 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 심리학적 이해’(1983)에서는 낭만적 사랑의 원형을 12세기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에서 찾고 있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 천 년 전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낭만적 사랑이다. 그렇다면 도민준은 풋내기에 가깝다. 적어도 600년은 더 지나야 온전한 사랑을 깨달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매사에 진중하다. 400년의 마음으로는 자기가 처한 사랑의 딜레마와 운명의 장난을 풀기에 역부족이므로 늘 공부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극중 가장 젊은이답다.

그렇게 본다면, 현대 여성들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도민준이다. 한계를 모르는 초능력의 소유자이며 외계에서 온 슈퍼맨, 400년의 마음을 간직한 성숙한 남자. 그런 남자만이 인간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구현하리라는 시청자의 기대에 김수현은 충실히 부응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 마음이 어떤지조차 모른 채 등 떠밀리듯 살아가는 다른 인물들이야말로 ‘외계인’처럼 부유하는 모양새다. 속은 텅 빈 채 살아온 천송이나 살인마가 돼 가는 이재경이 더 외계인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어도 400년의 인류사를 이해하는 인문학적 소양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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