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직행 언론인, 자존심 없는 언론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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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욱 전 KBS 앵커 ‘폴리널리스트’ 명단 합류…언론인 자존감 회복 필요

벌써 한 주가 지났지만 민경욱 전 KBS 앵커의 청와대행을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뜨겁다. 오전에는 문화부장으로 KBS 보도본부 편집회의에 참석했던 인물이 오후에는 KBS에서 지급한 휴대전화를 여전히 소유한 채로 청와대 출입기자들 앞에서 신임 대변인으로 소개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언론인의 윤리의식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여야 정권 막론 폴리널리스트 양산= 사실 정치(Politics)와 언론인(Journalist)의 합성어인 폴리널리스트(Polinalist)란 말은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정계와 공직에 진출하는 언론인들의 모습이 그만큼 흔한 탓이다. 물론 민경욱 대변인처럼 반나절 사이 옷을 갈아입은 사례가 많은 것은 아니나, 정권을 막론하고 꾸준히 존재해온 게 사실이다.

이달 말 집권 1년을 꽉 채운 박근혜 정부에서만 청와대로 직행한 언론인은 민경욱 대변인을 포함해 무려 셋이나 된다. 시작은 이남기 전 홍보수석이었다. 이 전 수석은 SBS의 지주회사인 SBS미디어홀딩스의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해 2월 출범을 준비하고 있던 박근혜 정부의 첫 홍보수석으로 발탁돼 청와대로 직행했다. 민경욱 대변인에 앞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김행 대변인 또한 소셜네트워크 뉴스서비스 <위키트리>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변인으로 발탁돼 청와대까지 입성했다.

▲ 지난 5일 청와대 새 대변인에 임명된 민경욱 KBS 전 앵커가 청와대 춘추관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 대변인은 KBS 문화부장에 재직 중이던 지난 5일 청와대 대변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 대변인은 당일 오전만 해도 문화부장 자격으로 KBS 보도본부 편집회의에 참석했으며 하루 전인 지난 4일에는 KBS의 메인뉴스인 <뉴스9>의 ‘데스크 분석’ 코너에서 리포트도 했다. 넉 달 전까지 그는 <뉴스9> 앵커로 매일 밤 시청자를 만났다.

이명박 전 정부에서도 청와대로 직행한 언론인들이 있었다. 최금락 전 홍보수석은 2011년 9월 SBS 방송지원본부장 재직 중에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다. 석 달 뒤인 2011년 12월에는 SBS 사장과 SBS 미디어홀딩스 사장을 지낸 하금열 SBS 상임고문이 대통령 실장에 임명돼 청와대로 이동했다.

이에 앞서 2008년 2월 김은혜 당시 MBC 보도국 뉴스편집2부 차장은 청와대 부대변인으로 선임되고 나서야 사표를 제출하고 청와대로 자리를 옮겼고, 2009년 대변인으로 발탁된 후 2010년 7월까지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다. 김 전 대변인이 청와대 부대변인으로 발탁된 당시 MBC는 김 전 대변인의 기자간담회를 위해 사내 회의실을 제공하기도 했다.

여야 정치권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공직선거법 제53조(언론인은 선거일 90일 전까지 현직에서 물러나야 한다)의 적용을 받지 않는 비례대표 국회의원들에서 두드러진다.

19대 국회에선 이상일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사례다. 총선을 22일 앞둔 지난 2012년 3월 20일 이 의원은 4·11 총선 새누리당 선대위 대변인으로 기용되며 비례대표 8번을 받았는데, 하루 전까지만 해도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며 칼럼을 썼다.

17대 국회 당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단 민주당의 민병두, 박영선 의원 또한 각각 입당 하루 전(2004년 1월 3일)과 당일(2004년 2월 3일)까지 <문화일보> 정치부장과 MBC 경제부장으로 재직해 ‘폴리널리스트’ 행보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유명무실 윤리규정, 언론 스스로 의미 축소= 언론인에게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 만큼 정치판으로 말을 갈아타는 행위 자체를 뭉뚱그려 비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한다. 국회를 출입하는 한 일간지 기자는 “기자 생활을 하며 쌓은 인맥을 총동원해 좋은 자리로 ‘영전’하려는 이도 있지만, 정치적 소신을 위해 바닥부터 시작하는 이도 있다”며 “이들 모두를 ‘폴리널리스트’라고 싸잡아 매도하는 건 누군가에겐 억울한 일일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계 안팎에서도 이 같은 지적에 전혀 수긍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민경욱 대변인 사례처럼 언론인의 옷을 제대로 벗지도 않은 채 정치인의 명찰을 다는 행위는 적절치 않다는 게 언론계 다수 여론과 시민단체의 지적이다. 정치판으로 말을 갈아타려는 성급한 폴리널리스트들로 인해 언론 전반이 불신 받는 상황에 대한 우려로, 주요 방송·언론사들이 윤리강령에서 최소한의 냉각기를 규정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KBS와 SBS는 각각 2003년과 2006년 제정한 윤리강령에서 TV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와 취재·제작 담당자 등 정치관련 보도와 제작을 담당하는 이들에 대해 해당 직무가 끝난 후에라도 6개월 이내엔 정치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지난 2006년 SBS 노조위원장으로 회사와 합의해 윤리규정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최상재 전 언론노조 위원장은 “참여정부 시절이었던 당시만해도 SBS에선 사례를 찾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정치판에 직행하는 언론인들이 많았고 예방 차원에서라도 정치활동에 제한을 두는 윤리규정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윤리강령은 말 그대로 윤리강령일 뿐이어서, 이미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난 이에게 강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더해 폴리널리스트가 몸담았던 회사에선 이들의 행위를 비판함으로써 언론사로서의 신뢰를 지키려는 태도 대신, 이들을 두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실례로 KBS는 민 대변인의 청와대 직행을 놓고 내부 구성원들과 언론·시민단체들이 윤리강령 위반 문제를 지적하자 “윤리강령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치활동’은 국회의원 등 선출직이나 당적을 갖고 정당 활동을 하는 것으로, 청와대 대변인 ‘공직’인 만큼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그러나 KBS는 지난 2012년 2월 25일 <미디어 인사이드>(1TV) ‘언론인 정치진출, 현실과 한계’에서 폴리널리스트의 의미를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정계에 나서거나 관계에 진출하는 사람들’로 규정한 바 있다. MBC는 김은혜 당시 기자가 청와대 부대변인에 발탁된 후에야 사표를 제출했음에도 기자간담회를 위한 장소까지 제공했다.

채수현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청와대와 정당이 언론인들을 영입하는 배경엔 결국 그들의 인맥과 선·후배 관계 등을 이용해 보도에 영향을 주려는, 또 해당 언론사에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려는 뜻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례로 이명박 전 정부 시절이었던 지난 2008년 4월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의 이동관 청와대 당시 대변인이 자신의 허위 영농계획서 제출과 관련한 <국민일보> 보도를 무마시키기 위해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이 대변인은 “<국민일보> 편집국장과 언론사 입사동기로, ‘속된 말로 동기끼리 좀 봐 달라’고 했다”며 압력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적절치 않은 행위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채 위원장은 “현실을 놓고 볼 때 윤리규정은 언론인 스스로 ‘경계’하라는 선언적 의미일 수밖에 없다”며 “이런 ‘경계’가 현실화하기 위해선 개별 언론인은 물론 언론사 스스로도 권력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보도·제작·편성 등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관철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언론사들도 정치인으로 변신한 자사 출신 인사들을 통해 정권에 쉽게 ‘로비’를 하려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상재 전 위원장도 “폴리널리스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각각의 언론인들이 언론인으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겨야 하고, 회사 역시 이를 위한 언론 환경을 마련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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