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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롤 모리스에게서 배우는 몇 가지 교훈들

[오정호 PD의 되감기] 오정호 EBS PDl승인2014.02.17 15:4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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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푸른 선 The Thin Blue Line> (1988)
감독: 에롤 모리스 (Errol Morris)

아주 냉소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가 사법 정의에 대해 가지는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결국 정의는 완벽하게 승리한다’는 낙관적인 믿음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고 사형수는 누명을 벗는다. 환호와 갈채 속에 사람들은 얼싸안는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장면들은 법정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어울리는 극화된 장면들이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은 늘 감동적이나 결코 쉽지 않다. 이 정도면 모든 것이 밝혀졌다고 생각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수군거린다. 그런 의미에서 <변호인>보다는 2012년 토마스 빈턴베르크 감독의 영화 <더 헌트>가 현실에 가깝다. 어린 소녀의 거짓말 하나에도 한 남성의 삶은 파괴될 수 있으며 무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그를 향한 총부리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내용이었다.

에롤 모리스를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만들어준 <가늘고 푸른 선>은 언제 보아도 대단한 작품이다. 탐사 보도 다큐멘터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 작품은 한 무고한 사형수를 살려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6년 11월 추수감사절 주간 미 텍사스 주 댈러스 시에서 로버트 우드 경사가 근무 중 권총으로 살해된다. 데이빗 해리스라는 16세의 한 소년은 28세의 뜨내기 랜들 아담스를 살인범으로 지목한다. 오히려 데이빗 해리스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경찰과 검찰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16살의 소년을 앞세워 아담스를 기소한다. 살인을 저질렀을 것 같은 자가 오히려 검찰 측 증인이 되어 누군가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가늘고 푸른 선>은 1988년 개봉되었으니 개봉 당시 랜들 아담스는 이미 12년을 복역한 셈이다.

  ▲ 영화 <가늘고 푸른 선> 포스터  
▲ 영화 <가늘고 푸른 선> 포스터
이 작품을 찍기 전 에롤 모리스는 사설탐정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감독-탐정(director-detective)”라고 칭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함으로써 정의의 승리에 대해 새삼 강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두세 가지 관점에서 감독 에롤 모리스의 저널리즘에 대한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무겁게 준비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사전 준비과정이 철두철미했고 좋은 관찰자였던 그는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편린들 중 사건의 핵심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을 추려냈다. “200명이 넘는 사람과 인터뷰를 나누었고, 그 후 24명의 인터뷰를 찍었다. 이 중 20명의 인터뷰를 영화에 사용하였다”, “2000페이지에 가까운 원고를 내가 타이프로 직접 쳤으며 결국 최종 원고는 41페이지였다”, 그의 준비성과 집요함이 돋보이는 대목들이다.

둘째, 그에게 있어 스타일(style) 자체는 진실을 확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그는 시네마 베리테(cinéma vérité)적인 방식이 아니라 재연, 빅 클로즈업,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터뷰 등 실험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총알이 발사되는 장면, 사람의 입, 쏟아지는 밀크셰이크, 부풀어 오르는 팝콘 등 필름 누아르적 요소들을 사용했다. 에롤 모리스는 핸드헬드 카메라, 자연광 조명, 촬영 스태프의 불간섭 등 흔히 사실성을 강화해준다고 믿는 시네마 베리테적인 스타일이 결코 진실을 획득하게 해주는 것이 아님을, 그 반대되는 기법을 통해 보기 좋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는 카메라 프레임 내부의 피사체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배치하였고 때에 따라 인터뷰이의 의상 색깔까지도 바꾸곤 하였다. 이 작품이 1988년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제외되었던 이유 역시 재연 장면들이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려 놓았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실험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셋째, 그의 인내심이다. 그는 결정적인 증인이자 범인인 데이빗 해리스를 만나기 위해 1년 반 이상을 기다렸다. 2년 반 이상 이 작품에 매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랜들 아담스는 무죄이고 자신이 진범이라는 데이빗 해리스의 육성을 담은 <가늘고 푸른 선>이 개봉되었던 당시, 여전히 법정 공방이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랜들 아담스가 풀려났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주임 판사가 바뀌고 사건은 주 고등법원과 연방법원을 왔다 갔다 하였다.

“누구든지(어느 검사이든지) 유죄인 사람은 기소할 수 있다. 무죄인 사람을 기소하는 데에는 재능이 필요하다. (Anybody can convict a guilty man. It takes talent to convict an innocent man)” 담당 검사였던 더글라스 멀더가 남긴 말처럼 그가 싸워야 하는 검사들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검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종신형을 받을 수 없는 16세의 해리스보다 종신형이 가능한 28세의 아담스가 훨씬 드라마틱한 타깃이었다. 당시 더글라스 멀더 검사는 승률100%의 전설적인 검사였다. 사법정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진실 그 자체뿐만 아니라 사법 당국 내부에 존재하는 기이한 엘리트의식, 미 남부의 지역감정, 복잡한 사법절차와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 오정호 EBS PD·EBS 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  
▲ 오정호 EBS PD·EBS 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
에롤 모리스가 10살 소년이었을 때 동네 형과의 내기에서 얻어낸 교훈이 있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실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숨겨져 있을 수 있다. 때로 사람들은 그것을 폐기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며 진실의 추구 역시 존재한다.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오정호 EBS PD  webmaster@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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