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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에 소모되어 버린 노동자의 꿈

[인터뷰] 삼성 반도체 피해 노동자를 다룬 영화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 최영주 기자l승인2014.03.05 16: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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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일은 삼성전자 반도체 피해자 아버지의 끈질긴 투쟁을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모델인 고(故) 황유미 씨의 7주기다. 황 씨는 경기도 기흥 반도체공장 3라인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을 얻어 숨을 거뒀다. 이날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생을 달리하거나 병을 얻은 피해 노동자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탐욕의 제국>이 개봉된다. <또 하나의 약속>처럼 개봉 전부터 ‘외압’ 논란이 일고 있는 <탐욕의 제국>은 ‘노동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이 다닌 거대 기업 삼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탐욕의 제국>의 홍리경 감독을 지난 3일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제작사 ‘푸른영상’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홍 감독은 “피해자들에게 그들의 삶을 뒤로한 채 삼성에 맞서라고만 말하는 것은 미안하고 잔인한 일”이라며 “그래서 자본 권력에 힘겹게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 피해자들을 대신해 그들의 삶을 알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 홍리경 감독이 인터뷰 도중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의 모습이 떠오른 듯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PD저널  
▲ 홍리경 감독이 인터뷰 도중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의 모습이 떠오른 듯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PD저널
이들의 싸움은 힘들고 길었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난 2011년 삼성전자 기흥·온양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 등을 얻은 근로자와 유족 5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업재해 인정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이 가운데 고 황유미 씨와 고 이숙영 씨 2명의 손을 들어줬다. 세계 최초로 반도체 회사 근무자의 산재를 인정한 사례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이 기습 항소하며 유가족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화는 1심 판결이 나기 두 달 전인 2011년 4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의 시간을 기록했다. 홍 감독이 처음 피해자들을 만났을 때는 한 마디 말을 건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상처받은 이들을 또 마음 아프게 할까 봐 마음이 무거웠다. 삼성 본사 앞에서 시위 도중 쫓겨나는 이들을 볼 때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 자괴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이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지 한참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야 할 때는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홍 감독은 인터뷰 도중 간간이 눈시울이 불거져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따르면 2012년 3월 5일 기준 기흥과 온양 공장에서 백혈병, 악성뇌종양, 난소암 등이 발병했다는 피해제보만 85건에 달한다. 동시다발적인 발병에 ‘직업성 암’ 문제가 제기됐지만, 삼성은 반도체 공정과 암 발병과의 개연성을 부인하고 있다. 피해자의 진술과 피해 상황도 외면하고 있다. 미국 산업안전컨설팅업체 인바이런(Environ)의 역학조사도 반도체 작업장이 암을 일으킬 만큼 유해하지 않다는, 삼성에 유리한 결과를 내놓았다.

  ▲ 영화 <탐욕의 제국> 포스터. ⓒ시네마달  
▲ 영화 <탐욕의 제국> 포스터. ⓒ시네마달
“인바이런은 고엽제 문제 등 기업에 유리한 결과를 내놓는 곳으로 악명이 높아요. 노동자를 위해 작업환경을 바꾸면 피해자를 줄일 수 있는데 삼성은 은폐하는데 비용을 투자하고 있어요. 정치권력을 뛰어넘는 자본권력이 피해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인 거죠.”

거대 자본의 힘은 이번 영화에도 작용했다. <탐욕의 제국>은 2012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옥랑문화상’에 선정돼 1500만원의 제작지원금을 받았다. 홍 감독에 따르면 삼성 직업병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지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삼성이 영화제 협찬금 5000만원 지원을 중단했다. 삼성은 영화제 메인 스폰서였다.

이 같은 무소불위의 자본권력을 휘두르는 기업에 맞서는 사람들은 특별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한 홍 감독의 편견은 촬영과 동시에 부서졌다. 그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금도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였다. 눈만 보이는 방진복을 입은 어린 여성 노동자는 예뻐 보이고 싶어 작업모자를 골라 쓰고 속눈썹을 붙인다.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 평범한 학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홍 감독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 공장에서 쓰이는 물질이 무엇인지, 작업 공정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하라는 대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영화 초반, 방진복 입는 순서부터 공정 과정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노트는 낯선 세계에 던져진 사회 초년생의 막막함을 대변하고 있다.

<탐욕의 제국>이 관객에게 불친절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입에서 웨이퍼(반도체 집적회로의 원재료로 사용되는 얇은 원판), PCB(인쇄회로기판), FPC(연성인쇄회로기판) 등의 전문 용어가 나오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고인이 됐거나 투병 중인 분들은 웨이퍼가 뭔지도 모르고 일을 시작했어요. 작업 현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위험할 거란 생각도 못 했죠. 관객이 영화를 보며 아무것도 모른 채 일해야 했던 어린 노동자들의 막막함,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삼성에 맞서야 하는 유가족들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해요.”

영화는 중간에 한 번씩 컨테이너 터미널을 먼 곳에서 비춘다. 터미널 가득 쌓여있는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사이에서 사람은 단지 하나의 점이나 개미와도 같다. 화면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터미널의 풍경은 홍 감독이 만난 사람들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 영화 <탐욕의 제국>의 한 장면. 고(故) 황유미 씨(위)와  반도체 공정이 빼곡하게 적힌 어느 반도체 노동자의 노트(아래). ⓒ시네마달  
▲ 영화 <탐욕의 제국>의 한 장면. 고(故) 황유미 씨(위)와 반도체 공정이 빼곡하게 적힌 어느 반도체 노동자의 노트(아래). ⓒ시네마달
홍 감독은 “클린룸(미세 먼지 하나 없는 반도체 작업장을 부르는 말)에서는 반도체 칩을 보호하기 위해 근로자들이 눈만 내놓은 채 자신을 감추고 일을 한다. 노동자라는 존재 자체가 제품 생산을 위한 소모품 정도로 취급되는 것”이라며 “수많은 컨테이너 박스 속에 담겨 있을 전자제품이 소비되고 버려지고 다시 생산되는 과정의 반복은 곧 반도체 근로자들의 고통이 계속되는 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작고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메아리 없는 외침일 뿐이다. 영화 속 고 이윤정 씨의 장례식 장면을 소리 없이 연출한 것은 세상을 향해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사람들의 외침에 침묵으로 답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홍 감독은 영화를 본 관객들이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에 대항하는 주인공들의 삶을 기억하고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영화는 자본 뒤에 가려져 우리가 보지 못했던 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에요. 삼성이 왜 나쁜지만 보지 말고 그들이 일터와 일상에서 어떤 꿈을 꾸었는지에 대해서도 귀 기울여줬으면 합니다.”


최영주 기자  yj719@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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