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철의 스마트TV 2.0] 슬로우 TV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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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철의 스마트TV 2.0] 슬로우 TV 열풍
- 알 수 없는 존재 시청자
  • 손현철 KBS PD
  • 승인 2014.04.01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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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독일에 출장 갔을 때였다. 시차 적응이 안 돼 새벽녘까지 잠 못 이루다 TV를 켰다.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니 재방송 토크쇼, 드라마, 오래된 영화가 주르륵 흘러갔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영상에서 리모컨을 멈췄다. 처음엔 ‘설마, 이런 게 방송용 프로그램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수 백 미터 앞 철로의 소실점을 향해 전진하는 익스트림 롱 테이크 컷이 편집 없이 계속 이어졌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음과 함께. 열차 맨 앞 운전실에 고정시킨 카메라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터널의 어둠과 아찔한 교각, 알프스의 설경을 프레임에 담았다. 기차가 역에 서면 그대로 화면도 정지한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호기심에 채널을 돌릴 수가 없었다.

새록새록 펼쳐지는 낯선 풍경과 화면의 속도감이 이방인의 눈을 사로잡았다. 30분 더 달리고 몇 정거장을 더 지나서야 프로그램은 끝났다. 오늘은 어느 도시에서 어느 도시까지 달렸다는 자막과 함께. 마이너 채널의 심야시간대를 채우기엔 아주 효율적인 선택이군. 독특하고 신선한 시도에 제작비용도 적게 들고. 하지만 저런 게 방송의 주류가 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 노르웨이 서해안의 도시 베르겐에서 수도 오슬로까지의 7시간 반의 기차 여행을 전부 촬영해 7시간 반 동안 방송한 노르웨이 방송사 NRK의 다큐멘터리 <베르겐>의 한 장면. ⓒNRK 홈페이지
세월이 흘러 2009년, 노르웨이의 공영방송 NRK는 ‘미친 놈’ 소리를 들을만한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노르웨이 서해안의 도시 베르겐에서 수도 오슬로까지의 7시간 반의 기차 여행을 전부 촬영해 7시간 반 동안 방송한다는 계획이 그것. 방송사 내부에서 걱정과 반대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이 정신 나간 실험의 물꼬를 막지는 못했다.

그해 11월 27일 금요일 밤 황금시간대, NRK2 채널에서 기차가 출발했다. 경쟁 채널에서는 음악 리얼리티 쇼인 <엑스 팩터>(X-Factor)를 내보낸 상황. 방송사의 편성진과 제작진은 가슴을 졸이며 시청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많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결과는 놀라웠다. 120만 명이 기차여행을 지켜봤다. 시청률은 이전 같은 시간대의 4%에서 거의 4배나 많은 15%로 치솟았다. 지금도 NRK의 홈페이지에 (http://nrkbeta.no/2009/12/18/bergensbanen-eng/)에 가면 21GB 분량의 7시간짜리 방송 파일을 다운 받을 수 있다. 해외의 다운로드 수가 엄청나다고 한다.

슬로우 TV의 가능성을 엿본 NRK는 더 과감한 편성을 시도한다. 134시간 동안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해안을 따라 가는 유람선의 항해 과정을 보여준 것. 이 역시 노르웨이 방송 상 전무후무한 대박을 터뜨렸다. 500만명의 국민 중 300만명이나 방송을 시청했다. 몸이 안 좋아 직접 크루즈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노인층, 경제적 여유가 없는 청년층 모두 열광했다.

NRK의 슬로우 TV 제작을 전담하는 ‘미닛 바이 미닛’(Minute-by Minute) 프로젝트팀은 그 후에도 여러 편의 히트작을 냈다. 살아있는 양의 털을 깎아서 실을 잣고, 털실 옷을 짜는 과정을 8시간 반 동안 중계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뜨개질 솜씨가 좋았던 한 출연자는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벽난로에서 장작더미가 불티를 날리며 타는 모습을 12시간 동안 보여주기도 했다. 2013년에는 알을 낳으려고 강 상류로 회귀하는 연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18시간 동안 생중계했다. 방송사에서 편성 시간에 맞춰 중계를 끊었을 때, 시청자들의 항의가 거셌다. 연어를 더 보고 싶은데 왜 그렇게 빨리 방송을 끝내나는 불만이. 정말 시청자는 이해 못할 존재다.

▲ 손현철 KBS PD
노르웨이의 겨울이 길고, 국민성이 느긋해서 별로 가공되지 않고 느린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런 특수한 이유가 현상의 일부분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노르웨이의 슬로우 TV 열풍은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키는 뭔가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의 감성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는 아무리 길게 봐도 물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과장과 장치 없이 솔직하게 전달하는 형식이면 더더욱 그렇다. 갈수록 번잡하고 복잡한 세상에 지친 시청자는 ‘날 것’을 있는 그대로 느리게 즐기고 싶어 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슬로우 푸드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었듯, 슬로우 TV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우리 TV에 느림의 최면을 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아직도 시청자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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