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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때 이른 벚꽃을 마주하며 문득 당신과의 인연이 시작되던 그때를 떠올립니다. 17년 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듯 벚꽃이 한창이었죠. 그 시절 당신에 대한 저의 마음은 순수하다 못해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배경이나 조건을 이리저리 재본 적도 거의 없었으니까요. 화려하지 않아도 나름의 빛깔을 지닌 당신의 수수함과 튀지 않으면서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존재감이 그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당신도 저와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랬기에 크게 잘난 것 없고 따지고 보면 부족함이 많은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봄은 우리의 첫 만남만큼은 두고두고 기념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입니다.

우리 사이에 낯간지럽고 새삼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이겠지만, “그동안 저와 함께 한 세월은 어떠했는지요.”

많이 미안합니다. 우리가 함께한 세월 속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보람을 만들지 못한 것 같아서입니다. 사실 당신과 나 척박한 토양을 물려받았습니다. 물론 선대의 피땀이 어린 땅이었으나, 여전히 물길이 메마르고 씨앗을 뿌려도 좀처럼 싹을 틔우기 어려운 땅이었죠. 게다가 우리 손에 들려진 건 낡은 수공업적 도구뿐이었습니다. 여전히 저에게 당신과의 만남은 황홀한 추억입니다만, 고백하건대 그 땅 앞에서만큼은 당신을 선택했던 저의 순진함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가쁜 호흡엔 늘 흙먼지가 서걱거렸고, 우리의 밤잠 잃은 땀방울마저 메말라 버렸으며, 우리가 간신히 일구어 거둔 작물엔 실망의 시선이 가득 드리웠습니다.

황량한 땅 위로 방관하는 자들의 무성의한 발걸음이 어슬렁거렸고, 몸은 이곳에 있음에도 마음은 나그네가 되어 버린 이들이 늘어갔습니다. 때로는 매몰찬 배신을 당했고, 가슴 더운 많은 이들과는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당신은 야위고 지치고 보잘것없어진 것 같아 마음이,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어느덧 세간에선 당신에게 수혈해야 한다는 말까지 합니다. 이 모두 제가,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러나 뻔뻔함을 무릅쓰고 한 말씀 드리자면, 우리의 토양을 적실 물길이 필요합니다. 수혈이 당신의 건강을 근근이 유지하는 것이라면, 물길은 우리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운 땀방울과 다부진 손길이 우리와 함께 머물게 된다면 당신은 당신만의 온화한 미소와 수수한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물길을 터보려 애써 도랑을 파보았지만, 우리 땅을 적시기엔 비좁기 짝이 없습니다. 그 도랑마저 메말라 버릴 것 같아 불안한데 일손은 부족하고 벌써 지치는 기색입니다. 그리하여 야속하게도 큰 물길은 다른 곳으로만 흐릅니다. 제 흐르던 방향만을 고집하고 우리 땅의 작물은 오늘도 힘을 잃어갑니다. 조금이라도 우리 땅으로 스며들도록 물길을 돌려보려 하지만, 물살이 너무 거친 탓에 손만 담가도 우리마저 휩쓸리고 빨려들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

아, 그럼에도 불현듯 고개를 드니 다시 벚꽃이 피었네요. 워낙 짧게 피고 지는지라 조급한 마음으로 추억 위로 벚꽃 한 송이 띄워 봅니다. 당신은 기억하시려는지요. 부족한 손길에도 수줍게 얼굴 내밀던 우리 땅 위의 소박한 꽃들을 말입니다. 저는 기억하려 합니다. 자욱한 흙먼지 바람 속에서 진솔한 땀방울 흘리던 이름 기억되지 못할 얼굴을 말입니다.

▲ 김한기 청주방송 PD
오늘을 기념하여 제 손을 보여드립니다. 오늘에 이르러 당신에게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제 성실한 인생의 흔적입니다. 굳은살만큼은 제법 두툼합니다. 걱정 마세요. 이 손의 경력으로 당신을 떠나 어딜 갈 수 있겠습니까. 가난하게나마 기뻐하시길. 제 마음속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더운 가슴으로 당신을 찾던 17년 전의 저와 같은 청춘들이 돌아올 때면 언제라도 넉넉하게 품어주시길. 아름다운 당신의 애틋한 그 이름, 고향 그리고 지역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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