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경쟁에 재난방송 매뉴얼 ‘무용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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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보도준칙’ 제정 움직임…‘공동취재단’ 운영 제안도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를 전하는 언론의 선정주의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대형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재난보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발방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여객선 ‘새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이후 5일 동안의 방송 뉴스를 보면 실종자 가족과 대중이 언론에 보낸 냉소는 납득할 만하다. 침몰 사고 초기부터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낸 언론은 이후 구조 상황을 전하면서도 우왕좌왕하는 정부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면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현장 취재에 나선 지상파 방송 한 PD는 “언론에 대한 불신이 강해 인터뷰는커녕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다”며 “정부의 소극적이고 우왕좌왕하는 발표에 불만도 크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피해자의 감정과 인권을 배려하지 않는 보도는 시청자의 눈에도 거슬렸다. JTBC 앵커 부적절한 질문부터 ‘실종자 가족의 오열로 가득한 뉴스’, ‘사고 첫날 보험금을 계산한 보도’ 등이 시청자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언론보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지난 17일엔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까지 선정적인 보도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고 나섰다.

▲ MBC <특집이브닝뉴스> 4월 16일자 보도.
▲ 손석희 JTBC <뉴스9> 앵커가 16일 뉴스 오프닝에서 이날 낮 뉴스특보를 전하던 앵커가 세월호에서 구조된 안산 단원고 학생에게 부적절한 질문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언론이 세월호 침몰사고에서 ‘대피 매뉴얼’ 미비를 지적하고 있지만 정작 재난보도의 매뉴얼은 지켰는지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방통위의 ‘재난방송 및 민방위 경보방송의 실시에 관한 기준’, 각 방송사의 방송강령, 재난방송 매뉴얼 등이 재난보도의 첫 번째 준칙으로 정하고 있는 건 보도의 정확성이다. 방통위의 ‘재난방송 기준’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장시간 인터뷰’, ‘피해자의 심리적·육체적 안정을 저해하는 행위’ 등도 금지하고 있다. 언론은 대형 재해나 재난이 발생할 경우 알권리를 신장하면서도 피해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역할과 의무를 명시해 놓은 것이다.

각 방송사 방송강령에도 재난보도와 관련한 준칙을 담고 있다. KBS는 특히 방통위의 재난방송 기준에 따라 재난방송 매뉴얼을 마련해 운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KBS가 지난 18일 구조대의 선체 진입 소식을 전하면서 “선내 엉켜 있는 시신 다수 확인”이라는 자극적인 자막을 사용하고 오보로까지 드러나면서 매뉴얼의 실효성에 의구심이 커진다.

지난 19일 방송된 <추적 60분>에서도 진도체육관에 머물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이 여과 없이 노출되는가 하면 구조자들이 머문 병원에 취재진이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나누는 장면도 나갔다.

언론사들이 재난보도와 관련한 준칙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지나친 속보·취재경쟁을 벌인 탓이 크다. 세월호 침몰 사고에 전국민적인 관심이 쏟아지다 보니 ‘재난 장사’라고 표현이 될 정도로 인터넷에는 관련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이 중에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전달하거나 검증이 안 된 보도가 부지기수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이후 재난보도준칙 제정안 작업을 했던 이연 선문대 교수(언론광고학부)는 “언론의 ‘세월호 보도’를 보면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가 일어났던 1990년대와 별로 나아진 게 없다”고 “인명을 구한 뒤에 시시비비를 가려도 될텐데 언론의 냄비근성, 책임추궁식 보도가 계속돼 안타깝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번 여객선 침몰 사고의 경우 정부의 지휘체계의 잘못이 크지만 언론도 정부의 발표를 검증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대형 오보를 낸 언론이 정부의 탓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오보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고 지적했다.

▲ 정확하지도 않은 사실을 자극적인 내용으로 자막을 내보낸 4월 18일 KBS 1TV <뉴스특보>. ⓒKBS
비판 여론이 커지면서 방송사 내부에서도 자성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SBS는 세월호 침몰 사고 보도를 모니터 한 뒤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문자 메시지를 통해 보도국 구성원끼리 공유하고 있다. SBS는 사고 발생 이후 보도국장의 지시로 ‘생존자 단어를 쓰지 말 것’, ‘앵커와 출연자는 사망자 이름을 언급하지 말 것’, ‘유가족을 자극하는 말을 하지 말 것’ 등 일종의 ‘보도 매뉴얼’을 보도국 기자들에게 발송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 방송사는 실종자 가족이 오열하는 장면 등을 모자이크로 처리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한국기자협회(회장 박종률)는 20일 ‘여객선 세월호 참사 보도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발표했다. 2003년 추진하다 흐지부지됐던 재난보도준칙 제정도  다시 꺼내들었다. 박종률 한국기자협회장은 “현 시점에 맞는 재난보도 매뉴얼을 정부부처와 학계, 현직 기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상반기 중으로 마련할 계획”이라며 “결과물을 내놓는 것보다는 기자들이 이번 문제를 계기로 언론의 무거움을 알고 국민의 아픔을 보듬을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취재경쟁이 과열되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동 취재 시스템도 제시된다. 백선기 성균관대 교수(신문방송학과)는 “국민적인 관심이 높고 어린 학생들의 문제다 보니까 취재경쟁이 더욱 과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언론사끼리 공동취재팀을 꾸린다든지 알권리가 아니라 혼란을 부추기는 보도를 자제하고 자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연 교수는 “재난보도는 인명을 다루는 보도인데 다소 늦더라도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고 보도하는 게 필요하다”며 “되풀이되는 재난보도의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선 사고가 수습된 이후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기자들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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