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진짜 노동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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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쌍용차 해고자 26명의 기록 ‘그의 슬픔과 기쁨’ 펴낸 정혜윤 CBS PD

정규직 2646명, 비정규직을 포함한 3000여 명이 한순간에 직장을 잃은 대규모 정리해고. 77일간의 옥쇄파업, 파업으로 47억원의 손해배상금을 물게 된 노조. 그리고 세상을 등진 스물 다섯 명의 해고자와 그 가족. 언론을 통해 알려진, ‘쌍용자동차 사태’를 나타내는 수치들이다. 5년 동안 노동계 단골 이슈였던 쌍용차 사태를 안다고 여기면서 떠올리는 숫자들이다. 그러나 세상이 쌍용자동차 사태에 보이는 관심은 여기까지다.

언론은 정작 해고자들이 왜 5년이나 지난한 싸움을 했는지에 묻지 않는다. 해고를 당하지 않은 ‘산 자’가 왜 파업에 참여했는지, 송전탑에 올라가게 한 힘은 무엇인지 그들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다. 정혜윤 CBS PD가 지난해 여름 쌍용자동차 파업 당시부터 선두에서 싸웠던 해고자 26명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 쌍용자동차 해고자의 26명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슬픔과 기쁨>을 최근 펴낸 정혜윤 CBS PD.
■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 = “뉴스를 다룬 프로그램을 연출하면서 쌍용자동차 사태를 비롯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알려고 했지만, 항상 부족했어요. 2013년 쌍용차 해고자들이 준비한 ‘모터쇼’에서 웃고 있는 해고자의 얼굴을 보고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알고 싶었어요.” 

지난해 ‘H-20000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열린 모터쇼는 쌍용차 해고자들이 만든 세상에서 단 한 대뿐인 자동차를 공개한 날이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정 PD 앞에 앉은 한 쌍용차 해고자는 “또 하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정 PD가 최근 펴낸 <그의 슬픔과 기쁨>(후마니타스)는 쌍용차에서 해고된 26명의 이야기를 르포 에세이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모터쇼에서 만난 김대용씨를 비롯해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장, 한 전 지부장과 송전탑 위에서 171일 동안 고공 농성을 벌였던 복기성 쌍용차 비정규직노조 수석부지회장 등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선도투’라고 불리는, 인터뷰 당시 해고 이후 다른 생계활동을 하지 않고 대한문 앞에 마련된 분향소를 지킨 이들이다.

“어떤 인터뷰가 나올지 몰랐다”는 정 PD는 이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렸을 때 꿈이 뭐였느냐’,‘부모님에게 어떤 자식이었느냐’는 질문부터 시작했다. 사회가 낙인찍은 해고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빠, 한 인간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이 책을 쓰면서 한 노동자에게 한 질문보다 한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 많았어요. 뉴스를 통해 쌍용차 사태에 대해 흔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이고 싶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더 중요했어요.. 사람에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지만 결국 사람에게 해답을 구하게 된다는 걸 이분들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쌍용자동차 사태’나, ‘쌍용자동차 해고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는 강조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팔뚝질을 하는 모습으로 뉴스에 등장했던 이들은 책에서 신념과 이데올로기를, 복직의 정당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차와 함께 죽겠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차를 좋아했노라고 고백한다. 파업에 참여한 동기로 염치와 책임감, 믿음을 이야기한다. 해고자 명단에 없었지만 파업에 참여한 박호민 씨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이유를 댔다. 또 다른 해고자는 “파업에 참여 안 하면 꼭 배신자 같다”는 이유로 파업에 참여했다. 복기성 지회장을 송전탑에 올라가게 한건 “사람들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만약 아끼는 후배가 해고를 당했다면 진심으로 같이 울고 위로해줄 거예요. 그렇지만 후배를 좋아하니까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데 인터뷰한 이분들은 ‘책임감 때문에’,‘내가 어떻게 그래’라는 이유로 파업에 동참했어요.”

일에 대한 열정, 함께 일한 동료에 대한 애정, 어려울 때 상대방을 배신할 수 없다는 마음이 5년이라는 시간을 버티게 했다. “공교롭게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부재가 드러난 것들이잖아요. 그런데 해고자들은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 잊지 않고 있어서 서로 지탱할 수 있었던 거죠.”

▲ <그의 슬픔과 기쁨> 표지.
■ “연인처럼 차를 사랑했던 이들이었는데…” = 이 책은 2012년 쌍용차 해고자와 그 가족들의 죽음을 행렬을 막자는 취지로 발족한 ‘함께 살자 희망지킴이’와 뜻을 함께 하고 있는  정PD의 일종의 재능기부였다.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잘 들리게 하는 게 라디오 PD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분들이 ‘우린 어떤 인간이예요’라고 세상에 하는 말을 규정짓지 않고 귀 기울이려고 했어요.”

정 PD는 <사생활의 천재들>, <삶을 바꾸는 책 읽기>  등 다수의 책을 쓴 작가이자 인터뷰집을 낸 경험이 있지만 <그의 슬픔과 기쁨>의 집필 과정은 고된 작업이었다. 26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는다는 게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정 PD는 이 책을 집필한 기간에 오전 6시 시작하는 프로그램 <좋은 아침 김덕기입니다> 연출을 맡고 있었다.

이들의 목소리가 잘 전달하려고 구성을 몇 번이나 바꿨다. 200자 원고지 1000매를 다시 썼다. 처음엔 26명의 인터뷰를 따로 나열했다가 인물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엮는 식으로 고쳤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외로워 보였어요. 26명 모두 5년 동안 혼자 지내지 않았거든요.”

고된 작업이었지만 정 PD는 26명과 함께한 기간이 “뜨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보통 대기업 노동자들은 기계·부품화됐다고 흔히 말하는데 이분들이 작업장에 갖는 애정은 놀랄 정도였어요. 연인을 기억하는 것처럼 차를 보고 언제 차를 칠했는지 기억하고 있는 분도 있었어요. 내 직업에 그 정도의 애정을 쏟고 있나 돌아보게 했죠.”

그는 한상균 전 지부장이 한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한 전 지부장은 파업의 교훈으로 “‘노동 인문학’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며 “먼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양심이 없으면 운동도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싸워서 될 게 아니라는 정세 판단을 하고 먼저 백기를 들었다. 양심·염치·도덕이 있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노동자다웠다”는 한 지부장의 냉정한 평가는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26명의 긴 이야기를 들은 정 PD는 독자들에게 되묻는다. “이분들도 흔들리면서 나아갔어요. 중요한 건 나에게 소중한 질문이 무엇인가,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책을 쓰면서 스스로 던졌던 질문을 이제는 누군가가 받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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