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인문학 생중계]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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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리 지명자 문창극의 헛소리

“하나님이 세월호를 침몰시켰다”는 어느 목사의 말에 이어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총리 지명자의 말이 충격을 주었다. “6.25는 미국을 붙잡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니, 가뜩이나 마음 상해 있는 국민들에게 ‘멘탈 붕괴’를 안겼다. “위안부 배상은 이미 끝났고 일본의 사과가 필요하지 않다”는 발언에 일본 네티즌들이 환호했고, 이런 분에게 국가대개조를 맡긴 대통령을 탄식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 ‘참극’을 빚은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거두절미해서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들어도 민망할 것 같다. 그러나, 앞뒤 맥락을 보면 꼭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보다. “하나님이 온갖 시련을 주셔서 오늘의 번영하는 나라로 이끄셨다”는 깊은 뜻을 무시한 채 한두 마디만 콕 집어서 보도하다니, 총리 지명자는 괘씸한 KBS에게 소송을 제기하셨다. 어느 때보다 ‘통합’이 필요한 지금, ‘하나님’ 때문에 국론이 갈갈이 찢어진 모양새다.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일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것은 위안을 준다.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신의 뜻을 읽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카타르시스와 치유 효과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주인공들은 고난을 통해 성숙한다. 구약의 욥은 부조리한 재난을 겪지만 신 앞에 무릎 꿇고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축복을 되찾는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예수의 말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드높은 깨달음이자, 행복으로 가는 소박한 지혜다.

그러나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어린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침몰시켰다”거나 “하나님이 식민지배와 분단을 주셨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보면 신이 나쁜 짓만 골라 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신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의 이성은 반드시 역설에 빠진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국가인 덴마크에서 살았기 때문에 신을 화두로 사색했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성실하게 추론했다. 이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자가 아니었다. 절대자는 역설이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었다. 세상에서 오해받고 십자가를 진 예수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진 고독한 사람이 참된 기독교인이었다. 예수가 다시 온다면 나팔을 불며 자기가 예수라고 광고하며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현실의 기독교는 예수의 삶과 정반대로 가고 있다. 이 또한 역설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세속의 권력과 부를 숭배하는 덴마크 국교와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4) 에피큐러스(BC341~270)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에피큐러스는, 신(神)이 전능하고 선하다고 주장할 경우 모순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도 역설이다. 신이 있다면 죽지 않을 것이다. 신이 죽었다면 애초에 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니체는 신의 관념을 극복한 인간을 꿈꾸었다. 기독교의 ‘노예도덕’에서 서구 문명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인류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모두를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었다. 니체를 이해한 사람은 예상대로 매우 드물었다. 그는 ‘신’이란 말 없이는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었고, 결국 역설에 갇혀서 미쳐 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으로 “신이 없다면 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신은 절대 죽지 않는다. 하늘에서 신이 죽으면 땅에서 신이 자랄 것이다. 그는 니체를 몰랐지만, 만일 알았다면 무신론자의 파국이라고 했을 것이다. 신의 불멸을 믿는 사람의 ‘믿음’이야말로 불멸인 것 같다. 인간이 죽어야 신도 죽을텐데, 그렇다면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셈 아닌가? 이 또한 역설이다.

2천년 가까이 기독교 문화 속에서 살아 온 서양 사람들은 ‘신’이란 말을 떼놓고 사고하기 어려웠다. 프랑스 시인 라마르틴은 “신은 세상을 창조하다 말고 낮잠을 자러 갔다”고 투덜댔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에게 잔인하게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미칠듯이 신을 저주했다. 인간의 자유를 예찬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마저 신에 대한 토론이 책 전체의 1/3에 달한다.

우주의 기원을 탐구하는 현대 과학자들조차 빅뱅을 얘기할 때 ‘창조’란 말을 쓴다. ‘빅 히스토리’를 주창한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시간의 지도>에서 인간의 기원을 ‘현대의 창조 신화’에 비유해야만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21세기에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동성애자보다 더 심한 곤욕을 치러야 한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신앙을 검증받아야 한다.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는 “미국의 무신론자여, 커밍아웃하라”고 외쳤다. 양심의 자유를 누리려면 용감하게 정체성을 밝혀서 스스로 기본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킨스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종교가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하며 평화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무신예찬>이란 책은 신을 믿지 않는 50명의 다양한 무신론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자기 신을 내세우며 싸운다면 신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신이 이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다 들어준다면 인류는 벌써 멸종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역사 속의 무수한 악행과 비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은 신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지 않은가?

도킨스는 미국이 신정국가로 흘러가는 걸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겠지만, ‘무신론’이란 용어는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 말이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프레임으로 들어가서 논쟁하면 결론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이유는 신을 믿는 이유만큼 다양하며, 어느 입장이든 대칭되는 논거를 끝없이 제시할 수 있다. 양쪽 모두 자기 신념을 미리 전제한 뒤 논증하는 순환론에 빠져 있으므로 애초에 토론이 되지 않는다. 도킨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대한 논증을 어떻게 일일이 감당할 생각일까.

근본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결국 신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미국의 대럴 레이는, 종교가 우리의 삶과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하면서 ‘갓 바이러스’(God Virus)란 개념을 도입했다. 인간은 ‘신’이란 말을 써도 사고할 수 있고, ‘신’이란 말을 안 써도 사고할 수 있다. ‘신’이란 관념을 갖고도 양심적일 수 있고, ‘신’이란 관념을 버려도 양심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신’(神)은 정상적인 사고에 쓸데없이 덧붙여진, 불필요한(superfluous) 관념 아닐까?

레이의 <신들의 생존법>에 따르면, 신(神)은 인간의 두뇌에 끼어 있는 바이러스와 같다. 이 바이러스는 병원체처럼 숙주를 감염시키며 집요하게 번식한다. 숙주는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걸 완강히 부인하고, 자기 합리화의 논거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레이의 접근법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만, 믿는 이들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킬 뿐 효과적인 치료제는 아닌 것 같다. “너 예수병 환자야” 하는데 순순히 동의할 기독교인이 어디 있겠는가?

신이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을까? 우주 밖에? 우주 안에? 바이러스가 되어 우리 뇌 안에?

▲ 신이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을까? 우주 밖에? 우주 안에? 바이러스가 되어 우리 뇌 안에?
차라리 “신은 관념과 언어로 존재하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훨씬 간명할 것 같다. 존재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쿨(cool)한 기독교 신자라면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빅뱅을 밝혀낸 우주론의 성과에 기대어 에피큐러스처럼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신이 아니다. 신은 우주 밖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우리와 관계가 없다.”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개신교의 비율이 미국 역사상 처음 50% 아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개신교는 53%에서 48%로, 기독교는 78%에서 73%로 줄었다. 반면 ‘특정 종교 없음’은 15%에서 19%로, ‘무신론’은 1.6%에서 2.4%로 증가했다(퓨 리서치센터, 미국 성인 2,973명 대상 조사, 2012). 인류가 진화하면서 신의 숫자가 줄어들어 왔다는 우스개가 있다. “인류의 종교는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진화했고, 곧 영(零)신교로 진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레이의 이론에 따르면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은 ‘갓 바이러스’를 완전히 떨쳐버린 자유로운 인간 아닐까. 니체는 신에 의존하지 않는 지혜롭고, 생명력 넘치는 인간을 꿈꾸었다. 이 ‘초인’이 가능한지 여부를 떠나, 전인류가 ‘초인’으로 진화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걸 앞당기려고 조바심한다면 니체처럼 미칠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일단 평화롭게 공존하는 예의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종교의 좋은 면까지 부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소통을 촉진하는 종교의 순기능은 구석기 시대 크로마뇽인이 이미 증명했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하고 크로마뇽인이 살아남은 건 종교 의례를 통해 동질감과 네트워크를 이뤘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교가 다양해지면서 여러 부작용도 생겨났다. 기독교의 다양한 분파도 마찬가지였다. 다수 집단은 소수 집단을 ‘사이비’로 낙인찍는다. ‘구원파’에 대한 여론몰이가 한달 가까이 이어졌는데, 이 차이는 ‘큰 사이비’와 ‘작은 사이비’의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인 이기적, 배타적, 독선적인 오류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서양에 비해 기복 신앙의 요소가 강했다. “기독교 국가는 잘 살고 이슬람 국가는 못 산다”는 생각은 돈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꼴이니 뻔뻔해 보인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셔서 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신 것”이란 발상은 세속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내세우는 논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합리적인 역사의식이 아니며, 사람들의 구체적 아픔에 대한 공감이 결여돼 있다.

국민을 통합해야 할 책임총리 후보자가 이성에 어긋나는 종교적 견해로 사사건건 논란을 일으킨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파한 총리 지명자는 대학 강단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은 대다수 민중이 무지하기 때문”이라며, “대중은 우매하고 선동 · 조작되기 쉬우므로 엘리트들이 여론을 이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 마이 갓! 이 말도 ‘하나님’의 뜻일까? 예수는 언제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었다. 종교의 코스프레 뒤에 있는 이 사람의 맨얼굴, 예수가 보면 뭐라고 하실까.


▲ 책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미래엔
[참고한 책]
스티븐 로<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윤경미 옮김, 미래엔, 2011)

현대인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 때문에 원시인보다 나은 걸까? 문창극 같은 사람이 하나둘이 아닌 걸 보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교수, 언론인, 총리 지명자 등 ‘배운 사람’ 중 이런 사람들이 많은데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까?

미국의 철학자 스티븐 로(Stephen Law)는, 좀체 빠져나오기 어려운 ‘허튼 신념의 체계’를 ‘지적 블랙홀’이라 부른다. 교묘하게 휩쓸려 들어가지만,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늪과 같다는 것이다. 헛소리(bulshit)는 일종의 사기행위로, 거짓말과는 좀 다르다. 자기가 틀린 줄 뻔히 알면서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에 부합하건 안 하건 자기 목적을 위해 맘에 드는 말만 골라서 하는 것이다.

헛소리는 종종 심오한 전문용어로 포장되지만 합리성과 거리가 멀긴 마찬가지다. ‘배운 사람’이 종교 집회에서 헛소리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순으로 인식하는 대신 무척 심오한 말로 받아들인다. ‘지적 블랙홀’에 빠진 사람은 자기 헛소리가 물의를 빚으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태연하게 우긴다. 총리 지명자가 하루는 KBS를 고소하고, 또 하루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하는 등 좌충우돌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에 인용된 해리 프랑크푸르트는 “진리의 가장 큰 적은 거짓말이 아니라 허튼 소리”라고 지적한다.

<돼지가 철학에 빠진 날>에서 쉽고 재미있는 철학 이야기를 펼쳐 보인 스티븐 로는 이 책에서 헛소리의 여덟 가지 특성을 보여주고, 이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논리의 밧줄을 던져준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에 논리의 백신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운 사람’의 헛소리가 난무하여 현기증이 나는 요즘, 머리 식히며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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