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음악이라서 더 좋았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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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음악이라서 더 좋았던 영화
[이재익 PD의 영화음악 오딧세이] ‘빌리 엘리어트’
  • 이재익 SBS PD
  • 승인 2014.06.17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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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는 지난 2001년 2월 17일 개봉한 영국 영화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연출하기도 했던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출세작이라고 하겠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인 만큼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음악이 깔린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왈츠나 발레곡이 아닌 로큰롤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지배한다. 그것도 글램록의 이단아 ‘마크 볼란’의 노래가 작심한 듯 이어진다.

마크 볼란은 국내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추구했던 글램록이라는 록의 장르 자체가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 마크 볼란과 함께 글램록의 대부로 추앙받는 데이빗 보위 정도가 그나마 글램록 아티스트들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정도. 물론 21세기 들어 발표한 보위의 음악은 글램록이 아니라 그냥 데이빗 보위 록이지만.

간단하게 글램록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70년대에 영국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과장된 패션과 창법을 추구한 일련의 로큰롤 밴드들의 음악을 일컫는다. 과하게 메이크업을 하거나 트랜스젠더처럼 양성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무대 매너 등등도 글램록의 중요한 특징이다.

 

▲ 영화 <빌리 엘리어트>

대체 왜 <빌리 엘리어트>같이 희망차고 아름다운 성장 영화에 퇴폐적이고 종종 우울하기까지 한 마크 볼란의 음악을 도배하듯 썼을까? 영화를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이유가 보인다.

<빌리 엘리어트>는 뜬금없는 마크볼란의 음악 외에도 이질적인 요소들이 가득한 영화다. 춤추고 싶은 소년의 꿈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영국 탄광의 파업 문제만 해도 그렇다. 발레와 탄광 파업이라.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파업을 지지하는 충실한 탄광노조원이다. 그들은 개인적인 이유로 파업에서 빠지는 노조원들을 경멸한다. 그런데 빌리의 발레 수업을 위해서는 파업에서 빠져나와 회사로 돌아가 돈을 벌 수 밖에 없다. 아들이냐 노조냐, 고통스러운 선택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면은 눈물을 자아내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동성애 코드도 독특하다. 빌리의 유일한 친구랄 수 있는 소년은 트랜스젠더다. 남 몰래 누나 옷을 훔쳐 입고 화장을 한다. 정확한 감정선은 드러나 있지 않은데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 친구가 빌리에게 연정을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영화의 짜임새가 워낙 탄탄하다보니 탄광노조의 파업이나 동성애 친구 같은 소재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발레와는 별 상관이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걷어내고 발레에 더 집중했더라면 이 영화가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까? 아마 그저 그런 성장영화들 중 하나로 남았겠지. 빌리 엘리엇이 수많은 성장 영화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반짝이는 이유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삶’이라는 거대 명제 안에 잘 녹여냈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 역시 그러하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 타협하기 힘든 것들로 가득한 것이 우리의 삶 아니겠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감독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마침내 성공한 발레리노가 된 빌리의 공연장을 찾은 가족과 친구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발레 따위는 계집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믿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트랜스젠더 고향 친구, 그 친구의 흑인 (남자) 애인. 한 자리에 모이기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 담긴 화면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쯤이 아닐까? 누구도 타인의 꿈과 취향에 간섭할 자격은 없다.

고상한 클래식도 귀에 익은 왈츠도 아닌 70년대 글램록 역시 이 영화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듣기 좋은 불협화음만큼 멋진 화음은 없다고 누군가 말했던가. 그러고 보니 서른도 되기 전에 요절한 마크 볼란의 음악에는 춤과 동성애, 혁명, 화려한 무대…. 이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다. 뜬금없는 선택인 줄 알았는데 절묘한 선택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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