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언론이여! 기본소득제를 공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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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가 노예제 폐지의 세기였고 20세기가 보통선거권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기본소득제의 세기가 될 것이다.”

벨기에의 판 파레이스 교수의 말인데, 어쩌면 우리는 이 예언적 주장이 실현되는 날을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사안에 관해 유럽에서 펼쳐지는 분위기를 보면 그렇다. 기본소득제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가족단위가 아니라 개인별로- 똑같은 금액을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작년에 매달 1인당 300만가량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는 안건이 발의되어 국민투표에 부쳐질 예정이다.

기본소득 금액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 필수품과 서비스 비용에 근거하는데, 일차적으로 각 나라의 경제력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정치세력과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대략 월 100만원, 독일에서는 월 140만원(1000유로)의 금액이 주장되고 있다. 한국의 경제력으로 볼 때 월 30~50만원이 가능한데 30만원으로 적게 잡아도 송파 세 모녀의 경우 월 90만원의 소득이 보장되므로 집단 죽음의 막다른 길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꿈같은 얘기라고? 그렇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꿈꾸기를 스스로 거부해온 것은 아닐까? 인간만이 또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꿈꾸기를.  한국처럼 현실이라는 말이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바꾸어야 할 현실’과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는 양극단 사이 어디쯤 놓여 있어야 할 현실이지만, 한국에서는 모든 현실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에 가까워서 “현실을 모르는 소리야!”라는 말 한마디로 현실을 바꾸기 위한 모든 토론과 꿈꾸기는 진전되기 어렵다.

▲ 지난 3월 5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한국기독교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등 참석자들이 '송파 세모녀 자살사건 관련 추모의식 및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노컷뉴스
기본소득제의 목적은 복지 사각지대를 없게 해준다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를 발본적으로 바꾸려는 데 있다. 이는 무엇보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지위가 점차 추락하고 있는 점과 연관된다. 가령 자본이 자동화, 정보화에 이어 인간두뇌까지 장착된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되면서 노동은 일자리 수 자체도 줄어들고 있는데, 그 위에 과거에는 노동의 숙련성으로 자본에 맞서 균형을 일정 정도 이룰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 잃고 있다. 인간노동이 가질 수 있었던 숙련성을 자동화, 정보화된 기계설비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2차 산업에서 이처럼 일자리가 줄어드는 동시에 그 지위가 열악해질 때, 3차 서비스 산업에서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하지만 대부분 감정노동인데다 임금조건도 나쁘고 일자리도 무척 불안정하다. 사회구성원들의 보편적인 존재조건이 프롤레타리아에서 프레카리아트(prcariat)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precarious)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을 합성한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관심의 눈으로 잠시만 살펴봐도 안정에서 불안정으로, ‘포함된 자’에서 ‘배제된 자’로의 일방통행만 가능하다는 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 미래의 불확실성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불안은 가중되고 불안이 가중되면서 인간영혼은 잠식된다. 인간성이 확장되면서 발현되기보다는 축소되거나 훼손되고 마모되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제는 오늘의 자본주의 현실 아래 인간의 존재조건이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본소득제는 현실정치의 논의 바깥에 있고 주류매체들에게도 관심 바깥에 있다. 기자를 비롯한 언론종사자들이 민중이 처한 사회현실을 분석, 비판하고 새로운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의 동정을 보고하는 일을 주된 소명으로 알고 있기에 그렇다.

또한 일생 동안 대학입학과 취업을 위해서만 긴장하고 학습할 뿐 일단 취업한 뒤에는 학습을 거의 멈춘다는 점에서 언론종사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언론매체가 기본소득제에 관한 논의를 충분히 다룰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배경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면 이를 소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 홍세화 <말과 활> 공동발행인
기본소득제란 무엇인가. 어떤 철학적, 정치사회적 토대 위에 있는가.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등에 관해 이미 국내에도 많은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언론종사자들의 관심과 학습 이 있기를 기대한다. 

*글쓴이 홍세화는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한 뒤 2002년 영구귀국해 <한겨레> 기획위원과 진보신당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는 가장자리 협동조합 이사장과 <말과 활> 공동발행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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