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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인문학 생중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은 무척 잔인해 보인다. 모든 폭력에 똑같은 폭력으로 보복한다면 얼마나 살벌한 세상이 될까. 이 원칙은, 남에게 피해를 준만큼 대가를 치러야 최소한의 정의가 이뤄진다는 뜻으로 읽힌다. 눈 다치게 한 사람을 죽여 버리거나 이 부러뜨린 사람을 반신불수로 만드는, 지나친 처벌을 막자는 취지도 있을 것이다. 문명종교라는 기독교의 모세 율법도 같은 원칙을 말하고 있으니, 유독 함무라비 법전이 잔인하다고 비난하긴 어렵다.

 “함무라비, 당신은 찬양받을 군주요, 신들의 충실한 신하다. 정의를 사방에 전파하고 사악함을 없애버렸으며,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와주었다. 당신은 만인을 교화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함무라비 법전 서문)

▲ 최초의 성문법인 함부라비 법전.
‘최초의 성문법’인 이 법전은 BC 1772년, 바빌로니아의 6대 왕 함무라비(재위 BC 1792~1750)가 선포했다. 사람 키 높이의 비석에 282개 조항을 설형문자로 새겨 넣었다. 함무라비의 별명은 ‘적을 향해 돌진하는 황소’였다. 35년간의 정복 전쟁으로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을 통일한 그는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릴 방법을 고민했다.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가 200년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초석이 됐다.

“법전이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모욕하지 않게 하고, 고아와 과부가 머물 곳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손해 입은 자가 정의를 펼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농경사회로 접어든 뒤 인간 사회는 신속히 변화했다. 잉여 농산물에서 사유재산이 발생했고, 계급과 신분이 분화했고, 상거래와 도시가 발달했고, 국가가 탄생했고, 약탈 전쟁이 일상화됐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충돌하자 이를 조정할 법이 필요해졌다. 함무라비 법전은 무법천지가 될 뻔한 세상에 처음으로 ‘법의 지배’를 가져왔다.

농업혁명 이후 초기 국가를 이룬 당시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함무라비 법전은 재산을 둘러싼 분쟁, 부부와 부자(父子) 사이의 갈등, 의사와 소몰이꾼 등 서비스 제공에 대한 급료 등 인간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원칙을 규정하여 당시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게 해 준다.


▲ 함무라비 법전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생겨난 것은 모든 문명과 역사가 농업혁명에서 비롯됐음을 말해준다.

우선, 사유재산을 엄격히 존중한 게 두드러진다. “도둑질한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6조), “남의 집에서 물건을 가져가다 잡히면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22조). 원시 수렵사회에 없던 ‘소유’의 개념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도둑질한 물건을 받은 사람도 사형에 처한다”고 하여, 남의 재산을 건드리는 건 꿈도 꿀 수 없게 했다.

상거래의 발전을 보여주는 조항도 있다. “옥수수, 모직, 기름 등 물건을 주면 그에 해당하는 영수증을 받고, 이 영수증을 제시하면 보상 받는다”는 구절이 있다(104조). 이 영수증은 초기 화폐의 맹아(萌芽)라 할 수 있다.

“금, 은, 노예, 가축을 주인의 동의 없이 가져간 사람은 절도로 간주, 사형에 처한다.” 당시 사람들이 소중히 여긴 재산의 목록을 보여준다. 노예를 재산으로 여긴 엄격한 신분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남녀 노예를 성문 밖으로 데려간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15조), “노예가 주인에게 반항하면 귀를 자른다”고 했다(282조). 노예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조항들이다. “노예의 눈을 상하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린 자는 벌금을 (자유민의) 절반만 낸다”고 했다(199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도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 셈이다.

▲ 바빌론의 폐허.
가부장제의 규율도 있었다. “아버지를 때린 자는 손을 자른다”고 했다(195조). 모계 중심의 원시 공동체에서 일부일처 사회로 이행했다는 증거도 보인다. 여자는 ‘동의서’가 있어야만 아내로 인정됐는데, 여자를 납치하거나 폭력으로 데려가는 걸 막는 규정으로 보인다. 남편이 학대할 경우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었다. 여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해석된다. 간통에 대한 처벌도 무척 상세히 규정했다. “외간 남자와 누워 있다가 잡혔을 때 남편이 용서하지 않으면 (두 남녀를) 목졸라 죽여서 물에 던지도록” 했다(129조). 부부 관계에 대해 10여개 조항에 걸쳐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걸 보니, 예나제나 이 문제가 큰 관심사이자 갈등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함무라비 왕은 하늘의 신 아누(Anu), 땅의 신 엔릴(Enlil), 태양신 샤마슈(Shamash)의 권위를 상징했으니, 왕의 한 마디가 곧 법이었다. ‘법(法) = 왕(王) = 신(神)’의 등식은 이른바 ‘왕권신수설’의 기본 전제였고, 이 권위에 도전하면 극형을 면할 수 없었다. 사형을 남발하지 않았을까 궁금한데, 실제로 얼마나 자주 사형이 집행됐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국가와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하여 개인의 기본권을 보호하려는 근대 법치주의가 싹튼 건 3,000년 뒤였다. ‘최초의 헌법’으로 불리는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1215)가 처음 왕권을 제한했고, 18세기 시민 혁명 이후 서구 여러 나라들이 근대 헌법을 제정했고, 1948년 우리나라도 어엿한 헌법을 갖게 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법에 의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법치주의의 기본을 밝혔다. 근대 헌법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고, 최근에는 복지국가의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우리 사회는 왕권신수설의 원조라 할 함무라비 법전의 시대보다 나은가? 꼭 그렇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통치자가 법 위에 군림하며 국민들에게만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행태가 요즘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를 ‘법치주의’라고 강변하는 건 무지의 고백이자, 유체이탈 화법의 극치다.

법치주의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지만, 일부 권력자에겐 왕권신수설이 여전히 달콤한 유혹이다. 이 유혹을 잘 참고 법대로 하는 건 그나마 옛날에 비해 발전한 모습이다. 세월호 책임을 묻는 성명을 낸 교사들, 거리를 점거하고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는 시민들,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후보자를 비판하는 언론인들, 이 미운 자들을 몽둥이로 패는 대신 법에 따라 처리하려는 태도는 권력자 입장에서 보면 대견할 것이다. “얼마나 민주화된 세상인가….”

권력자는 자기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 법 조항을 입맛대로 골라 적용하고,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자기 편 사람을 ‘합법적’으로 앉힌다. ‘법치주의’의 발전과 나란히,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사익을 챙기고 교묘한 법 적용으로 법체계를 무력화하는 테크닉이 무척 발전했다.

함무라비 법전은 공적인 거짓말을 엄하게 다스렸다. “법정에서 위증한 사람은 사형”이었다(3조). 위증은 사회 전체의 신뢰, 그 뿌리를 흔드는 극악한 범죄로 간주한 것이다. 함무라비 시대라면 청문회에서 거짓말을 한 문화부장관 후보자도 사형이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다른 사람을 거짓 고발한 사람은 사형”이다(1조).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검사들도 모두 사형이다. 박정희 · 전두환 시절 고문으로 가짜 간첩을 양산하여 사법살인을 저지른 뒤 청와대, 국회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판검사들도 모두 사형이다.

이들은 자기 행위가 사회 전체에 얼마나 끔찍한 해악을 미쳤는지 전혀 생각을 못한다. 작은 거짓이 쌓이고 쌓여 상식과 진실을 뒤덮어버렸는데, 정작 본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들을 잡아서 사형시키자면 나는 물론 반대할 것이다. 죄는 밉지만 인간은 미워하지 말자는 쪽으로 사법제도가 발전해 오지 않았는가.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쪽으로 인간 이성이 모아지고 있지 않은가. 교화가 불가능해 보여도 살려놓고 대화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허술하게 지은 집이 무너져서 사람이 깔려 죽으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이 원칙에 따르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나 올 초 경주 마우나오션 붕괴 사건의 책임자는 사형이다. 사형제에 찬성하지 않지만, 엄격한 처벌 규정이 있었기에 함무라비 시대에는 엉터리 건축이 발붙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이 난항을 겪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에 따라 “남의 자식을 죽게 한 자는 그 자식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책임자들을 가려내서 그 자식을 사형에 처하자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어린 생명들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느끼고 아파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참고 프로그램]
EBS 다큐프라임 - 법철학 탐구 대기획 <법과 정의> (연출 박정남)

▲ EBS <다큐프라임-법과 정의> 3부작
지난 5월말, 매우 소중한 다큐멘터리 3부작이 전파를 탔다. 인종 개량을 위해 불임 시술을 강요당한 캐리 버크의 사례에서 시작, 삶의 현장에 깊숙이 닿아 있는 법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게 해 준 프로그램이다.

법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들이 쌓여서 지금의 법이 생겨난 게 아닌가 싶다. 그 판례의 체계는 완벽하지 않다. 법은 인간처럼 생물이기 때문이다. 법은 저절로 정의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정의를 추구하고 스스로 주장하는 인간의 노력이 있을 때만 법을 개선할 수 있고, 정의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법학도였던 소설가 성석제를 리포터로 기용했고, 재연화면을 통해 우리 삶이 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실감케 해 준, 빼어난 다큐멘터리였다.

 * 글쓴이 이채훈 PD는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방송대상, 통일언론상을 수상했다. 한국PD교육원 전문위원으로 일하며 인문학과 클래식으로 이 시대 PD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PD로서 공부하자! 시청자 눈높이에서 질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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