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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contsmark0|‘발품’과 ‘확고한 신념’에 승부방송횟수만도 이미 3천 회가 훌쩍 넘어선 cbs의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시사자키>는 cbs, 교계는 물론 외부에서도 대표적인 시사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곧잘 거론되며 그 이름만큼이나 독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contsmark1|87년 6월 항쟁의 여파로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의 바람은 방송에도 영향을 미쳐 방송사내에서는 노조가 잇따라 결성이 되고, 시사 프로그램들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90년 10월 가을 개편 때 신설된 <시사자키>도 그 중 하나. 당시 kbs <추적 60분>등의 시사프로들이 방송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시대적 상황으로 <시사자키>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연출을 맡은 윤병대(현 편성제작국 부국장)pd는 회고했다. cbs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방송으로 다른 언론들이 ‘쉬쉬’할 때도 꾸준히 제 목소리를 내왔었기 때문에 그나마 수월하게 편성이 됐다고는 하지만 그리 녹녹치 않은 많은 시간들이었다. 윤병대 pd는 “시사프로가 거의 전무하던 시절, <시사자키>프로그램은 cbs 이미지에도 맞겠다 싶었다”며 당시 기획과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나 이 속에는 당시 방송, 신문들이 제대로 내지 못했던 사회비판의 목소리를 cbs만이라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시사자키>는 ‘사회감시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편성이 됐다하더라도 간부들은 물론 정부기관들과의 마찰은 불가피했다. 한번은 인권운동가 서준식 씨를 인터뷰했는데, 간부들로부터 “왜 맨날 빨갱이(?)만 취재하느냐”라는 지적도 받아, ‘빨갱이 pd’라는 별명도 들었다고 한다. 또한 89년 방북으로 구속됐던 임수경씨가 출소 후 <시사자키>에서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려했으나 경영진의 반발로 중단된 일도 있었다. 이 때문인지 윤 pd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춘천지국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역으로 존재해왔던 ‘매체비평’ 코너를 진행해 방송계의 관심을 끌었다. 민감한 사회현안을 다루기 때문에 때로 팀내 의견이 엇갈린 경우도 있는데, 대선기간이었던 90년대 초반, 한 mc가 대본과 달리 특정 대선 후보에 편향된 발언을 하자 윤 pd는 즉각적으로 방송을 끊고 음악을 내보낸 뒤 mc와 다투는 ‘대형사고’가 생겼다고. 이에 시사프로제작진들은 무엇보다 서로 많은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민감한 이슈를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윤 pd는 “90년대 우리 사회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통일, 노동에 대한 문제는 논의해야 할 문제들”이라고 말한다. 당시 제작진은 윤병대 pd와 지금은 sbs로 옮긴 오기현 pd 단 두 명뿐이었다. 비록 30분프로그램이었지만 두 명의 pd가 취재, 섭외, 때로는 진행까지 하기에는 벅찰 수밖에 없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실시간 속보와 여론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발품’과 ‘확고한 신념’에 의지해야 했다. 10년이 넘은 지금 <시사자키>가 예전만큼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데 대해 그는 “시사프로가 많아지고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라며 “당시 <시사자키>를 기획했을 때에는 내가 ‘투사’였다기 보다는 당연히 방송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contsmark2|윤지영 기자|contsmar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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