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2학년 3반 소연 아빠는 양쪽 손, 여섯 개의 손가락이 잘려져 있었다. 그는 저녁쯤에 혼자 술을 마시고는 울음을 터트리곤 했는데, 나중에 말문을 트고 보니 사연이 기가 막혔다. 19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의 프레스 공장에 다녔는데 그때 오른쪽 손가락 3개를 잃었다. 고생하며 돈 벌어서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결혼도 못 하고 서른을 넘겼고, 그즈음에 왼쪽 손가락 3개를 또 잃었다. 결혼을 하기 위해 연변에 갔을 때 처녀 아버지의 손가락이 자신과 똑같이 잘린 것을 보고는 선뜻 이 여자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결혼하고 나서 그는 한동안 행복했다. 적어도 4살 때 소연 엄마가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팽목항에서 소연 아빠는 아내를 원망하며 탄식했다. 그때 아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시흥동을 떠나 안산에 오지 않았을 거니까. 소연이는 엄마 없이도 잘 자라주었다. 마치 친구 같은 딸이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가 침몰했다. 소연이는 차디찬 바닷속에 있다가 118번째로 아빠의 품에 돌아왔다. 소연이를 보내고 나서 아빠는 안산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체육관에 머물고 있다. 뒤늦게 건져 올린 소연이의 가방과 명찰을 바라보며 소연 아빠의 눈은 또 퉁퉁 부어올랐다.
아직도 실종자로 남아있는 권재근 씨, 그 역시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소연 아빠처럼 객지를 떠돌며 노동자로 살아왔다. 성실하고 다부지게 일했고 베트남 여성을 아내로 맞아 늦장가를 갔다. 다행히 부부는 사이가 좋았고 열심히 일했다. 혁규와 지연이가 태어났고 부부는 제주도에 내려가서 살기 위해 자그마한 땅과 집도 장만했다.그리고 4월 16일 마지막 남은 짐을 싣고 서울에서 제주로 향하던 페리호와 함께 이 가족의 꿈은 침몰하고 말았다. 다섯 살 권지연 양은 살아남았지만 지연에게 구명조끼를 내준 오빠, 듬직하던 아빠와 사랑하는 엄마를 모두 잃었다. 지연이는 처음에 엄마 아빠가 자기를 떼어놓고 제주도에 갔다고 생각했다.
“지연아 그게 아냐. 엄마 아빠는 큰 배를 타고 하늘나라로 간 거야”
“그런데 왜 오빠만 데리고 간 거야?”
“…”
진도에 한동안 머물다가 올라온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당신과 나는 세상에 빚을 지고 있는 거 같아. 그래도 우리는 누리고 있는 게 많은 사람이니까”
세월호 현장을 기록해오면서 이 나라 언론과 방송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그 낯 뜨겁고 참담한 이야기를 구구절절하지 않으련다. 누가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가끔 꿈을 꾼다. 아이들이 고래가 되어 시끌벅적 떠들어대며 파도를 가르고 물질을 한다. 낯익은 바닷가 그 어딘가에서 꼬리를 흔들어대지만, 모두가 등을 뒤로하고 있다. 그렇게 꿈을 깬다. 잔인한 세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