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 괴담으로 알려진 근현대사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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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것이 알고 싶다>'뼈 동굴 미스터리, 50년 괴담의 진실'

적어도 내게 민간인 학살 문제는 과거형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역사가 있었고 그것은 정부의 조사를 통해 이미 진실이 규명된, 지나간 과거의 일이었다. 그런 나에게 한 선배가 꺼낸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경상북도 경산의 폐(廢)코발트광산에는 아직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굴러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유골에 대한 발굴과 수습은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된 그 장소가 젊은 세대에게는 전국 10대 흉가로만 알려졌으며 귀신이 나오는 장소로 유명하다고 했다. 확인 결과 실제로 유튜브에는 동굴에서 촬영한 공포체험 영상이 떠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해서든 방송을 통해 이 기막힌 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뼈 동굴의 비밀, 50년 괴담의 진실’편 ⓒSBS

계곡을 흐르던 핏물은 진실이었다

폐코발트광산이 위치한 경산 평산동 일대에는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기이한 소문이 하나 있다. 코발트광산 인근 골짜기(대원골)에서 핏물이 흘러내려 왔다는 것이다. 1950년 여름 시작된 그 핏물은 1년이 넘게 골짜기를 타고 흘렀다고 전해진다.

경산 코발트광산은 일제가 지하자원 수탈을 위해 개발한 곳이었다. 포의 몸통이나 비행기 등에 사용되는 합금의 원료인 코발트는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는 일제에 반드시 필요한 전략 자원이었다. 광석을 실어 나르기 위한 승강구 역할을 하던 수직굴은 입구가 가로 1.7m 세로 4m에 깊이가 100m 이상이었다고 한다.

학살이 일어난 지 10년이 흐른 1960년 당시 현장을 취재해 보도했던 <대구매일신문> 강창덕 전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수직굴 아래 1m 정도까지 흙더미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사이로 유골들이 드러나 있었다고 했다. 10년의 세월을 감안하면 학살 당시엔 수직굴이 시신으로 가득 찼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며, 수직굴이 시신으로 가득 차자 인근 골짜기(대원골)에서 학살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의 수가 3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년 넘게 대원골에 핏물이 흘렀다는 것은 괴담이 아닌 진실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은 평소 정권에 적대적이었던 요시찰 인물들을 처형하기 시작했고, 7월 초부터 경산, 청도지역의 보도연맹원과 대구교도소 수감자들을 코발트광산으로 끌고 가 학살하기 시작했다. 7월 말에는 절정에 달해 하루에도 수백 명을 군용트럭에 싣고 와 총살한 뒤 수직굴에 묻었다고 한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보도연맹원 중 적극적으로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이 지역 빨치산들에게 마지못해 밥을 해주거나 이들을 숨겨준 소극적 부역혐의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일제 강제징용에서 살아남았다가 보도연맹으로 희생당한 사람이나, 일제나 해방 시기에 좌익 혐의로 이미 형기를 마치고 나왔으나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죄를 사해 준다는 꾐에 빠져 도장을 찍어줬다가 희생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당시 정부기관이나 지방단체가 무리하게 성과를 내려는 나머지, 각 지방에서는 동·면장의 권유에 억지로 가입한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는 본인 자신도 모르게 가입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뼈 동굴의 비밀, 50년 괴담의 진실’편 ⓒSBS

레드컴플렉스의 시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최초의 진상규명 운동은 1960년 4·19 직후 시작됐다.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진상규명 운동은 곧바로 지역별 유족회 결성작업으로 이어져 10월 20일에는 전국유족회가 결성돼 합동묘역 조성, 위령제 거행, 국회 청원 등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4대 국회에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가 구성돼 유족들로부터 신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유족회 활동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유린했다. 유족회 간부들을 구속해 최고 사형까지 선고하였으며 피학살자 조사명부, 유골 발굴일지, 유골상자 등을 압수해 폐기하고 위령탑과 합동묘지를 파헤쳐 없애 버렸다.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 빨갱이로 몰렸고, 유족들은 연좌제로 고통받았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레드컴플렉스의 시작이었다.

원혼들이 취재진을 이끌다

유가족들은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유골들이 동굴 속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접근하기 힘든 수직굴을 제외한 수평 1굴과 수평 2굴을 수차례 꼼꼼히 살폈다. 그렇지만 유골은 눈에 띄지 않았다. 유가족들의 주장이나 문서를 통한 설명이 아닌 실제로 유골이 여전히 동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사람의 뼈가 그것도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이 여전히 동굴 속에 방치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수차례 동굴을 꼼꼼히 탐사했지만, 취재기간 내내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작은 뼛조각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방송 초반부에 공개되어 시청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취재진의 유골 발굴 장면은 취재 마지막 날 극적으로 촬영됐다. 공포체험 장소로 알려진 수평1굴의 끝 지점 흙더미 속, 우연히 눈길을 준 그곳에 유골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64년 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원혼들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에 응답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동굴 속 원혼들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어 안내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희생자의 넋 위로, 국가의 의무

지난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시한이 종료되면서 경산 코발트광산 유해발굴 작업은 중단되었고 5년이 흐른 현재 발굴 지점은 수직굴에서 흘러내린 바위와 토사로 덮인 채 지하수에 잠겨 있다. 당시 유해발굴팀장이었던 한양대 노용석 교수는 수직굴과 수평2굴의 교차지점 아래 여전히 수 천구의 유골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부는 유해 추가발굴과 위령사업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없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의 가해자는 우리의 정부 군경이었음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제34조는 “국가는 진실규명사건 피해자의 피해 및 명예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가해자에 대해 적절한 법적·정치적 화해조치를 취해야 하며,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라고 명시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명예회복은 우리 사회가 실천에 옮겨야 할 법적인 의무규정인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정부는 스스로 장의사가 되어 아직도 어두운 동굴 속에 방치된 수많은 유골들의 발굴작업에 나서야 한다. 또한 위령사업을 통해 원혼들의 넋을 달래고 수십 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아온 유가족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것만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세상을 더욱 더 민주화할 수 있는 길이며, 진정한 국민 화해와 통합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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