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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있으나 주권은 없다. 정상국가가 못 되는 만큼 국가주의가 필요하고, 안보 능력이 보잘것없으니 안보 세력은 더 막강해야 한다. 천문학적인 돈을 주면서 구걸하는 모습은 한국의 안보 세력 말고 세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북한보다 30배나 많은 국방비를 쓰면서 미국에 전시 작전권을 양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국가를 왼손(복지, 교육, 보건, 노동 등)과 오른손(관리, 통치, 치안, 정보, 군대 등)으로 나누어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국가부문의 축소는 왼손에만 해당할 뿐 오른손은 오히려 강화하려는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국가주의에 반대할 때 자칫 ‘국가부문의 축소’라는 신자유주의의 언설에 현혹될 수 있는데, 국가 공공성은 약화되거나 실종되면서 국가주의와 권력은 강력해지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실상을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부족함 없이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후보 시절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등 국가의 왼손을 강조했지만, 일단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주된 관심 부문이 검·경찰, 정보(국정원), 국방 등 국가의 오른손 쪽으로 기울었다. 국가의 왼손은 경시되고 오른손만 중시되는 국가. 그러나 왼손과의 균형을 잃은 오른손도 비대해진 만큼 깊은 병에 걸려있기는 마찬가지다.

능력은 없고 세력만 비대한 국방 안보 부문을 비롯해 정치, 경제, 언론, 사법 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모든 부문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악화는 패거리 집단을 이루는 반면에 양화는 고립되어 쫓겨나는) 현상과 함께 애당초 공익, 공공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가의 태생적 한계가 그 배경이 된 게 아닐까. 요컨대, 국가의 모든 부문이 공익, 공공성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구성원의 사익 추구를 위한 발판으로만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영어로 ‘The Republic of Korea(ROK)’ 라고 쓴다. 그런데 REPUBLIC이 ‘공적인 일’ 또는 ‘공적인 것’을 뜻하는 라틴어 어원 ‘RES PUBLICA’에서 온 말이고, ‘사적인 일’, 또는 ‘사적인 것’을 뜻하는 ‘res privata’의 반대말임을 아는 대한민국 국민은 드물다. 암기 위주의 공부를 강제하면서도 정작 헌법 제1조에 담겨 있는 말의 어원은 암기 대상에서 제외된 것인데, 이는 혹시 공익, 공공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익을 극대화하려고 매진해 온 이 땅의 지배세력의 미필적 고의 때문이 아닐까.

공공성은 고대 로마 공화정 때부터 국가의 기본 이념에 속했는데 이는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형성된 근대국가의 이념에도 그대로 담겼다.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스 피케티가 이 책의 서장 첫 부분에 “사회적 차별은 공익을 바탕에 둘 때만 가능하다”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를 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로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국가”라는 근대 공화국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 규정과도 만난다고 할 수 있다.

▲ 홍세화 <말과 활> 공동발행인
1948년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했지만 우리는 일제 부역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 실상은 그들에 의해 민족세력이 청산됐다. 사익(사적 안위와 영달)을 추구하려고 민족을 배반한 세력이 민주주의와 공익, 공공성의 가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국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이 된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옷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 아니라 옷을 뒤집어 입었던 것이다.

그 역설과 적반하장격의 배반은 김구 선생에 대해 “대한민국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게 옳지 않다”고 주장한 이인호 KBS 이사장을 통해 오늘까지 변함없이 지속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아직 ‘REPUBLIC’이라고 할 수 없다. RES PUBLICA 가 res privata에 의해 분탕질 되었는데, 그 위에 취약하기 그지없었던 공공성마저 압살하는 신자유주의까지 덮쳤으니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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