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아내라는 시청자, 그녀의 수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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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나 몰래 수신료를 내고 있었다. 금액은 무려 만원, 우리 회사가 받는 수신료의 4배다. 그녀는 매월 만원을 내고 CJ계열 케이블 채널들의 VOD를 무제한으로 보고 있었다. 서비스에 가입한 지 몇 달 된 것 같은데, 나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얼마 전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약간의 배신감에 휩싸였다. 그깟 돈 만원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다시보기 한편이 1000원, 1500원 하는 시대이니 10편만 봐도 본전은 충분히 뽑는다. 그녀가 고정적으로 보는 CJ 프로그램만 몇 개인가. 대충 계산해도 경제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덤으로 나도 요즘 뜨는 tvN 드라마<미생>의 VOD를 부담 없이 보고 있다. 그래도 마음이 영 불편하다.

3분기까지 회사의 누적 적자액이 몇백 억이라더라. 회사에 돈이 없으니 제작비를 깎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다수 노조가 경영합리화란 명분으로 회사와 직급 체계 개편에 합의했다더라 등등. 우리 회사에는 흉흉한 이야기들뿐이다. 소문에 MBC와 SBS도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지상파는 끝났다’는 입사 이래로 쭉 들어왔던 바로 그 말이 눈앞에서 이뤄지는 것 같아 두렵다. 아, 나는 정말 침몰하는 배에 탄 것인가?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고작 그딴 미디어 재벌(?)에 우리 수신료 4배를 내고 있는 아내가 야속하다.

▲ tvN <미생> ⓒtvN
사실 아내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 많다. 같은 그룹의 계열사가 만든 제품으로 도배된 프로그램, 너무 노골적이어서 광고인지 프로그램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의 간접광고(PPL), 재방 삼방 사방 등 콘텐츠 돌려막기, 같은 프로그램을 서너 개의 채널에서 동시에 방송하는 비상식적 편성. ‘아무리 사기업이지만 방송을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하는 꼰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감성은 꼰대적 이성과는 반대로 반응하고 있다. 그렇게 반공영적인 프로그램들이 재밌다. <미생>이 재밌고 tvN <삼시세끼>가 재밌다. 케이블 채널이라면 눈엣가시 같은 내가 이렇게 재밌는데, 아내는 얼마나 재밌겠냔 말이다!

음, 저희 KBS는 뉴스도 하고요, 재난 방송도 만들고요, 한 편에 몇억씩 들어가는 다큐멘터리도 제작하고요,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드라마랑 예능 프로그램도 있어요. 심지어 지상파 송출 시스템도 보수․관리해요. 이 모든 게 단돈 2500원이에요. 그러니깐 수신료 좀 내 주세요. 우리는 노상 이렇게 주장해왔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분명 우리를 떠나고 있다. 뉴스는 인터넷으로 보고요, 재난 방송은 뉴스 전문 채널이 더 빠르고요, 영국 BBC 다큐멘터리가 훨씬 재밌고요, 너님들 드라마랑 예능 프로그램은 좀 구리거든요. 심지어 지난 몇 년간은 꽤 편파적이셨잖아요. 그래도 뭐 수신료 2500원은 낼게요. 전기가 끊길 수도 있으니까요. 아내 또래의 시청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KBS 본사 ⓒKBS
사실 번듯한 공영방송은 한 나라의 중요한 인프라다. 독립적 공영방송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중요한 축이자, 콘텐츠 복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정치권력, 자본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이다. 뼈아프게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둘 다 실패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쯤은 우리가 지난 몇 년간 보여줬던 편파성에 분노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올드 타입 프로그램에 질려있다. 그래서 아내가 고작 그딴 미디어 재벌에 만원이나 되는 수신료를 내는 상황은, 우리가 자초한 일이다.

▲ 김범수 KBS PD
해법의 큰 그림은 모두가 알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이뤄 신뢰를 쌓고, 재밌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면 된다. 그럼 아내처럼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버는 사람들은 2500원이 아니라 그 서너 배쯤은 기꺼이 낼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그 큰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KBS 직원 대부분이 모르는 것 같다, 젠장! 내가 속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이 나라에 번듯한 공영방송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방법이 뭔지는 모르겠는 이 상황이 정말 답답하다. 그래서 아내가 미디어 재벌에 내는 수신료 만원이 야속하고, 속 쓰리고, 배 아프고, 열 받는다. 내가 생각해도 참 찌질하고도 찌질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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