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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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인 이유
[이채훈의 인문학 생중계] 베블렌의 ‘유한계급론’
  • 이채훈 한국PD교육원 전문위원(전 MBC PD)
  • 승인 2014.11.2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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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블렌 효과(Veblen Effect)는 누구나 다 알기 때문에 수능시험에 안 나온다. “소비재의 가격이 상승하는데도 오히려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이다. 가격이 높을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물건을 베블렌재(Veblen Goods)라 한다. 다이어먼드를 비롯, 이른바 명품이 베블렌재에 해당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명품 사랑은 유별나다. 2011년 한국-EU FTA 체결 이후 샤넬 제품은 가격을 25% 인상한 뒤 매출량이 54.8%나 늘었다고 한다.

▲ 소스타인 베블렌(1857~1929)과 그의 책 <유한계급론>
“명품이라서 비싼 게 아니라 비싸기 때문에 명품”이란 농담반 진담반의 우스개가 있다. 베블렌에 따르면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는 최소비용으로 최대효용을 얻는 게 아니라 최대한의 지출을 통해 부를 과시하는 게 목적이다. 아름답고 품질 좋은 보석이라도 값이 싸면 아무 쓸모가 없다. 품질과 무관하게 오로지 비싼 것만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값이 비쌀수록 수요도 늘어난다. 이게 ‘명품의 경제학’이다.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 1857~1929)은 누구일까? 그는 미국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12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 엉뚱한 상상과 풍자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코의 모양에 따라 인간을 분류하는 리포트를 썼고, 식인풍습을 옹호하거나 주정뱅이 입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장난이 아니라 순수히 과학적인 것이라고 둘러대곤 했다.

<유한계급론>에서 그는 19세기 미국 상류사회를 향해 싸늘한 냉소를 보내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이 개미를 관찰하듯 외계인의 눈으로 인간의 행태를 조목조목 관찰한 기록이다.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에서 이 책을 소개하며 “높은 수준의 지성을 가진 에일리언이 지구를 방문하여,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 양식과 사회 진화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고 했는데, 무척 적절한 비유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혁명’ 하면 마르크스를 떠올렸듯, 요즘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베블렌의 이름을 즐겨 인용한다. 이 때문에 ‘미국의 마르크스’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그는 혁명에 별 관심이 없었고 혁명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혁명 이론서로서 빛을 잃었지만 정치경제 분석의 틀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은 마르크스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마르크스가 간과했거나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인간성의 중요한 측면을 말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유한계층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이는 사회적 존경을 얻는 방편이 된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이를 유지하려면 부와 실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부와 실력은 반드시 입증되어야 한다. 증거가 있어야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시적 레저(conspicuous leisure)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는 돈을 낭비하는 것이다. 둘 다 부를 과시하는 게 목적일 뿐, 결국 똑같다.

생산적 노동을 면제받은 유한계급은 전쟁, 정치, 종교, 스포츠 등 비생산적인 일만 한다. 이들은 돈과 재산을 갖고 우스꽝스런 짓을 하는 인류학적 표본이다. 부유층의 이런 행태를 보며 분노할 필요는 없다. 야만인들이 축제를 하고 몸치장을 하는데 엄청난 낭비를 한다고 화를 내는 인류학자는 없기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요란스런 색깔로 온몸을 칠하는 것은 부유층의 여인들이 코르셋 같은 고통스런 옷으로 온몸을 졸라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베블렌에 따르면 인류 문명은 ‘사적 소유권에 기반한 야만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사유재산의 발생을 계기로 인류는 미개문화에서 야만문화로 넘어왔는데, 부의 원천은 전쟁과 사냥이었다. 초기 야만 문화에서 완력과 용맹성은 가장 큰 미덕이었다. 성공적인 침략 행위는 찬양받았고, 인간이든 맹수든 무서운 경쟁자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최고의 명예였다. 포로를 강제로 아내로 삼은 게 남성 중심 가족제도의 기원이었다. 모든 생산적인 노동은 여성과 노예의 몫이었다. 유한계급은 이러한 생산적 노동을 혐오하고 경멸한다. 가난한 사람들도 덩달아 자신의 직업을 천시한다. 이러한 직업적 차별은 우월과 열등이라는 인격적 차별의 벽으로 굳어졌다.

야만문화는 초기의 약탈 단계에서 준평화 단계로 이행했다. 성공의 지표가 약탈의 전리품에서 축적된 재산으로 바뀌었을 뿐, 문명 초기부터 금융자본주의 시대까지 인류의 야만상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착취(exploit)란 말은 고귀한 사람들의 공훈(exploit)과, 생산(industry)이란 말은 하층민들의 노고(industry)와 어원이 같다.

베블렌은 이러한 분석이 유한계급을 비난한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무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고 그냥 관찰하고 기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낭비(Waste)라는 말을 쓴 것은 이러한 현상을 서술하는 데 적합한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낭비라는 말은 기술적 전문용어일 뿐, 비난의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유한계급은 화려한 파티를 열어서 사람들을 과시적 소비에 동참시키고, 생산적 노동을 면제받는 사람들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들은 대학을 짓고 기부를 하며 예술가를 후원하고 스포츠를 진흥시키기도 한다. 베블렌은 이러한 활동마저 과시적 소비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이 말에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한국의 부자들은 이러한 우아하고 평화로운 과시적 소비를 잘 하지 않는다. 양극화가 심화돼서 전체 사회가 위기라는 경고가 거듭 나오지만 이들은 기부에 인색하다. 대학과 병원을 짓지만, 철저한 장삿속일 뿐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골목상권의 떡볶이까지 휩쓸고, 탈세와 담합과 편법증여 등 불법을 서슴지 않는다. 베블렌의 설명은 각박한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배부른’ 얘기처럼 들린다.

재벌 총수는 다른 재벌 총수를 제압하려는 욕망에 불탄다. 부를 축적하는 경쟁에서 남을 이기는 게 삶의 목표다. 나의 행복은 내가 소유한 부와 소비하는 재화의 절대량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많으냐 적으냐에 좌우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속물을 “자기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남과의 비교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는데, 부자들은 이러한 속물성의 화신인 셈이다.

베블렌에 따르면 부(富)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이 욕구는 평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자신과 대등하다고 인정되는 사람과 최소한 똑같은 양의 재화를 소유해야만 정신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축재를 하는 건 그 집단의 다른 성원보다 더 높은 지위에 서는 일이며,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이러한 비교에서 뒤쳐지면 사람들은 만성적인 불만 속에서 살게 된다. 부를 향한 투쟁은 결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재화를 획득해서 새로운 부의 기준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이 기준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다. 어떤 사람도 부에서 만족을 느끼는 경우는 없다.

마르크스는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성을 이야기했지만, 베블렌은 하층 계급 사람들이 자기 바로 위 계급을 선망한다고 지적했다. 부르주아 지배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성을 오염시키고 둔화시키므로 이를 걷어내면 혁명의 탄탄대로가 열릴 거라는 생각은 베블렌에 따르면 환상에 불과하다. 보수성은 유한계급의 특수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진보가 요구하는 인습적 사고와 행동양식의 재조정을 귀찮아하기 때문에 개혁을 회피한다.

“부유층이 아무 가치도 없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개혁에 반대한다는 말은 그들에 대한 모욕이다.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성가신 일이다. 이 문제에서 부유층과 보통 사람의 차이는, 변화를 재촉하는 경제적 환경에 얼마나 심하게 노출되었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부유층 사람들이 쉽게 혁신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할 절박한 경제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위해 투표를 하는가〉ⓒ갈라파고스
베블렌은 하층계급 사람들 중 양심의 가책이나 정직성을 내버린 사람이 성공하여 유한계급에 진입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덧붙였다. 저학력 · 저소득 · 고령층 유권자들이 유한계급의 속물주의와 물신숭배를 충실히 대변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를 쓴 토마스 프랭크는 캔자스에서 부자들의 정당인 공화당이 득세한 과정을 취재한 뒤 ‘민중의 착란현상을 조장하는 보수 우파의 교묘하고 은밀한 집권 전략’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러나 베블렌이 이 분석을 보았다면 충분치 않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생활방식과 결별하라는 말에 잘난 인물들이 반발하는 건 누구나 겪어서 알고 있다. 이혼의 간편화, 여성참정권 도입, 주류 제조와 판매 금지, 재산상속의 제한과 폐지 등 비교적 경미한 변화가 불러올 사회적 악영향을 심각하게 역설하는 걸 흔히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혁신은 모두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며, 윤리 도덕의 토대를 뒤집어엎고, 삶을 참을 수 없게 만들며,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변화에 필요한 재적응 과정이 성가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잘 변하지 않는다. 자기 기억을 모두 합한 게 개인의 의식이다. 자기 정체성의 기반에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이는 새로운 자기 정체성이 된다. 습관적 사고, 이미 형성된 주관과 태도는 환경이 변화를 강요하지 않는 한 무한정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보주주의가 명예로운 태도로 간주되는 경향마저 있다.

“보수주의는 사회의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영예로운 장식적 가치를 얻는다. 이게 더 심화되면 우리 관념 속에서 보수적 견해를 고수하는 것은 당연히 존경받을 대상으로 평가된다. 보수주의는 상층 계급의 특징이기 때문에 품위가 있는 반면, 혁신은 하층계급의 현상이기 때문에 저속하다고 간주된다.”

마르크스와 베블렌 사이 어딘가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있다. ‘이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을 얘기한 그는 옥중수고에서 “하루하루가 혁명이어야 한다”고 썼다. 당위의 차원에서 그람시는 옳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매일 혁명을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무릇 혁명이란 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타락하고 시들어갈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에서 베블렌에 대해 설명하며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평균적 지성과 성찰 능력도 더 높이 발전하며, 제도의 진화 역시 그만큼 빠르고 수월해진다”고 썼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베블렌의 삶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베블렌은 1929년 한 사람의 환송객도 없이 캘리포니아의 외딴 오두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시민은 너무나 외롭게 살다 간 베블렌이 안쓰럽다고 했다. 하지만, 안쓰러운 게 베블렌 뿐일까? 그가 <유한계급론>에서 묘사한 우울한 현실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멸시한다.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은 ‘노숙자 같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버트란드 러셀은 말했다. “거지들은 자기보다 많은 수입을 올린 다른 거지를 시기할망정, 백만장자를 시기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염려하는 기사가 오늘도 눈에 띄지만,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 글쓴이 이채훈 PD는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방송대상, 통일언론상을 수상했다. 한국PD교육원 전문위원으로 일하며 인문학과 클래식으로 이 시대 PD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PD로서 공부하자! 시청자 눈높이에서 질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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