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의 실종’ 사회의 ‘정의 과잉’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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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정의를 찾고 있다. 유부남 이병헌의 작업이 나쁜지 아니면 젊은 여성들의 이병헌 협박이 나쁜지, 클라라 소속사 대표가 성희롱을 했는지 아니면 클라라가 소속사와 결별하기 위해 이를 무리하게 이용했는지, 송일국 매니저가 어머니 김을동 씨의 보좌진으로 월급을 받았는지 아니면 판사인 송일국 부인의 해명이 맞는지 열심히 토론 중이다.

연예인들만 정의의 대중법정에 선 것이 아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대한 여론 공세는 어린이집 폭력교사로 대상을 옮겨 열심히 욕을 쏟아붓고 있다. 제자를 성추행한 명문대 교수와 의붓딸을 살해한 잔인한 의붓아빠를 향해 정의의 집행자가 되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예전에도 비슷한 양상이 있었지만 요즘 특히 거세다.

이런 우리 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의 실종 사회의 정의 과잉 국민’이 아닌가 싶다. 공적 영역에서 무너진 정의를 사적 영역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땅콩회항’의 조현아 전 부사장이든 인천 어린이집의 폭력교사든 분명 욕을 먹을 만한 사람이다. 나도 이들을 욕했다. 그런데 뭔가 개운치가 않다. 누군가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다.

▲ '땅콩회항'으로 물의를 빚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 들어서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에 사이버 여론 조작을 지시해 대선에 개입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항소심 결심공판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뉴스1
잠시 시간을 되돌려보자. 이명박 정권 때 있었던 일이다. MBC <나는 가수다>에서 탈락한 가수 김건모에 대해 예외적으로 재공연 기회를 주자 온 국민이 나서서 그를 두둔한 연예인과 제작진을 비난했던 적이 있다. 사회의 모든 정의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나는 가수다>에서만이라도 정의를 구현하고 싶었던 국민이 예능프로그램을 과하게 힐난한 것이었다.

지금도 비슷하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굵직굵직한 ‘정의 상실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은 유야무야 됐고, 검찰의 간첩조작 사건 증거조작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고, 이른바‘문고리 3인방’의 전횡에 대한 조사도 흐지부지 됐다. 큰 정의 앞에 언론은 무력했고, 무력한 언론 탓에 여론도 환기되지 못했다.

분노역학 제1법칙, ‘분노 보존의 법칙'이라고 해야할까. 사회적 분노의 총량은 일정한데 표출될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하니 만만한 대상을 찾아 발산한다. 그런데 이 분노에너지의 발산이 마녀사냥에 머물고 있다. 분노가 에너지가 되려면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 한다. 분노를 그냥 태워버리기만 하면 교훈이 없다. 늘 반복될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데 고민은 없고 분노만 있다.

 그렇게 큰 정의를 상실한 국민들이 작은 정의에 집착한다. 시사 이슈를 정통 시사프로그램이 아닌 tvN<쿨까당>  JTBC <썰전>  TV조선 <강적들>과 같은 예능의 외피를 입은 준시사프로그램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정의구현’은 드라마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정경유착과 정언유착, 검찰개혁과 언론개혁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기본 갈등 구도로 활용하는 드라마가 많다.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은 시청자들의 욕구를 만족 시키려는 것이다.

대중문화에 정의가 만개하고 분노가 ‘가속도의 법칙’을 보일 때 뒤에서 기분 나쁘게 미소 짓는 사람들이 느껴진다. 그들이 주판알을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너희들이 원하는 정의, 실컷 노래해라. 그리고 나는 잊어라’ 그렇게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 정의 과잉인 국민은 오늘도 분노의 키보드를 두드린다.

▲ 고재열 시사IN 문화팀장.
지금은 분노를 응시해야 할 때다. 야당이 집권세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다고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집권세력의 부패와 전횡을 응시하고, 언론이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에게는 할 말을 못하고 말초적 관심만 충족시킨다고 비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언론이 권력과 금력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주목해야 할 때다. 분노의 안개를 걷어내고 불편한 진실을 응시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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