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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의 방송史 , 공정방송 파수꾼으로

PD저널 종이신문 종간, 그리고 27년의 역사 박수선 기자l승인2015.01.20 21: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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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이 27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2015년 1월 21일자를 마지막으로 종이신문 발행을 중단하고 인터넷 신문으로의 도약을 모색한다. <PD저널> 27년의 역사는 한국 방송의 성쇠와 궤를 같이했다. 1988년 프로듀서연합회가 회보 성격으로 발행한 <프로듀서> 창간호부터 종간호가 된 <PD저널> 879호까지 <PD저널>은 방송 자유를 외치는 PD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변자로, 무거운 공적 책임이 부여된 방송의 감시자로 역할을 해왔다.

타블로이드판 8면으로 발행된 <프로듀서> 창간호(1988년 1월 25일자)엔 민주화 물결로 태동한 프로듀서연합회의 정신과 회보의 방향이 담겨있다. 이형모 1대 한국PD연합회장은 창간사에서 “이 땅을 밝히는 다시 태어나는 한 해를 창조하자”며 “이 회보는 우리의 빛을 농축시켜 표현하는 입이 되고 귀가 되고 눈이 되고 얼굴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 〈PD저널〉의 전신이 프로듀서 창간호  
▲ 〈PD저널〉의 전신인 프로듀서 창간호
■ 방송민주화의 시작
= 험난한 방송민주화 운동이 전개되던 때였다. 1990년대 초 KBS와 MBC에 노조가 결성됐지만, 곧바로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과 장기 파업이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 1990년 KBS PD협회와 비상대책위원회는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서기원 사장이 임명되자 출근저지, 제작 거부로 강경하게 맞섰다. 당시 <프로듀서>는 7월 1일자에 KBS 사태에 대해 “정권의 대변자들을 공영방송의 사장에 앉혀온 권력의 언론장악 전략에 처절하도록 저항하는 KBS 사원들의 몸부림”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PD저널>이 처음으로 호외를 낸 것은 ‘MBC 노조 파업 특보’였다. 1992년 10월 발행한 ‘MBC 노조 파업 특보’ 1면에는 ‘프로듀서의 꿈, 프로듀서의 구속’ 큐칼럼과 경찰 병력이 MBC 사옥을 지키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또 4면에는 당시 파업에 참여했다가 구속된 최상일· 정찬형 ·이채훈 PD의 약력도 게재했다.

■방송사에 분 ‘역사 바로 잡기’= 1995년도 큰 변화를 맞았던 시기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에서 신문 대판으로, 제호는 <프로듀서>에서 <프로듀서연합회보>로 바뀌었다. 당시 <프로듀서연합회보> 발행인이었던 김승수 8대 PD연합회장은 “PD의 위상을 강화하고 역량을 확대하기 위해 동호회 성격이 강한 소식지에서 사회적으로 파급력이 큰 신문으로 바꾸기로 했다”며 “광고 수익을 통해 <프로듀서연합회보>의 경제적인 자립을 꾀하려고 한 목적도 있었다”고 했다.

1995년은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진입하는 문턱이었다. 케이블 방송 시대가 개막했고, 이어서 4개 지역민영방송사가 방송을 시작했다.

사회적으론 전직 대통령 비자금 파문과 5‧18 특별법 제정으로 방송계에도 ‘역사 바로잡기’ 움직임이 활발했다. <프로듀서연합회보>(1995년 12월 27일자)는 1982년 전두환 전 대통령 미화를 위해 모인 방송 관계자 회의 결과를 입수, 보도해 반향을 일으켰다. <프로듀서연합회보>가 공개한 이른바 ‘땡전뉴스’의 실상을 담은 ‘대통령 각하 내외분 텔레비전 영상보도에 관한 합평회 결과 보도’ 문건에는 대통령을 부각하는 카메라 각도와 조명 밝기 등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 PD 사회 자정 유도 = 연출 조작, 표절 논란 등 PD 사회의 내부 문제를 끄집어 내 자정을 유도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후반 촉발된 연예계 비리 사건은 방송 제작 환경 쇄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1995년 2월 17일 나온 호외는 PD들이 연루된 연예계 비리 사건에 대한 PD연합회의 입장이 담겼다. 호외 1면에는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한 대장정이 시작됐다’는 제목으로 PD연합회 제작환경 쇄신위원회 구성과 신고전화 개설, 윤리 강령 제정 착수 등의 소식을 전했다.

1998년 7월 2일자 <프로듀서연합회보>는 ‘자연 다큐 제작 관행 반성 목소리 높아’를 머리기사로 올렸다. KBS 자연다큐멘터리 <수달> 조작 연출 파문이 일면서 자연다큐멘터리 제작관행을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1990년대 일본 프로그램 표절 논란도 적극적으로 다뤘던 사안이다. PD연합회는 1999년 윤리강령을 개정해 ‘프로그램 제작과 관련한 일체의 향응 금지’, ‘타국 타인 프로그램 표절 모방 금지’, ‘자연다큐멘터리 인위적 조작 금지’ 등의 내용을 개정, 신설했다.

1999년 제호가 <PD연합회보>로 바뀐 데도 이유가 있다. 당시 프로듀서와 디렉터의 역할을 구분하자는 의미에서 프로듀서에 디렉터의 의미를 더해 <PD연합회보>로 제호를 정했다. 이듬해 MBC 드라마국은 전문 프로듀서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디렉터(연출자)와 CP(기획자), 국장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프로듀서(기획자), 디렉터(연출자) 제작 중심의 전문 프로듀서제로 바꾸겠다는 의도였다.

  ▲ 〈PD저널〉 신문들.  
▲ 〈PD저널〉 신문들.
■ 언론 개혁 운동 앞장
=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언론 폐해’를 지적하면서 강조한 언론 개혁이 2001년 최대 화두로 급부상했다. MBC는 <100분 토론>과 <PD수첩>에서 신문 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하지만 <조선일보> <중앙일보>는 지면을 통해 언론 개혁을 표방한 정권과의 교감에서 나온 것이라는 음모론으로 맞받았다. <PD연합회보>(2001년 2월 16일자)는 ‘조중동, 언론개혁 찬물 끼얹기 앞장’을 1면 머리기사로 올린 데 이어 5면에 ‘언론 개혁 긴급 좌담’을 통해 방송과 신문 상호 비판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당시 국세청이 언론사 23곳을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벌인 결과 전체 언론사의 탈루 소득은 1조 3494억원에 달했고, 탈루세액은 5056억원으로 추정됐다. 세무조사 성격을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언론현업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신문개혁운동에 들어갔고, ‘안티 조선 운동’도 이어졌다.

<PD연합회보>도 여기에 발맞춰 “급속하게 변하는 방송환경에 대처하고 잘못된 방송정책이나 사회 이슈를 심층적으로 보도하겠다”며 발행주기를 주간으로 전환했다.

2003년 정연주 사장이 취임한 KBS에선 개혁과 혁신의 물꼬가 터졌다. 시민참여 프로그램이 신설되고 노조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제정한 편성규약 개정 움직임이 일었다. 한나라당과 보수신문의 ‘KBS 흔들기’도 끊이지 않았다. <인물 현대사>에 색깔론을 제기하는가 하면 국회에선 한나라당이 주도해 KBS 결산안이 부결되는 일도 있었다. 한나라당의 방송 흔들기는 ‘방송 때문에 대선에서 졌다’는 패인 분석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많았다.

■ ‘강동순 녹취록’과 방송 장악의 서막 = 2007년 <PD저널>이 단독 보도한 ‘강동순 녹취록 파문’은 이같은 심증에 무게를 실었다. 강동순 방송위원이 대선을 1년여 앞두고 우익단체에 KBS, MBC 프로그램을 문제 삼을 것을 요청하고, ‘한나라당의 집권 모의’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PD저널> 기자로 ‘녹취록 파문’을 취재했던 김광선 PD연합회 정책국장은 “강동순 방송위원이 KBS 감사로 있었을 때부터 정연주 사장을 축출하려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녹취록을 통해 구체적인 정황이 확인된 것”이라며 “이후 국정감사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면서 보도의 반향이 컸고, <PD저널>이 방송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받았다”고 말했다.

한쪽에선 방통융합 시대에 맞는 방송 정책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연합회는 공공서비스 포럼을 열고 방통융합 시대에 맞는 규제 체계 정립 등에 머리를 맞댔다.

<PD연합회보>에서 <PD저널>로 제호가 바뀐 게 이때다. 2007년 1월 제호 변경과 함께 지면을 12면으로 늘리고 방송계 이슈와 함께 방송 프로그램 비평도 강화했다. 2007년 PD연합회장을 지낸 김환균 MBC PD는 “이전까지는 프로듀서연합회 기관지의 성격이 제호에 분명히 드러났지만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이었고, 미디어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응 할 필요가 있었다”며 “온라인도 뉴스 중심으로 강화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PD저널〉 2015년 1월 21일자 종간호 1면.  
▲ 〈PD저널〉 2015년 1월 21일자 종간호 1면.
■ 불공정방송 감시견 역할 강화
=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방송계의 기류는 이전과 180도 달라졌다.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와 여기에 맞선 언론인들의 저항이 두드러졌다. 

이명박 정권의 최고 실세로 꼽혔던 ‘방통대군’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임명이 그 시작이었다. <PD저널>은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정연주 사퇴 외압설’(2008년 4월 8일자)에서 최시중 위원장이 취임 한 달만에 김금수 KBS 이사장과 회동한 배경을 두고 ‘정연주 사퇴 외압설’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사퇴 외압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KBS 이사회는 2008년 8월 8일 감사원의 정연주 사장 해임 요청을 받고 해임 건의안을 의결했다. <PD저널>은 하루 앞서 특보를 내고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며 감사원의 KBS 특감 문제점, KBS 이사회 구성 문제 등을 다뤘다.

 같은해 ‘낙하산 사장에 반대한 YTN 기자들이 해직됐고, 이듬해 미국 소고기 광우병을 다룬 <PD수첩> 제작진이 체포되기도 했다. 방송 장악 시도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2009년 ‘미디어법 날치기’로 신문·방송겸영이 허용되면서 2012년 종합편성채널 4곳이 개국했다. 편파·저질 방송이라는 여론이 높았지만 방통위는 종편에 온갖 특혜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지난해 재허가까지 해줬다.

“방송 장악은 의도도 없고 법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는 대통령이 취임 3년째 맞는 오늘날까지 언론 장악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PD저널>(2015년 1월 14일자)은 3면 MBC 노조 파업 손해배상 소송 2심 공판 현장 기사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한학수 PD의 증언을 실었다.
 


박수선 기자  susun@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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