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의 가치를 혁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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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의 가치를 혁신하라
[김유열 PD의 EBS 다큐멘터리 비사] ④
  • 김유열 EBS PD
  • 승인 2015.01.27 14: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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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 프라임>을 주 3회 정규 편성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제작비였다. 돈 없이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만들 비결이 뭔가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집중한 질문이 있었다. “콘텐츠는 소비재인가? 아니면 내구재인가?” “TV 수상기는 내구재인가?” “YES”, “<1박 2일>은 내구재인가?”, “갸우뚱!”, “영화 <벤허>와 <로마의 휴일>은 소비재인가?”, “갸우뚱”, “<톰과 제리>는 소비재인가?”, “역시 갸우뚱”
웬 생뚱맞은 질문인가 의아해 할 것이다.

문화 콘텐츠를 내구재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구재(Durable Goods)의 사전적 정의를 보자. 자동차나 냉장고 같이 사용 기간이 1년 이상으로 긴 재화로 사용기간에 따라 가치가 감가상각 된다. 냉장고의 가치를 100으로 보고 사용기간(내구기간)을 10년으로 보면 매년 10씩 가치가 상각된다. 따라서 초기에 100원을 주고 사도 매년 10원씩 비용이 처리된다.

보통 문화 콘텐츠를 두고 내구재니 소비재니 하는 발상을 하지 않는다. 통상 감가상각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회계적으로는 소비재로 인정하고 처리하는듯하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소비재인가? 아니면 내구재인가? 오래 생각해왔다. 결론은 단순하다. 소비재처럼 만들면 소비재, 내구재처럼 만들면 내구재다. <벤허>, <로마의 휴일>, <톰과 제리>, <뽀로로> 등과 같은 것은 내구재라고 조작적으로 정의했다. 나만의 정의다. 뉴스, <1박 2일>, <추적 60분> 등등은 그러면? 소비재라고 정의했다. 내구연한이 길면 내구재, 짧으면 소비재라고 정의한 것이다.

▲ 만화 ‘톰과 제리’
EBS의 <다큐 프라임> 기본 콘셉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구재형 콘텐츠, 내구재형 다큐멘터리를 만들자. 벤츠를 만들 듯이 견고하게 만들자. 60년도 탈 수 있단다. <톰과 제리>는 1948년에 처음 만들어졌으니 지금도 유용하다면 환갑을 넘긴 셈이다. 지금은 6학년이 돼 버린 아들이 언젠가 <톰과 제리>를 보면서 포복절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조용하고 온순한 편인 아들이 이렇게 침대에서 뒹굴면서 웃는 것을 생전 처음 보았다. 나도 멍하니 한참을 <톰과 제리>와 <아들>을 보았다. 참 수명이 길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도 1953년에 상영되었으니 환갑을 넘겼다. 환갑을 넘겨도 청춘인 이런 콘텐츠를 어떻게 봐야하는가? EBS에서는 지난 10년 간 <로마의 휴일>을 여러 번 방송했다. 올해도 방송했다. 신기한 일은 시청률이 오히려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쓰고 또 써도 줄지 않는 화수분 같은 콘텐츠는 없을까? EBS <다큐 프라임>의 출발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EBS는 절대적으로 재원이 부족한 방송사이다. 전체 예산의 75%를 주식회사처럼 벌어 쓰고 25%만 공적 재원으로 충당된다. 그것도 수신료, 방송발전기금, 교육부 특별 교부금 모두 합쳐 25%다. 수신료는 월 2500원 중 단 70원만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EBS가 수신료 등 공적 재원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믿는다.

<다큐 프라임>은 공사화 된 이후 EBS 역사에서 가장 제작 예산이 적을 떼 기획, 제작되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이듯이 가난이 창의의 어머니쯤 되었나 싶다. 궁즉통(窮則通)이랄까? 적은 재원으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는 없을까? 이런 필요와 소망 끝에 내구재형 콘텐츠라는 다소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이르렀다. 이것이 <다큐 프라임>의 발상이었다.

반복해서 오래 사용해도 가치가 크게 줄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자. 이런 구체적인 발상을 하고 있을 때 한 권의 책을 만났다. 2005년 김위찬 교수의 ‘블루오션 전략’이다. 사람들은 대개 블루오션 전략하면 오해 하는 것이 있다. 누구도 진입하지 않은 새로운 시장을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한다. 최초 시장 진입자를 생각한다. 기존 시장에서 남의 몫을 빼앗아 오는 것이 아니다. 없던 수요를 창출한다. 그리고 가치는 높이고 비용은 동시에 줄여야한다. 차별화와 저비용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것이 대전제다. 차별화와 저비용을 달성할 수 있도록 기업의 문화와 조직 모두를 재배열해야한다.

김 교수는 ‘블루오션 전략’의 성공 사례로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를 예로 들고 있다. 1년에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 원래 전통 서커스였다. 동물들의 묘기와 곡예사의 스릴 넘치는 연기로 구성 돼 있다. ‘태양의 서커스’ 창시자 기 랄리베르테는 동물의 묘기를 제거했다. 동물의 곡예쇼는 서커스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하는 요소다. 동물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리고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연극을 서커스에 접목했다. 스토리와 환상적인 주제곡을 추가했다. 원가는 획기적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입장권료는 뮤지컬이나 연극 수준에 맞췄다. 서커스 입장료 보다 몇 배 높았으나 뮤지컬 수준에 맞췄기 때문에 가격저항이 없었다. 전통 서커스 업계와 경쟁하지 않았다. 그래서 블루오션이다. 서커스 가치와는 전혀 다른 가치가 발생한 것이다. 블루오션 전략을 가치혁신전략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이다.

▲ ‘블루오션 전략’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는 사양 산업인 서커스를 새롭게 탈바꿈해 연매출 1조원대로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주한캐나다대사관 블로그
돈 없는 방송사로서 비용을 줄이고 가치를 높인다는 블루오션의 대전제가 확 땡겼다. 이미 2001년 편성부장 시절 이런 ‘태양의 서커스’ 실연 중계 영상을 수입하여 방송하였기에 김교수의 책은 내게 크나 큰 유혹이었다. ‘가치혁신’은 내게 늘 따라 붙는 화두였다. 행복하게도 올해 라스베가스에서 상설 공연되는 ‘태양의 서커스’ 2편이나 보고 왔다. ‘르네브 쇼’와 ‘카쇼’, 2001년 EBS TV에서의 감동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인류 최대의 감동 쇼였다. EBS 다큐가 가치혁신하게 된 원동력과 계기가 된 ‘태양의 서커스’를 목도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책 ‘블루오션 전략’을 읽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얻어낸 결론, 그것은 편당 제작비를 3배로 획기적으로 올리고 콘텐츠를 3회 더 사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6000만원이면 2000만원 짜리 세 편을 만들 수도 있지만 6000만원 짜리 1편을 만들어 세 번 사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다큐 프라임>의 고급화 전략은 이런 아이디어로 시작되었다. 문화 콘텐츠는 다른 상품과는 다르다. 평범한 작품 여러 개를 만들어 방송한다고 해서 산술 비례하여 고객의 사용가치가 상승하지는 않는다. 문화 콘텐츠는 존재감이 생명이다. 때로는 제작비와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저예산 영화의 대박이 이래서 나온다.

그래서 <다큐 프라임>의 초기 정신을 ‘아카데미즘’으로 설정했다.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 정신을 다큐의 근간으로 삼는다면 2~3회 반복 사용할 수 있다. 진실과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니깐. 콘텐츠는 더 이상 소비재가 아니다. 내구재로서 사용기간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초기 투자비용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반복 사용하는 것이다.

▲ 김유열 EBS PD
<다큐 프라임>의 시청률은 지속 상승하고 있고 3~4회 반복 사용한 프로그램도 사용할수록 시청률이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전통 서커스가 가치 혁신을 이뤄 ‘태양의 서커스’가 된 것이고 아무리 오래 상연되어도 관람객은 줄지 않는다. 전통 프로그램이 가치혁신에 성공하여 <다큐 프라임>이 된 것이다. <다큐 프라임>도 가치 혁신의 성공사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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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새나 2015-02-05 21:04:47
내구재형 콘텐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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