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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칼폴라니 연구소 창립 추진위원

유선방송은 때로 두달쯤되는 편성 분량의 드라마를 한꺼번에 연이어 내보내는데 그 탓에 드라마광은 중간 중간 20분에 이르는 광고까지 섭렵하게 됐다. 제2금융권의 대출 광고와 주로 노년을 대상으로하는 보험 광고가 압도적으로 많다. 말하자면 둘 다 금융권 광고인데 과연 금융감독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이 이런 광고가 소비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장차 거시경제를 위협하는 것은 아닌지 소비자 보호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꼬집어서 뭐가 문제인지 말할 실력이 나에겐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경제학 공부를 한지 30년이 넘었지만 나는, 예컨대 왜 이자를 주고 받는지, 과연 그게 옳은 일인지, 나아가서 어떤 수준이 적정한 건지 실마리조차 잡지 못 하고 있다. 교과서 수준이라면 이자율 역시 다른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대부시장의 수요공급이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과 고학년이거나 대학원생이라면 금융시장은 정보의 비대칭성이 두드러지는 시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해서 소주처럼 어떤 사람에게나 똑같은 값을 받는 게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른 가격(이자율이나 대출 조건)을 매길 수 있다는 것이다.

▲ ‘러시앤캐시’ 광고 ⓒ화면캡처
그 결과가 이제 귀에 익숙한 음악이나 캐릭터와 함께 유선방송을 가득 메우는 대부업 광고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휴대전화 한통만 하면 몇 백만원을 빌려 주겠다고 유혹한다. 물론 은행권 금리를 웃도는 이자를 받는다. 재산이 없고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일수록, 예컨대 당장 아이의 수술비를 낼 수 없는 사람에게 가장 높은 이자를 매긴다.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이야말로 경제학의 ‘효율성’ 정의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간명한 논리에 따르면, 지금 광고를 내보내는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에서 얻은 빚까지 갚지 못한 가난한 이가 급기야 사채업자에게 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리고, 극단적으로 신장이나 간을 적출 당한다 해도 그 역시 ‘효율적’이다.

아무리 모든 실패가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는 시장만능의 사회에서 산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주장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남의 곤경을 이용해서 떼돈을 벌려는 시도를 효율적이라고, 나아가서 정의롭다고 상찬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모든 종교는 고리대를 문제삼았고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약탈적 대출’이라면 사형감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그럼 가난한 사람에게 누가 돈을 빌려 주느냐고.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걸 의무로 삼았고(흔히 천국이나 극락에 못 갈 거라고 위협했고) 많은 경우 종교조직과 공동체는 무이자 대출 등의 빈자 보호 제도를 운영했다. 물론 현대에는 국가가 그 일을 맡는 것이 보통이다. 복지가 바로 그것이다.

채무자들이여, 단결하라

전 세계적으로 최초의 빚은 대부분 의교주(醫敎住)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보면 현재의 가계부채는 국가나 사회가 해야 할 일을 금융이 대신 할 수 있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현재의 장기침체는 과다 부채로 인한 총수요 부족 때문이니, 채무자와 금융기관, 정부가 각각 어떤 부담을 질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경제회복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하기야 지금도 “빚내서 집사라”고 부추기는 박근혜 정부가 이런 사회적 합의에 앞장설 리 없다.

▲ 정태인 칼폴라니연구소 창립 추진위원
무엇보다도 먼저 채무자들이 단결해야 한다. 만일 이들이 일제히 채무 변제를 거부한다면 한국경제는 바로 금융위기로 빠져 들 수도 있다. 그래야 비로소 가계 부채의 문제를 그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게 될 것이다. 언론 역시 현재의 가계부채 문제를 효율성의 관점에서, 즉 금융기관의 입장에서만 바라 봐선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말, EBS가 방영한 <다큐프라임 2부작- 삶과 죽음의 그래프>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프로그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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