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지역 겁나죠…아무도 안 가려 하니 저라도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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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영미 국제분쟁전문 PD

▲ 2006년 아프가니스탄 취재 모습. ⓒ김영미
최근 IS가 언론인 인질을 무참히 참수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누구보다도 괴로웠을 사람이 있다. 국제 분쟁 이슈에 관해서 만큼은 국내에서 가장 바쁜 취재자이자 취재원, 국제 뉴스에 단골손님처럼 인용되는 사람, 언론사의 가장 중요한 취재원 중 하나. 국제분쟁 이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보았을 이름, 국제분쟁전문 언론인으로 알려진 김영미 PD다.

그녀는 작년 11월에도 터키-시리아 국경에 다녀왔다. 시드니 카페 인질극부터 샤를리 에브도, 김 군, IS 인질 참수까지···. 잇따라 터진 사건들에 김 PD는 취재하랴, 언론사의 취재요청에 응하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제임스 폴리, 고토 겐지 등 자신과 같은 분쟁지역 언론인들이 참수되는 것을 보며 받은 심한 충격들을 미처 달랠 새도 없었다.
 
그녀가 ‘분쟁전문 PD’로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든 작품이 KBS <일요스페셜>에서 ‘탈레반 붕괴 100일, 부르카를 벗는 아프간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분쟁전문 PD라는 이름을 달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분쟁전문 PD? 나는 새가슴 김 PD”

“저는 그냥 난민촌 여성들의 심정과 관점에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죠. 전쟁의 참상을 유혈이 낭자한 화면 대신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보려 했어요.”
 
그녀가 처음부터 ‘분쟁전문 PD’라는 험한 길을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PD가 된 것부터가 우연이었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녀는 서른 살,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카메라를 들고 동티모르로 떠났다. 그전까지는 영상을 만들어본 적도, 방송국과 인연이 닿은 적도 없었던 사람이다. 사진을 전공했기에 막연히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할 생각이었지만 조그마한 캠코더로 깨작깨작 찍었던 영상이 SBS에 방영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PD의 길을 걷게 됐다.
 
그녀는 난민촌에서 몇 주간 상주하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친구가 됐고, 그들의 일상을 바로 옆에서 담았고,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서른부터 마흔까지 10여 년 동안 일 년의 4분의 3은 분쟁지역에 나가 있었고, 어느 순간, 그녀는 자연스럽게 분쟁전문 PD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포탄이 쏟아지는,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분쟁 지역을 뛰어다니는 PD. 강인하고 거친 모습을 떠올리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별명이 ‘새가슴 김 PD’라고 고백했다.
 
“얼마나 겁이 많은지, 한 번은 함께 취재를 간 사진기자 후배가 “여차하면 실체를 확 폭로해버린다”며 놀리기도 했어요. 사실 현지에서 총소리만 나도 겁이 나요.”

슬픔을 미루는 연습

▲ 2005년 쿠르드 민병대를 취재하는 모습. ⓒ김영미
이런 그녀가 가장 처참한 곳의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사람이 됐으니, 그 무게를 감당하기 힘겹지 않았을까. 그녀는 생명을 건 아슬아슬한 순간들,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힘겨운 사건들을 숱하게 겪었고, 정든 취재원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늘 취재원과 마음을 주고받으려 노력한다”는 그녀는 마음을 나눈 만큼 더 아파야 했다. 그들이 상처를 받을 때마다, 그녀 역시 그만큼의 상처를 받았다.
 
“난민촌에 있을 때 수시로 아이들이 죽어 나갔어요. 한번은 지뢰에 터져 죽은 아이의 집을 방문했는데, 아이가 해 놓은 마지막 땔감을 보면서 아이 엄마가 아까워서 저 땔감을 도저히 땔 수가 없다고, 우리 아들이 마지막으로 해 놓고 간 나무라고, 그 먼지 구덩이 속에 앉아 울더라구요. 그 엄마의 얼굴이며, 무덤이 계속 늘어나던 마을의 모습이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여리고 겁 많은 그녀가 굳건하게 취재를 이어나간 데에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정신과 치료, 심리 치료를 열심히 받는 한편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부단한 연습을 했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슬픈 상황이 왔을 때도 예전보다는 감정조절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그녀는 “슬퍼하는 것조차 작업을 끝낸 이후로 미루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분쟁전문 PD’보다는 ‘휴먼 다큐멘터리 PD’라고 여긴다. “대신 가 줄 사람만 있다면 그만하고 싶다”는 그녀. 김 PD는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종목은 사실 휴먼 다큐멘터리”라며 “분쟁지역은 그다음”이라고 말했다.
 
듣다 보니 참 이상했다. 사건이 터지면 그녀에게 빗발치듯 연락하는 그 수많은 언론사는 왜 직접 취재를 가지 않는 걸까. 김 PD가 없으면 대체 어떻게들 기사를 쓰나. “그만하고 싶다”는 그녀가 아직도 분쟁지역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도 안 하니까요. 제가 안 하면 마지막 끈마저 사라지는 거니까, 끈이라도 연결해놔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속하는 거죠. 분쟁지역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국제이슈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언론은 그런 걸 일일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AP 같은 메이저 통신사 몇 개에 의존해서 보도를 하고 있죠.”

경제논리 앞 희생된 언론의 의무, 그리고 지금의 현실 

▲ 2007년 레바논에서 종군 르포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김영미 PD. ⓒ김영미
한국에는 분쟁이슈, 국제이슈에 대한 취재 인프라나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하다. 외신받아쓰기, 혹은 김 PD 같은 소수의 취재원에게 의존하는 보도 행태는 그로 인한 당연한 결과다. 김 PD는 이러한 언론 환경에 대해 예전에도 수차례 언론을 통해 비판한 바 있었다. “직접 취재하고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고 “나라 밖 일을 외신이 아닌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외신에 의존하다 보면 우리의 시각은 결여된 채 그들의 시각에 휘둘리게 될 수밖에 없다.
 
무슬림에 대한 시각은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무슬림을 접할 일조차 거의 없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무슬림=테러집단’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은 서방 언론의 영향이 크다고 김 PD는 보고 있다. 언론이 ‘외신 베껴 쓰기’를 하는 사이 외부에서 들어온 시각이 우리의 것인 양 굳어졌다는 것이다. ‘시각의 종속화’는 한국에 취재 인프라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힘 있고 돈 있는’ 언론사들이 직접 취재를 가지 않는 것은 분쟁지역을 누빌 전문 인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녀가 분쟁지역에 계속 가는 이유는 ‘언론사들이 외면한다면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사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PD인 그녀에게 그 많은 언론사가 취재를 의존하는 현실을 과연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나 같은 프리랜서와 메이저 언론사, 어느 쪽이 더 투자할 여건이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녀는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IS 관련 취재를 했고, 언론사들은 그녀가 취재한 내용을 전화 한 통으로 쉽게 얻었다. 그녀가 취재를 위해 투자한 시간과 돈은 어디서도 돌려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걸 다 알면서도 그 길을 택했다. 언론인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그녀의 고백은 굉장히 아프다. 단순히 ‘분쟁지역을 누비는 멋진 언론인’으로 그녀를 묘사하기에 앞서, 한국 언론의 현주소와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론사들이 돈이 되고 안 되고를 따지기 전에 언론의 의무를 먼저 따진다면 취재 인프라를 구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모든 언론사가 경제논리로 움직이고 판단하기 때문에 국제이슈 보도에 지금 같은 상황이 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녀는 요즘 자신의 뒤를 잇는 후배들이 나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그녀 나이 마흔여섯이지만, 아직 뒤를 이을 후배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처럼 스스로 발 벗고 나서서, 개인 사비로 고군분투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취재를 할 사람이 현실적으로 누가 있을까. 그래서 김 PD는 “미래를 위해, 언론사에서 집중적으로 인프라를 키워 전문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가 천년만년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현장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제가 은퇴할 시기가 됐을 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때, 그때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까봐 불안하고 걱정돼요.”

“‘기레기’의 시대도 발전의 과정…기꺼이 기레기 소리를 들어주마”

▲ 팔레스타인 여성과 김영미 PD. 2010년 사진. ⓒ김영미
역설적으로, 그래서 그녀는 “힘들어도 버티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끝까지 현장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싶다는 누군가가 또 생기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건재한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도 그녀가 짊어져야 할 또 하나의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다. 그렇게 많은 짐을 지도록 만든 한국 언론에 회의감을 느낄 법도 한데, 뜻밖에도 그녀는 언론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말했다. 작년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최고조로 깊어진 언론에 대한 불신조차 그녀는 ‘건강한 과정’으로 해석했다.
 
“대한민국 언론이,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에요. 하지만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는 건 적어도 국민들이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녀는 신랄하지만, 낙관적인 시선으로 한국 언론을 바라봤다. 우리의 시대는 ‘기레기’의 시대지만, 그래서 이 시대를 사는 언론인들은 도매금으로 ‘기레기’로 기억될 테지만, 이 과정이 지나고 나면 후대에는 더 나은 모습의 시대가 올 거라는 거다. 언론계의 ‘비주류 중의 비주류’인 그녀가 하는 이야기치고는 너무 낙관적이지 않은가. 그녀는 지금의 현실을 모두 역사의 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억울할 것도, 비관할 것도 없단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좋다, 기꺼이 기레기 소리를 들어주마!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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