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게 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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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다른 KBS 특집극 ‘눈길’이 제작되기까지

 3.1절이 껴 있던 지난 주말, KBS에서 2부작 드라마 한 편이 방영됐다. 제목은 <눈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이 아프고 민감한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드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만들어진다한들 많이 볼까, 기대만큼이나 우려도 컸다. 그러나 방영 후, <눈길>은 ‘가슴 먹먹한, 아프지만 좋은 드라마’라는 평가 속에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아프지만 좋다는 건 어떤 뜻일까. <눈길>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눈길>의 유보라 작가와 이나정 PD, 함영훈 CP와 대화를 나눴다.

“더 늦기 전에.”

▲ KBS <눈길> 포스터. ⓒKBS
<눈길>은 유보라 작가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2013년 드라마 <비밀>로 주목받은 유 작가는 방송사 내부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모두들 당연하게도 그녀의 차기작으로 미니시리즈를 예상했다. 하지만 정작 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에도 “위안부 문제를 다룬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유 작가는 ‘수요 집회’에도 참석하는 등 오래전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언젠가부터 그녀 머릿속에는 ‘더 늦기 전에’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생존자는 53명. 유 작가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었다”며 “다들 고령이신데, 더 늦게 전에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함영훈 CP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제작을 추진했다. 선뜻 드라마화를 결심하기 쉽지 않은 소재였지만 함 CP는 유 작가의 취지에 공감했다. 그는 유 작가와 단막극 작업 경험이 있는 이나정 PD를 연출로 추천했다. 함 CP는 이 PD에 대해 “감정묘사와 표현이 굉장히 섬세한 친구”라며 “어렵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소재지만 역량이 충분하니 믿고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눈길>은 제작진이 얼마나 열심히 자료조사를 했는지 그 노력이 여실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일제시대 교실의 풍경, 위안부 막사의 모습, 옷과 머리 모양까지 드라마 속 세세한 부분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작은 소품 하나까지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 없었단다. 이 PD는 “대본과 캐스팅이 너무 좋아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며 “당시 모습을 똑같이 구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PD는 40년대 영화와 다큐멘터리 등을 섭렵했고, 도서관에서 당시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공부했다. 그녀 뿐 아니라 소품팀과 촬영팀 등 모든 스태프들이 열의를 갖고 준비했다. 이 PD는 “모두가 사명감을 갖고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신경을 썼다”며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다 함께 진심으로 준비한 그런 작품이었다”고 회상했다.

▲ KBS <눈길> ⓒKBS
세 사람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만든 드라마”라고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해 함 CP는 <눈길>이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드라마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눈길>은 콘텐츠를 생산하자는 욕심에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숙성된 고민과 진심에서 시작된 드라마”라며 “진심은 통하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제작진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도 시청률이나 화제성, 인기가 아니라 “이 작품이 적어도 할머니들께 부끄럽거나 죄송스러운 결과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어떤 시선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본과 연출에서 자극적인 요소가 최대한 배제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작진은 드라마를 극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고 자극적이지 않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유보라 작가는 “극적으로 대본을 만들면 시청자가 극에 몰입하도록 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 시절 어려운 일을 겪었던 분들은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하는데 가장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유 작가는 집필을 위한 취재 과정에서도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직접 접촉은 피했다. 드라마를 쓰겠다는 명분하에 할머니들께 감히 취재를 요청하고, 힘든 기억을 또다시 떠올리도록 하는 일이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눔의 집 등을 방문해서도 조용히 지켜만 보다가 오곤 했다.

이 PD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참혹한 역사라서 자극적인 부분을 배제하는 작업이 오히려 쉽지 않았다”면서도 “최대한 은유적으로 연출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뜻을 함께 한 배우들의 마음이 더해졌다. 배우 김영옥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춥고 힘든 촬영을 불사했다. 김영옥은 어린 시절 동네 언니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걸 직접 목격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힘든 촬영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PD는 김영옥에 대해 “촬영장의 중심이 되어 이끌어 주셨다”며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사명감을 갖고 나서주셨다”고 말했다.

진심이 모여 만들어진 작품

먹먹한 연기를 펼친 어린 배우들의 열연도 있었다. 위안부 소녀를 연기한다는 건 어린 배우들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 그런데 작품의 취지를 들은 배우들은 대본을 보기도 전에 참여하겠다고 답변을 주었다. 대본 작업 단계에서 유 작가와 이 PD가 ‘베스트’라고 생각했던 김새론과 김향기가 영애, 종분 역할로 캐스팅됐고, 이들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큰 힘이 됐다.

다만, 힘겨운 역할을 맡게 될 어린 배우들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대본 단계에서 많이 배제했다고는 해도 은유적으로 남아 있는 장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PD는 “어린 친구들이 그 상황을 연상하지 못하도록 씬을 나눠서 촬영하는 등 연출적인 배려를 하려고 노력했다”며 “배우들이 상처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촬영방식을 많이 연구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PD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어린 배우들은 제 역할을 너무도 훌륭히 해내주었고, <눈길>은 참혹한 소재를 이런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함 CP는 제작진 이외에도 작품의 취지에 공감한 많은 사람이 아무런 사심이나 욕심 없이, 재능 기부 수준으로 도와주었다는 후문을 전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아져 탄생한 작품인 셈이다.

그렇게 탄생한 <눈길>은 담담한 드라마지만, 시청자들은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먹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 시청자들도 그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KBS <눈길> ⓒKBS
▲ KBS <눈길> ⓒKBS
<눈길>은 단순히 영애와 종분이 겪은 참담한 사건을 보여주고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전쟁과 폭력으로 파탄 난 수많은 삶,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삶과 꿈을 빼앗긴 개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위안부 할머니들도 한 때는 꿈 많은 소녀였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눈길>은 지금도 여전히 개인을 파괴하는 구조적 폭력이 횡행하는 사회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불량소녀’ 은수의 캐릭터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아무런 보살핌 없이, 세상 밖에 홀로 내팽개쳐져 상처 받으며 살아가는 은수는 이 시대에 적용되는 영애와 종분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유 작가는 “은수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약자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 사회의 무관심 등을 보여주려 했다”며 “그로 인한 상처나 고통은 지금 이 사회에도 똑같이 존재함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드라마 말미 <눈길>이 결국 보여준 것은 이 비열한 세상이 주는 상처에도, 우리는 함께 보듬어나가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의지와 희망이었다. 작가는 종분과 영애, 종분과 은수의 관계를 통해 연대의 의미와 필요성을 강렬하면서도 따뜻하게 전한다.

“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한국군에 피해를 입은 베트남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고 사과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어요.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손을 잡아주고, 당신을 위해 힘껏 애쓰겠다고 말하는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모습. 그런 식의 연대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지금 이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눈길>은 치유를 위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마음 아프지만 따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하는 드라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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