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불행한 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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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MBC ‘양희은 강석우의 여성시대-행복한 어린이’

※ ‘행복한 어린이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듭니다’(이하 행복한 어린이)는 MBC 라디오 <여성시대 양희은 강석우입니다>(이하 여성시대) 3,4부에서 올해 1월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방송되고 있는 코너입니다. ‘어린이 글짓기 대회 – 나는 이런 어른이 되고 싶어요’로 시작해 현재 다달이 사교육 문제, 학교 폭력 등 주제를 바꾸어 가며 청취자 사연과 전문가 대담을 엮어 방송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직접 연출하는 사람으로서 좀 부끄러운 말이 되겠지만, 나는 솔직히 ‘행복한 어린이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듭니다’ 코너에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프로그램의 목적이 계몽적 성격을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의도가 드러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소화해 낸 방송은 세련되고 멋있다. 연출에 실패해서 계몽성이 도드라져 버리면 설득력은 떨어지고 방송은 권위적으로 변한다. ‘행복한 어린이’ 코너는 아직 그 사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PD로선 이 코너가 참으로 까다롭다.

새로운 기획, 특히 정기적으로 방송할 고정 코너를 만들 때,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못지 않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몇 가지 있다. 전반적인 프로그램 색깔과 잘 어울리는가. 진행자 캐릭터에 잘 녹아들 수 있는가. 기존 청취자들이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행복한 어린이’는 이런 점에서, PD에게 확신을 준 기획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1년간 이 코너를 진행하기로 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행복한 어린이’는 <여성시대> 차원이 아닌 MBC라디오 차원의 2015년 연간기획이다. 기획 과정도, 라디오 전체 연간기획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어린이재단’이 함께 하기로 하면서 구체화했고, 가장 어울리는 프로그램으로 <여성시대>가 선정되어 지금의 자리로 온 것이다. 과정상 수용해야 했다.

‘UN 아동권리협약’이 생경한 사회

그런데 과정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다루어야만 할 중요한 테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라는 소재가 던져졌을 때, 방송쟁이라면 보통 어떤 접근을 하게 될까. <아빠 어디가> 처럼 어른들의 위안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집 폭행사건, 칠곡 아동학대 사건, 이런 소재를 걸고 심층적으로 파고들 수도 있다. 라디오에서 가장 보편적이면서 공익성을 담보하는 방식이라면, 아마도 소외계층 어린이의 이야기를 담아 온정에 호소하는 접근법을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런데 자료를 뒤지면 뒤질수록, ‘어린이 문제’가 일부 특수한 사례만 다루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주 평범하고 선량한 어른들도 어린이에 대해, 어린이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어린이에 관한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규약은 아마도 ‘UN 아동권리협약’ 일텐데, 예를 들면 이런 조항들이 있다.

 

▲ MBC '양희은 강석우의 여성시대' 홈페이지 캡처
”어린이에게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다.”, “어린이에게는 자신과 관계된 문제를 결정할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 “어린이에게는 사생활을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의 전화, 메일 등을 마음대로 봐서는 안 된다.”

다른 곳도 아닌 UN이 만든 조항인데, 몇몇 조항들에 대해선 ‘급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생경했다. 대다수의 한국 사회 어른들은 어린이를 이렇게 대하지 않는다. 종교를 골라주고 옷을 골라주고 일기를 검사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할 존재일 뿐이다. ‘왜?’라는 질문을 거듭해 가다 보면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는 존재로 보지 않는’ 어른들의 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잘못 발현되면, 한편에는 아동학대가 벌어지고, 한편에서는 심각한 마마보이가 나타난다. OECD 국가 중 ‘어린이 삶의 만족도 꼴찌’ 라는 조사결과는 지금 한국 어린이가 놓여있는 상황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어보다.

“행복한 어린이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듭니다”라는 타이틀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경하는 선진사회는 어린이 인권, 어린이 정책도 선진적인 사회이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행복한 삶, 행복한 가정의 비주얼은, 어린이가 행복하게 웃고 놀고 꿈을 키우는 모습이다. 당연하다면서, 혹은 어쩔 수 없는 거라면서 어른들이 벌이는 과다한 사교육, 차별 주입, 과잉개입, 모든 것이 어린이 입장에서 보면 인권침해이고 행복권 박탈이다. 그렇게 해서 어른들은 행복해지던가. 행복한 가정이라는 이상형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라는 것은 어른들도 잘 알고 있다.

이만하면 <여성시대>에서 1년간 고정코너로 만들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문제는,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여성시대>에 어울리게 담느냐는 것이다. 처음 이 기획을 맡고서, 막막한 마음에 인근 도서관을 뒤진 적이 있었다. 나의 부족한 기본기 때문이었을지는 모르나, 어린이 문제 전반을 다룬 국내 서적을 단 한 권도 찾을 수 없었다. 외국 저자들의 책은 드문드문 눈에 띄였지만 직접 참고하기는 무리였고, 정신과 전문의 상담사례집이 그나마 넓은 소재를 다루고 있을 뿐, 우리나라 전문가가 우리나라 어린이 문제에 대해 전반적으로 분석하고 진단한 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능 좋은 나침반 하나라도 구하면 좀 나을 것 같았는데, 흩어진 자료들을 모아서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까다로운 조건은, <여성시대>는 청취자 앞에서 제시하고 가르치는 성격의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성시대>는 청취자가 보내준 편지 사연만으로 채워진다. 같은 눈높이에서 같이 교감하고 같이 배워가는 프로그램이다. 이 정체성을 지키면서 어린이에 관련된 수많은 정보와 토픽들을 어떻게 담아가야 할지, 나는 아직도 만족할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직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나침반 없이 산에 오르고 있지만, 가다 보면 제대로 된 길이 보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멀리 봉우리의 윤곽도 보이고, 앞에는 오솔길도 나 있다. 무책임한 학교와 가해자 부모의 집요한 괴롭힘을 뚫고 나가는 학교폭력 피해 가족의 편지, 6학년 때 왕따를 당하고 혼자 그림만 그리다가 이제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을 찾았다는 15세 소녀의 편지와 그림, 이런 사연들이 정신을 버쩍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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