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청취자를 알고 있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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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없는 라디오 시대 ③]

*우리는 청취자를 알고 있나(1)에서 이어집니다.

1960년대 미국이나 서유럽에서는 라디오가 광고 매체로 각광을 받으면서 ‘소프 오페라(Soap Opera)’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자동차의 보편화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라디오는 가정에 있는 여성들, 특히 주부들의 매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 주부들이 라디오를 집중적으로 청취한다는 증거들이 확고해지면서 이 시간대에 드라마가 편성되고 여기에 주부들이 자주 찾는 대표적인 상품인 세제의 광고가 많이 실리게 됩니다. 그래서 라디오 드라마에 소프 오페라라는 이름이 붙기에 이릅니다. (지금은 소프 오페라라는 이름도 TV 드라마에 빼앗겼지요.)

대다수 농어촌 여성들이 방송을 청취하지 못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적극 편성했던 1960년대 우리 라디오를 돌아보면, 혹시 논문이나 책을 통해 접하는 서구 사회의 청취자를 우리 청취자라고 생각하고 방송했던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pixabay

박정희 정권이 정책적으로 라디오 보급에 나서면서부터 전국적인 라디오 수신기 보급률 통계가 신문 기사로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청취율에 대한 것은 서울 주요 지역에 대한 소규모 조사 외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특히 수용자 행태에 대한 대규모 조사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1970년대 TV 붐이 일어나면서 라디오가 주요 매체의 자리를 내줄 때까지 우리 라디오는 전면적인 수요 조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TV 시대에 들어서면서 라디오를 위한 수용자 조사는 더욱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재 우리 라디오 청취자에 대한 조사는 한국 리서치에서 수도권 주민 3000명을 대상으로 1년에 네 번씩 하는 청취율 조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해까지 2000명을 대상으로 여섯 번씩 하다가 올해부터 패널을 늘린 것이지만, 3000명에 대한 조사라고 하면 청취율이 1%가 나와도 (아시다시피 청취율 1%면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Top 50’ 안에 들어갑니다.) 응답자가 3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30명을 분석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요?

영국에는 RAJAR(Radio Joint Audience Research)라고 하는 청취율 조사 기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매년 10만명을 대상으로 청취 행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TGI(Target Group Index)라는 심층 조사도 병행하는데, 심층 조사의 대상이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릅니다. 이런 조사를 통해 청취자들의 청취 행태와 라이프 스타일부터 다른 매체와 비교 우위 및 열위 부분까지 상세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제가 방문했던 라디오 펀키즈(Funkids)는 어린이를 주 청취 타깃으로 하고 있는데, 최고 청취율이 1%를 넘는 경우가 많지 않은 상대적으로 작은 방송사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청취자 조사를 통해 ‘밤 9시 이후에 펀키즈를 듣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듣던 채널을 그냥 켜놓은 채로 듣고 있는 어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채널을 바꾸지 않고 그냥 듣고 있다면 얼마나 지쳤다는 뜻이겠느냐는 생각에서 이 시간에는 어른들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펀키즈를 듣는 아이들은 일반적인 7살에서 10살 아이보다 극장에 네 배 더 자주 간다는 정보를 얻어내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영화업계의 광고를 따오거나 디즈니와 같은 회사의 홍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곤 합니다.

▲ 영국의 어린이 라디오 채널 '펀키즈'의 유명 진행자인 션이 디즈니 영화 '비행기 2' 제작자들과 함께 소방헬기 탑승 이벤트를 가진 후에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제대로 된 조사를 통해 청취자에 대해 알게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새로운 수익을 창출해낼 수 있습니다. 영국의 라디오가 지금도 90%가 넘는 청취율을 기록하고 우리 라디오의 4배가 넘는 광고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비결 중 큰 부분이 이 청취자 조사일겁니다.

TV가 등장한 후로 우리는 늘 라디오의 위기를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어떤 위기가 오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추정만 했을 뿐 제대로 된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해보지 않았습니다.

▲ 유창수 CBS PD

어쩌면 우리 라디오는 정말 심각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반대로, 생각보다 쉽게 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할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청취자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겁니다.

 

[유창수 PD의 '라디오 없는 라디오 시대' 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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