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나에게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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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책] 정윤범 EBS PD

“우린 XX 예전에 끝났어. 돈 때문에 음악 하는 거지. XX. 그러니까 나갈 때 X 같은 티셔츠나 사.”

영국 락 밴드 오아시스(Oasis)의 어록 중 하나다. ‘형님들’이 사라고 하시는데 별 수 있나. 얼마 전 있었던 노엘 갤러거의 내한 공연에서, 나는 4장의 티셔츠를 샀다. 이런! 티셔츠 값이 티켓 값보다 비싸게 될 줄은 몰랐다.

거침없는 언행, 솔직함 그리고 자신감. 나에게 오아시스의 리더, 노엘 갤러거는 락스타(Rock-Star) 그 자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노엘 갤러거에게 빠지게 된 것은, 그의 성실함을 알고 나서 부터다. 사실 락커라고 하면, 늘 만취상태로 껄렁거리고 약물도 가끔 해주고 폭행도 좀 하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그런 이미지 아닌가. (아아. 물론 노엘도 충분히 건방진 술, 담배 마니아라는 점에서는 락커의 이미지를 충족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엘은 하루 12시간의 합주를 하는 연습벌레다. 결코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않다.

뮤지션, 화가, 작가….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예술가. 영감(Inspiration)이 바탕이 되는 일들은 규칙적인 생활, 꾸준함 그리고 성실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종종 뛰어난 예술가일수록 성실하다는 사례가 발견된다. 노엘 갤러거 뿐만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다. 자고로 작가라 하면, 며칠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틀에 벗어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하루키는 아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문학사상

내가 생각하기에,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는 ‘성공한 작가의 한 가지 습관’이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바로 그 한 가지 습관은 바로 성실이다. 하루키는 계속해서 글을 쓴다. 쓰고 또 쓴다.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밤 10시전에 자는 간소하면도 규칙적인 생활. 하루에 정해진 분량의 글을 반드시 써내고, 정해진 시간만큼은 반드시 책상에 앉아 있을 것. (레이먼드 챈들러와 마루야마 겐지도 마찬가지였다.)

하루키는 끝없는 쳇바퀴 위에 올라서는 생활이 꽤나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편 소설을 쓴다고 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는 육체노동’이라고 말한 것을 보니 말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매일매일 집필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길 원했고, 그 수단으로 택한 것이 마라톤이었다. 이 책은 ‘성실하고 꾸준한 창작활동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한 어느 작가의 이야기’라고 한 줄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작가는 마라톤으로 단련한 성실성을 이용해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라고 한 줄을 더 추가할 수도 있겠다. 서평 끝.

그럼 이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해보겠다. 책 서평을 위해서 내어준 지면이지만, 처음 쓰는 글이니 만큼 내 이야기를 조금 풀어볼까 한다. 노엘 갤러거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거쳐서 라디오 PD 제 이야기를. (노엘과 하루키가 내 이야기를 위한 ‘떡밥’으로 사용되다니!)

아직 입사한지 석 달도 되지 못한 나는, 여기저기서 ‘어리버리’ 막내 PD다. 아직 20대 내 주변 친구들에게 내가 라디오 PD라고 말할 때 마다, 지겹도록 들은 말. “왜 TV가 아니라 라디오 선택한 거야?”라는 질문이다. 라디오를 잘 듣지 않는 세대인 만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니까!”라는 대답은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만족스럽지 않다. 음악 오디션 TV 프로그램도 많고, 음악을 라디오에서만 들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니까. “따뜻하잖아. 생방송이잖아. 착한 매체잖아”와 같은 대답은 MSG에 익숙한 20대들에게는 너무나 유기농스럽기에 부적합하다.

약 90일 간의 막내 라디오 PD 생활을 통해 찾아낸 대답을, 이제야 여기서 한다. 라디오 PD의 매력은, 위에서 말한 꾸준함과 성실함이다. 원고를 준비하고, 음악을 선곡하고, 생방송을 하고, 청취자를 만난다. 거의 대부분 같은 시간에, 규칙적으로 말이다. 12시간의 합주 연습을 하는 생활… 쳇바퀴에 올라타서 글을 쓰는 규칙적인 생활과 같은 맥락이다.

규칙적인 생활, 꾸준함 그리고 성실함. 이것들이 바탕이 된 라디오 PD의 생활이 조금씩 나를 다듬어준다는 것을, 요즘 느낀다. 하루에 반강제적으로 수십 곡의 노래를 듣고, 타인의 사연에 귀 기울여 듣고, 좋은 문장들을 단어 하나하나의 단위로 곱씹으며 듣는다.

▲ 정윤범 EBS PD

가슴이 뭉클. 눈시울이 찡. 분주했던 스튜디오 전체가 감상에 젖어버리는 순간들이 주기적으로 있다. 이 순간 스쳐가는 감정들과 생각들은 차곡차곡 내 안에 자양분으로 쌓이리라.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거야!’ 옛말(?)은 역시나 옳다. 성실의 미덕. 아마도 90일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 필자 정윤범은 '아직까지 출근이 즐거운' 라디오 PD, 현재 EBS 라디오 <책처럼 음악처럼'(밤 9~11시)를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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